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25 쓰임교회 주일설교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라
<마가복음 8장 31-38절>
31.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3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34.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38.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다르게 지내보는 절기, ‘사순절’
주님의 평화가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절이 시작 됐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평소와 다름없는 주일이지만 사순절 둘째 주이기도 합니다.
사실 교회력 절기로 ‘사순절’을 보내고는 있지만 목사인 저로써도 이 절기 때 무엇을 더 하고 무엇을 덜 할지가 늘 고민입니다. 왜냐하면 모두 아시다시피 ‘사순절’은 주님의 뜻을 집중적으로 분별하기 위한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이 다른 숱한 절기 때는 자기 멋대로 살다가 이 시기에만 자세를 고쳐 앉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순절’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을 묵상하며 무심코 지나쳐왔던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절기에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삶’을 조금 낯선 시선으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낯설게 보기 위한 시도, 그 시도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는 예술적 작업의 특성을 일러 ‘낯설게 하기’라고 했다죠. 그렇다면 이 ‘사순절’은 교회가 시도하는 ‘예술적 작업의 시기’라는 말로 달리 표현이 가능하겠네요. 그런 시도들에는 무엇이 있고 또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요?
대표적인 방법이 ‘다르게 지내보는 것’이죠. 평소와는 다르게 지내보는 겁니다. 예를 들어, 매번 먹던 음식을 안 먹고 다른 음식을 먹어 본다던지 아니면 매번 걷던 길로 걷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길로 걸어가 본다던지 혹은 매번 자던 취침시간이 있는데 다른 시간에 잠을 청해 본다든지 등 크고 작은 시도들이 가능할 겁니다. 뭔가 거창한 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작고 평범한 시도를 통해 우리는 일상을 낯설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와 성도들은 이 사순절에 말씀 묵상에 더 집중해 본다거나 기도의 시간을 늘려보고 또 미디어 금식 등을 해보는 것이죠. 뭐든 좋습니다. 중요한 건 결과보다 시도하는 행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이야기 나누기 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의 몇 마디 말로 제자들이 자신들이 믿어오던 것들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죠. 서두에 나눈 이야기로 다시 표현해 본다면 예수의 말로 제자들은 자신들이 살게 될 앞으로의 삶이 낯설어 보이게 됩니다.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 예수께서는 곳곳을 다니며 열심히 사역 중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따르던 굶주린 무리를 위해 일곱 개의 빵과 작은 물고기 몇 마리로 약 사천 명을 먹이시고 또 바리새파 사람들의 표징 요구에 지혜로운 말로 대처하기도 하였으며 또 눈먼 사람의 시력을 회복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예수께서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전 상황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참되고 새로운 권위자임이 드러났던 것이죠.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적어도 제자들과 무리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던 것입니다. 아마 저 또한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예수를 보았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돌발적인 행동
예수께서는 오늘 본문 첫머리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31).” 그는 제자들 앞에서 조금 뜬금없어 보이지만 자신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그 자리에 있던 베드로는 좀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하죠. 베드로는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했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보시고 그를 꾸짖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33)!”
그런데 베드로의 돌발적인 행동과 그 행동에 따른 예수의 답변이 우리의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그럼 먼저 베드로는 왜 예수의 말을 듣고 그를 잡아당겨 항의했을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제 생각에 아마 베드로는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예수와 한 공동체를 이루어 그를 따르고 있었고 그의 스승인 예수의 죽음은 곧 자신의 죽음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두려움에 휩싸여 예수를 붙잡고 말았습니다. 자신도 자기 행동을 통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따르기 위해, 그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그런데 예수는 그의 행동을 크게 꾸짖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는 베드로의 행동을 사탄의 행동으로까지 칭하며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 발언을 한 번 곱씹어보게 됩니다. 베드로의 행동의 어떤 면이 사탄의 행동과 닮았는지를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는 그 기준은 무엇일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와 관련하여 몇 가지 힌트를 주십니다. 다음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이런 말씀을 하시지요. 좀 길지만 오늘 본문 후반부를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34-38).”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자신이 걸어간 길 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몇 가지 길을 안내해 주십니다. 그것은 다음의 것들이었죠. 자기를 부인할 것, 자기 십자가를 질 것,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지 말고 예수와 복된 소식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을 것, 예수와 그가 한 말을 부끄러워하지 말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의 특징
사실 예수가 한 말 한마디 한 마디는 모두 중요합니다. 그리고 단 하나의 문장 가지고도 할 이야기가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시간에는 이 말들이 가리키고 있는 것을 한 마디로 정의해 보고 그 정의를 중심으로 더 이야기 나눠볼까 합니다.
저는 예수께서 나열한 이야기들 속에서 다음의 것을 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라고 요구하고 계신 것을 말입니다. 좀 어려운 말이기도 한 이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죠.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의 책 <사랑의 기술>에서 묘사되어 있는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물론 책 맥락에서 보자면 덧붙여야 할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사람’, ‘이기적인 사람’의 특징만을 나누기에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고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원하며, 주는 데서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받는 데서만 기쁨을 느낀다. 그는 거기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만 외부 세계를 본다. 그는 다른 사람의 욕구에는 흥미가 없고 다른 사람의 존엄성과 통합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유용성을 기준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판단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랑할 줄 모른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p.85)
자신마저 사랑할 줄 모르는 ‘자기중심적인 사람’
만약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라는 요구가 맞다 하면 그가 한 말은 곧 ‘타자를 사랑하라’는 말과 같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봄직한 것은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라는 예수의 요청이 곧 자신에게 갇힌 자, 자기밖에 모르는 자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의 표현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방금 책 <사랑의 기술>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자기 중심성’에 갇힌 자 즉, 이기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사실은 자기 자신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사랑하지 않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으시죠? 왜 우리는 ‘이기적인 사람’은 당연히 자신을 너무 사랑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쉽게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을 더 들어봅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과 배려의 결여 – 이것은 그의 생산성의 결여에 대한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 는 그를 공허하게 만들고 좌절시킨다. 그는 필연적으로 불행하며 생활에서 만족을 얻기 위해 초조해하지만 스스로 이 만족의 달성을 가로막고 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돌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진정한 자아를 돌보는 데 실패한 것을 은폐하고 보상을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며,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끝난다. 프로이트는 이기적인 사람은 그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철수시켜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과 같으므로 이기적인 사람은 자아도취적이라고 주장한다. 이기적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또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도 못한다.” (위의 책, p.86)
결국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기 원하는 사람 중 더 힘든 사람은 ‘자기 중심성’에 빠진 사람 즉, 사랑받기 원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 사람은 타자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이중적 소외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과 내가 상생하는 삶
사랑하는 쓰임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은 사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사순절의 시간 위를 지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타자를 위해 사는 삶이 곧 자신을 따르는 삶,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건 무조건적인 희생, 헌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남을 잘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 또한 잘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누군가에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은 곧 내 안에 계신 주님과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자기 안에 사랑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실 나눠줄 사랑이 없다는 것은 자기 안에 사랑이 고갈되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어쩌면 그 사실이 가장 가슴 아프셨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를 따르는 길은 곧 하나님과 잘 지내는 것, 내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득 채워야 함에 그 핵심이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러한 일을 스스로 해내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불가능하진 않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무엇이 필요할까요?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매 순간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순절’이 이런 기회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매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채기 위한 기도의 시간을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를 잘 사랑하는 것이 곧 타자를 잘 사랑하는 길이고 이것이 예수를 따르는 길의 초석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번 기회에 자신을 낯설게 보는 눈을 가져보시기 보십시오. 여러분이 가는 그 걸음과 마음 위에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서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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