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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독립의 신앙으로 가는 길

20180211 쓰임교회 주일설교 

 

독립의 신앙으로 가는 길  

 

<열왕기하 2장 1-12절>   

 

1. 주님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실어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실 때가 되니, 엘리야가 엘리사를 데리고 길갈을 떠났다. 길을 가다가,  

2.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주님의 분부대로 베델로 가야 한다. 그러나 너는 여기에 남아 있거라." 그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 계심과 스승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나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베델까지 내려갔다.  

3. 베델에 살고 있는 예언자 수련생들이 엘리사에게 와서 물었다. "선생님의 스승을 주님께서 오늘 하늘로 데려가려고 하시는데, 선생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엘리사가 말하였다. "나도 알고 있으니, 조용히 하시오."  

4.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주님의 분부대로 여리고로 가야 한다. 그러나 너는 여기에 남아 있거라." 그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 계심과 스승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나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여리고로 갔다.  

5. 여리고에 살고 있는 예언자 수련생들이 엘리사에게 와서 물었다. "선생님의 스승을 주님께서 오늘 하늘로 데려가려고 하시는데, 선생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엘리사가 말하였다. "나도 알고 있으니, 조용히 하시오."      

6.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주님의 분부대로 요단 강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너는 여기에 남아 있거라." 그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 계심과 스승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나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났다.  

7. 예언자 수련생들 가운데서 쉰 명이 요단 강까지 그들을 따라갔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요단 강 가에 서니, 따르던 제자들도 멀찍이 멈추어 섰다.  

8. 그 때에 엘리야가 자기의 겉옷을 벗어 말아서, 그것으로 강물을 치니, 물이 좌우로 갈라졌다. 두 사람은 물이 마른 강바닥을 밟으며, 요단 강을 건너갔다.  

9. 요단 강 맞은쪽에 이르러,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느냐?"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스승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을 제가 갑절로 받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엘리야가 말하였다. "너는 참으로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구나.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네 소원이 이루어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11.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불병거와 불말이 나타나서, 그들 두 사람을 갈라 놓더니, 엘리야만 회오리바람에 싣고 하늘로 올라갔다.  

12. 엘리사가 이 광경을 보면서 외쳤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마병이시여!" 엘리사는 엘리야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엘리사는 슬픔에 겨워서, 자기의 겉옷을 힘껏 잡아당겨 두 조각으로 찢었다.   

 

[Lumix gx9 / 20mm]

 

‘공서적(共棲的) 합일’의 사랑  

 

주님의 평화가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저는 3년째 참석하고 있는 책모임이 있습니다. 지난 주 이 모임에서 읽은 책에 나온 표현인데 여러분과 함께 나누면 좋을 거 같아 말씀드려봅니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나온 표현인데요. ‘공서적(共棲的) 합일’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종류가 다른 동물이 한 곳에 같이 모여 사는 일 또는 생활’ 공서적의 한자말을 보면 ‘공(共)’은 ‘함께하다’이고 ‘서(棲)’는 ‘살다, 깃들이다’입니다. 그렇다면 한 마디로 이 말은 뭡니까? 함께 산다는 말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미성숙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 ‘공서적 합일’의 방식으로 사랑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이를 임신한 어머니와 태아의 관계에서 해석해 내는데요. 그의 말을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공서적 합일’은 임신한 어머니와 태아의 관계에서 그 생물학적 유형을 볼 수 있다. 어머니와 태아는 둘이면서 하나다. 그들은 ‘함께’ 살고 서로를 필요로 한다. 태아는 어머니의 일부이고 어머니에게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받는다. 어머니는 말하자면 태아의 세계이다. 어머니는 태아를 먹이고 보호하지만 어머니 자신의 생명도 태아 때문에 강화된다. ‘정신적’인 공서적 합일에서는 두 신체는 독립적이지만 심리적으로는 동일한 애착이 존재한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p.36)   

 

어린아이가 독립하기를 소망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와의 공서적 합일로부터 성장합니다. 이 과정에 누구도 열외는 없습니다. 중요한 건 ‘과정’ 또는 ‘단계’입니다. 사람이 언제 성장하고 성숙해지느냐를 보면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와 스스로의 삶을 책임질 때입니다. 사람에게는 성장을 위한 과정 또는 단계가 있는 것이죠. 물론 사람이 자신의 삶 전부를 책임질 능력은 없습니다만 이 과정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임은 분명합니다.    

 

그럼 우리가 이 ‘공서적 합일’로부터 탈피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걸까요? 그 이유는 ‘제대로 보기 위함’입니다. 나 자신과 타자 그리고 이 사회와 세상을 바로 보는 눈을 갖기 위함입니다. 부모와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일이 가능한 현장에 놓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육체적이든 정서적이든 부모의 그늘 아래 있는 사람은 바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모 특히 어머니는 생의 일부를 어린아이가 독립해서 마침내 본인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를 바라는 소망에 바쳐야 합니다(p.66). 어려운 일이지만 그게 부모의 몫인 것입니다.   

 

열왕기하, 열왕들의 다양한 변천사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열왕기하에도 이와 비슷한 관계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물론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아니지만 ‘공서적 합일’의 관계로 보아도 좋을 두 사람이 등장하죠. 그들은 누구입니까? 스승인 ‘엘리야’와 그의 제자 ‘엘리사’입니다.   

 

열왕기하가 쓰여 질 당시의 상황은 대략 이러합니다. 열왕기상의 기록 마지막 즈음, 북이스라엘 왕인 ‘아합’이 죽음을 맞습니다. 그리고 짧은 즉위 기간을 갖긴 하지만 아합에 이어 열왕기하 서두에 ‘아하시야’가 왕위에 오르게 되죠. 그러니까 한 마디로 엘리야와 엘리사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열왕들의 다양한 변천사 가운데 한 지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베델, 여리고, 요단강으로의 여정  

 

오늘 본문 2장의 시작은 이러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거론되진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하늘로 데려갈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1). 그리고 예언자 엘리야에게는 가까이 둔 제자 한 명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엘리사입니다. 이 둘은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하기 전에 함께 길을 떠납니다.   

 

엘리야는 길을 걷다 엘리사에게 주님의 분부 따라 베델로 가야겠다며 너는 여기 남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주님과 엘리야 앞에 맹세하면서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베델로 갑니다.   

 

베델에 도착한 엘리야 일행은 예언자 수련생들을 만납니다. 그들이 엘리사에게 선생님의 스승을 주님께서 오늘 데려가신다고 하는데 알고 계시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하죠. “나도 알고 있으니, 조용히 하시오.” 그의 심기가 불편해 보입니다.   

 

다시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말합니다. 그는 주님의 분부대로 여리고로 가야한다고 말하여 엘리사를 향해 이곳에 남으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는 처음과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주님과 엘리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여리고로 갔습니다.   

 

여리고에 도착한 그들은 여리고내에 있는 예언자 수련생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베델에서 만난 수련생들과 동일한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의 스승을 주님께서 오늘 데려가신다고 하는데 알고 계시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엘리사는 동일한 대답을 합니다. “나도 알고 있으니, 조용히 하시오.” 여전히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아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말합니다. 자신은 주님의 분부대로 요단강으로 가야 하는데 너는 이곳에 남으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세 번째 동일한 대답을 합니다. 주님과 엘리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는데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함께 떠납니다. 이번엔 그 두 사람만 떠난 것이 아니라 예언자 수련생들 가운데 50명이 요단 강까지 동행합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직면할 때 주어지는 선물  

 

엘리야와 엘리사가 요단 강가에 이르니 일행도 멈추었습니다. 그 때 엘리야는 자신의 겉옷을 말아 요단 강물을 내리쳤고 이 때문에 강물이 좌우로 갈라졌습니다. 그곳으로 엘리야, 엘리사 이 두 사람은 마른 강바닥을 밟으며 건너갔습니다.   

 

요단 강 맞은편에 이르자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묻습니다. “주님이 나를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느냐?” 그러자 엘리사는 스승의 능력을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갑절로 받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엘리사는 엘리야가 이 소원을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아 방금처럼 이야기 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반복해서 예언자 수련생들의 질문에 불편한 심기(“나도 알고 있으니, 조용히 하시오.”)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승 엘리야와 헤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헤어질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엘리야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은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이 말은 들은 엘리야는 당황했지만 마땅히 전해야 할 말을 전합니다. “너는 참으로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구나.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네 소원이 이루어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10)” 엘리야는 좋은 스승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떠나고 나서 엘리사가 주님과 독립적인 관계를 맺길 바랐습니다. 중간에 자신을 거치지 않고서 말입니다. 그는 마지막 이별의 자리에서도 제자를 훈련시켰습니다. 엘리사를 향해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자신이 떠나가는 것을 회피하지 말고 직면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이야기 나누는 가운데 불병거와 불말이 나타났고 이것들은 그 자리에 있던 엘리야만 회오리바람에 싣고 하늘로 사라졌습니다. 엘리사는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고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이 헤어짐에 절망했습니다. 본문은 그의 심정을 이렇게까지 표현하죠. “엘리사는 슬픔에 겨워서, 자기의 겉옷을 힘껏 잡아당겨 두 조각으로 찢었다(12).” 스승과의 헤어짐에 관한 그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성숙하고 깊어지는 기쁨  

 

여러분, 우리가 가끔 사용하는 말 중에 ‘성장 통’이라는 말이 있죠. 사람이 성숙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고통 혹은 어려움이 필요하다는 말일 텐데요. 성장하며 이 통증에서 100%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겁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상황을 지났고 또 지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설교 초반에 드렸던 말씀을 기억하실 겁니다. 우리는 부모와 ‘공서적 합일’을 이룬 상태에서 자랍니다.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와 ‘공서적 합일’을 이룬 채 이 땅에 태어나죠.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자신과 타인 등 세상을 바로 보기 위해 이 합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의존성에서 벗어나야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오늘 열왕기하 본문을 통해 한 사람의 성숙 과정을 봅니다. 엘리사는 그의 스승 엘리야로부터 벗어나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좋은 일꾼이자 스승이었던 엘리야는 엘리사가 성장하기 위해 처음 어느 정도는 영향을 끼쳐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뜻을 알려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전해줄 수 없고 또 알려주어서도 안 됩니다. 그건 스스로 깊어지고 확장되는 기쁨을 박탈하기 때문입니다.   

 

매순간 자녀를 쫓아다니며, 일거수일투족 챙겨주는 부모는 절대 좋은 부모가 아닙니다. 그건 자녀 스스로 성숙해질 기회 곧 그 기쁨을 박탈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자녀는 자주 부모에게 원인 모를 화를 내게 됩니다. 자신의 기쁨을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스승과 제자 관계에도 이 말은 적용됩니다. 엘리야는 엘리사가 깊어지길 원했을 겁니다. 스스로 성숙해지는 과정을 겪길 바랐을 겁니다. 자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 앞에 선 단독자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가길 바랐을 겁니다. 그랬기에 그는 때가 되었을 때 엘리사를 떠납니다. 물론 헤어짐은 고통입니다. 모든 이별은 고통이죠. 그래서 엘리사는 몹시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이 방황과 불안 속에서 엘리야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참 뜻을 알아갈 것입니다.   

 

독립의 신앙으로 나아가라  

 

사랑하는 쓰임교회 성도 여러분! 부모와 자녀의 관계,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는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큽니다. 그들의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 나 자신과의 관계를 톺아보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이끌어준 신앙의 선배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태속에서부터 교회 문턱을 넘으신 분들은 부모가 그런 대상이 될 테고 교회로 전도한 지인이 있다면 지인이 그런 대상이 될 테고 선생님 혹은 교회의 어른이 그런 대상이었을 수 있습니다. 때론 책 속의 위인이나 신학자, 철학자 등이 그 대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신앙’은 하나님과 자신의 직접적인 연결 속에서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야 더 확장되고 더 즐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선배들에게 감사함을 잃지 않은 채 ‘독립’을 이루어야 합니다. 독립은 교만과는 다릅니다. 잘 독립해서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겸손’을 잃지 않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와 맺고 싶어 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독립적인 신앙인이 되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 길은 매우 더디고 불안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 용기 있게 한 발 내딛는 사람은 그 길을 함께 걷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결코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할 것이고 주님의 함께하심이 여러 가지 증거로 드러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독립의 신앙으로 안내하는 그 길에 놓아두시기 바랍니다. 그 여정 위에 사랑의 주님께서 함께하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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