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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다시 시작하는 믿음

20180624 쓰임교회 주일설교

 

다시 시작하는 믿음

 

<마가복음 4장 35-41절>

 

35. 그 날 저녁이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 

36. 그래서 그들은 무리를 남겨 두고,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갔다. 

37. 그런데 거센 바람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오므로, 물이 배에 벌써 가득 찼다.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39.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하고 말씀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서로 말하였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많은 것을 믿고 사는 우리

 

주님 주시는 평화가 이곳에 함께 하길 빕니다. 

 

지금은 성령강림 후 다섯 번째 주이자 월드컵 주간이기도 합니다. 축구 좋아하십니까? 저는 축구를 좋아합니다. ‘잘하는가?’는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엄청 잘하기 때문입니다. 농담입니다. 

 

월드컵 기간이라 축구 얘기를 좀 해본다면,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축구는 여러 명의 동료와 함께 하는 운동입니다. 파트너와 함께 하는 운동이 모두 그렇지만 축구 또한 같은 팀 동료를 믿고 하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공을 패스할 때도 동료가 내 공을 잘 받아줄 것을 믿고 패스하고, 공을 받을 때도 내가 뛰는 방향으로 공을 잘 건네줄 것을 믿고 그 공간으로 뛰어갑니다. 서로 간의 신뢰가 없다면 팀(Team) 스포츠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스포츠는 단편적인 예입니다만, 평소 우리는 신앙을 떠나서도 훨씬 많은 것을 믿고 삽니다. 무슨 말인가 싶으시죠? 우리가 고층 건물에 올라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파트나 백화점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우리는 아무리 높은 건물에 올라갔다 해도 크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건물이 무너지지 않을 것을 무의식중에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뿐이겠습니까? 비행기처럼 빠르게 이동하는 교통수단을 타더라도 우리가 불안해하지 않는 이유는 문제없이 우리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매순간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는 이유는 특정한 대상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의식 속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반증이 가능한 믿음

 

물론 ‘믿음’은 깨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믿음은 ‘반증’이 가능합니다. 내가 믿던 것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기도 하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건물이 무너지거나 교통사고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생활’과 아주 유사합니다. ‘지속성’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일관성이 없더라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매일의 삶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신앙생활을 지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믿음이 흔들리고 때론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흔들리는 믿음을 다시 붙잡거나 혹은 기존의 약한 믿음을 더 굳건하게 하는 것이 믿는 자들의 삶 아닐까요? 오히려 높낮이가 있는 믿음 속에서 다시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하고 경험하는 것이 의심의 여백이 없는 사람들보다 더 인간적인 것 아닐까요? 예수도 마찬가지셨죠. 자신에게 드리워진 잔을 피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우리 삶에서 ‘믿음’이 중요한 이유는 이 믿음이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게 하고, 느껴야 할 것을 제대로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풍랑을 마주친 제자들

 

마가복음에도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려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두고 건너가려고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배를 마련해 예수 일행을 따라옵니다. 그렇게 바다 건너편으로 이동하는 중에 예수 일행은 거센 바람과 마주칩니다. 

 

거친 풍랑으로 인해 배 안으로 파도가 들이쳤고 그 때문에 배에 물이 차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배의 고물(stern) 다시 말해 배 뒤쪽인 선미(船尾), 선로(船路)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깨우며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그러자 예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고요하고, 잠잠하여라”라고 말씀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고요해졌습니다. 예수의 말 한마디에 만물이 잠잠해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왜들 무서워하냐고, 아직도 믿음이 없냐며 말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서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라고 말입니다. 

 

재-점화(再-點火) 되는 믿음

 

사실 이 부분도 참 중요합니다. 예수와 한 배에 탄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예수가 가는 길을 함께 걷고자 길을 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오늘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예수의 단면만 보고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제자들도 그러한데, 보지 않고 믿는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닐까요? 우리는 다 알기에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따르면서 알아가는 존재입니다. 

 

사실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질책’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연민’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제자들을 향해 하신 예수의 말씀은 질책이나 훈계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연민의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누구라도 풍랑을 마주친 배 안에 있으면 임박한 죽음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 사람이었던 예수께서 인간의 유약함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믿음이 없다고 하신 것은 질책보다는 깊은 이해에서 나온 연민의 말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통해 제자들의 믿음에 재-점화(再-點火)를 하려고 하셨습니다. 

 

삶의 무의미성

 

우리는 문제나 고민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육체를 지닌 한계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로 원치 않는 일이나 우발적인 일이 일어났을 때 힘들어합니다. 곤란해 하죠. 그럼 우리는 왜 내게 일어난 일 앞에, 내게 발생한 일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일까요? 

 

이 고민을 하다가 두 가지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는 ‘무의미성’입니다. 내게 일어난 일이 아무 의미 없이 일어났다고 여겨질 때 우리는 혼란스러워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발생한 것에 관해 부정하고 싶어 합니다. 특히 그것이 내 의도와 무관하게 일어난 경우에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하루하루라는 시간 속에 영겁의 세월이 깃들어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게 발생한 모든 일은 의미가 없지 않습니다. 

 

저는 이 ‘의미’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표현을 소설에서 찾았습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책 <연금술사>와 <오자히르>에 나오는 ‘표지’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해당 내용 가운데 한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나는 표지를 믿는다. 산티아고 길을 순례한 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알아야 할 것은 언제나 눈앞에 있다. 신이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가려는지, 그리고 그 순간 우리가 어느 발을 내디뎌야 할지를 알기 위해서는 경건한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여 주변을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신비로움에 경의를 표할 줄 안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신은 우주를 상대로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엔 의미가 있다. 그 의미가 거의 언제나 감춰져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는 일에 열정의 에너지를 접할 때 우리는 진정한 사명에 다가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 

 

그렇게 된다면 모든 일은 잘될 것이다. 아니라면 즉시 방향을 바꾸는 편이 나을 것이고. ​ 

 

옳은 길을 가고 있다면, 우리는 표지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때로 잘못된 길로 접어들면, 신은 우리를 도와주고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막아선다.”

 

파울로 코엘료, <오자히르>, 문학동네, p.224

 

작품 속 주인공은 곳곳의 ‘표지’들이 우리를 신의 뜻으로 이끌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알아야 할 것은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언제나 내 눈앞에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여 주변을 살펴보기만 하면 됩니다. 모든 것엔 의미가 있기에 내게 일어난 일들 또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게 발생한 일에 주님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미 와 계신 주님을 그 일 가운데에서 다시 발견하는 것입니다. 

 

피해의식에서 온 ‘죄책감’

 

그리고 우리가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났을 때 힘들어하는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죄’ 혹은 ‘죄책감’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혹시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 아닐까?’, ‘주님께서 싫어하는 것을 했던 게 이런 결과로 나타난 거 아닐까?’ 등의 생각이 내게 일어난 일의 힘듦을 가중시킵니다. 물론 정말 나의 잘못된 의도 때문에 어려운 일을 당할 수도 있지만 그 잘못은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 수 있기에 어느 정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우리의 ‘피해의식’에서 온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믿음 좋은 사람의 판단처럼 보여 지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죄’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충만해진 기쁨과 감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는 회개한 이후에도 ‘죄책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남는 것입니다. 

 

악과 죄에도 함께 하는 하나님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리는 우리에게 발생한 힘들고 어려운 일 앞에 ‘자신의 죄’를 찾아 나서기에 앞서, 발생한 그 일에 ‘하나님을 초대’해야 합니다. 먼저 주님 앞에 자신의 진솔한 심정을 드러내고 그분의 이끄심을 느껴야 합니다. 

 

<침묵>과 <깊은 강>을 쓴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는 그의 책 <나의 하느님은>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악에도 죄에도 하느님의 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두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어떤 일에도 하느님의 손길이 작용하신다.'는 사실을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점차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존재가 아니라 작용입니다.” 

 

엔도 슈사쿠, <나의 하느님은>, 성바오로, p.26

 

그는 ‘악’에도 ‘죄’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말합니다. 그의 신학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 잘 믿는 것일까요? 하나님께 내 짐을 맡기고 나 몰라라 하면 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스스로 깊이 생각하는 수고와 선한 행동을 향한 요구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때론 흔들리고 때론 벅차오르기도 하다가 때론 알 수 없는 일을 경험하는 시간 속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역할을 회피하는 것도 아니고 강박적으로 그래야 하는 것에 사로잡히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믿음이 없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언제고 말입니다. 

 

지금 예수께서 우리를 향해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답하면 되지 않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나를 인도하는 주님과 동행하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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