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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기다리는 자의 몫

20181216 쓰임교회 주일설교

 

기다리는 자의 몫

 

<스바냐 3장 14-20절>

 

14. 도성 시온아, 노래하여라. 이스라엘아, 즐거이 외쳐라. 도성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15. 주님께서 징벌을 그치셨다. 너의 원수를 쫓아내셨다. 이스라엘의 왕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16.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할 것이다. "시온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지 말아라. 

17.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 

18. 축제 때에 즐거워하듯 하실 것이다." "내가 너에게서 두려움과 슬픔을 없애고, 네가 다시는 모욕을 받지 않게 하겠다. 

19. 때가 되면, 너를 억누르는 자들을 내가 모두 벌하겠다. 없어진 이들을 찾아오고, 흩어진 이들을 불러 모으겠다. 흩어져서 사는 그 모든 땅에서, 부끄러움을 겪던 나의 백성이 칭송과 영예를 받게 하겠다. 

20. 그 때가 되면, 내가 너희를 모으겠다. 그 때에 내가 너희를 고향으로 인도하겠다. 사로잡혀 갔던 이들을 너희가 보는 앞에서 데려오고, 이 땅의 모든 민족 가운데서, 너희가 영예와 칭송을 받게 하겠다. 나 주가 말한다."

 

 

 

 

잘 기다린다는 건

 

주님의 평화가 대림의 절기를 보내는 여러분과 함께 하길 빕니다. 

 

여러분께서는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려본 적 있으십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릴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마음은 태도로 드러나기 마련이고 그래서 우리는 딴청 피우듯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저 멍하니 그 사람이 오겠거니 하며 기다리지 않습니다. 만날 그 사람을 위해 무언가 준비하게 됩니다. 그것은 선물일 수도 있고 특별한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외모를 꾸미기도 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면 그 사람과의 만남을 위해 무언가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오늘은 대림절 세 번째 주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오고 계신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곧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리는 마음과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심정과 비교해본다면, 현재 우리가 어떻게 대림의 절기를 보내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을 듯합니다. 

 

축제의 예루살렘

 

오늘은 ‘스바냐’의 말씀을 나눠볼까 합니다. 

 

선지자 스바냐가 활동하던 시기에 이스라엘은 요시야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요시야가 통치하던 시기는 이전부터 내려온 우상 숭배, 사회적 타락과 부패가 끊이지 않는 매우 혼란스런 시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시야의 개혁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상황 속에 스바냐를 선지자로 세웠고 그를 보내어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받게 될 심판을 선포했습니다(1:14-18).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로 다시 고개를 돌리는 자들은 구원을 받게 될 거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3:9-20). 

 

오늘 본문은 이러한 맥락 중 가장 마지막에 해당됩니다. 스바냐는 구원과 기쁨의 날이 곧 올 텐데, 그 날은 어떠할 것인지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시온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지 말아라.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 축제 때에 즐거워하듯 하실 것이다.” (16-18) 

 

사람들은 주님이 오시면 예루살렘에는 축제가 펼쳐질 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스바냐는 주님의 음성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너에게서 두려움과 슬픔을 없애고, 네가 다시는 모욕을 받지 않게 하겠다. 때가 되면, 너를 억누르는 자들을 내가 모두 벌하겠다. 없어진 이들을 찾아오고, 흩어진 이들을 불러 모으겠다. 흩어져서 사는 그 모든 땅에서, 부끄러움을 겪던 나의 백성이 칭송과 영예를 받게 하겠다. 그 때가 되면, 내가 너희를 모으겠다. 그 때에 내가 너희를 고향으로 인도하겠다. 사로잡혀 갔던 이들을 너희가 보는 앞에서 데려오고, 이 땅의 모든 민족 가운데서, 너희가 영예와 칭송을 받게 하겠다. 나 주가 말한다.” (18-20) 

 

주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역사를 반영합니다. 분열과 전쟁, 유목의 역사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날이 오면 흩어진 이들을 불러 모아 고향으로 인도하겠다고 하십니다. 영예를 회복하고 모든 민족으로부터 칭송을 받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잃은 것의 회복입니다. 

 

그날이 오면

 

여러분, 스바냐는 오늘 본문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미래 혹은 꿈은 무엇이었나요? 이런 것 아닌가요? 나뉘고 갈라진 것들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곧 사라지게 된다는 것 아닐까요? 스바냐는 그날이 오면, 우리가 잃었던 것들을 찾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였던 마음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서로가 서로의 가치를 알아보게 되는 것, 이것이 그날이 올 때 우리가 보게 되는 모습인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럼 이미 여러분은 하나님의 도구이자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는 ‘믿음의 진보’란 이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속에서 그런 경계선을 점차 지워나가는 과정입니다. 나를 넘어 너의 세계로 나아가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하는 것이 믿음의 진보입니다.” (청파교회 주일설교, <외인은 없다> 中) 

 

이미 나를 통해 내 주변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면 우리는 주님의 길 위에 있는 것입니다. 

 

고요히 기다릴 수 있다면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잘 기다리는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는 기다림의 대상을 위해 어떠한 준비를 합니다. 자세를 고쳐 앉습니다. 평소처럼 안일하게 시간을 보내지 않습니다. 자신을 돌아봅니다. 

 

혹시 반대로 여러분 주위에서 경계가 허물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장벽들이 더욱 견고히 세워지는 소리가 들리는 건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기다리는 마음은 준비하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지금이 이렇다면 무엇부터 돌아봐야 할까요? 

 

여러분, 잘 맞이하기 위해서는 분주하고 들뜬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만나려고 한다면 당연히 들뜨는 것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저는 그 기쁨의 설렘과 들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바로 보기 위한 작업으로, 쓸데없는 것들로 향한 분주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덮인 어떤 불필요한 비닐 같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마음의 분주함을 가라앉히고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요? Facebook에 올라 온 <한국샬렘영성훈련원>의 한 인용 글귀에서 힌트 하나를 보았습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사막에서 가장 긴급한 것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막은 계획을 세우고 마감 시간을 지키며 긴급한 속도로 무언가를 착수하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반기지 않습니다. 대신에, 사막은 샌들을 벗고서, 천천히 맨발로 걸으며, 모래의 타는듯함과 모래가 발바닥을 어루만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환영합니다. 

 

당신이 사막을 정복하려는 야망이 없다면, 당신이 책임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일어나는 일들을 고요히 기다릴 수 있다면, 사막은 당신을 침입자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당신에게 그 비밀을 보여줄 것입니다.” (알렉산드로 프론자토, <모래위에서 묵상> 中) 

 

무슨 말입니까? ‘삶’을 ‘사막’에 비유한다면, 사막으로부터 환영받기 위해서는 먼저 가만히 기다려야 합니다. 분주함과 들뜸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고요히 귀 기울이며 때론 사람도 만나지 않고 홀로 머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의 마음을 느낄 어떤 ‘단초’ 하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잘 될 수 없습니다. 그건 욕심입니다. 이미 우리 몸에 벤 습관과 낯선 시도 때문에 우리는 더 불안하고 불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 가운데 주님의 도움을 요청하여 잘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한 시간의 축적을 통해 주님의 진짜 마음, 사막의 비밀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경계를 허무는 기다림

 

우리는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의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한 번의 주일만 더 보내면 성탄을 맞이합니다. 성탄은 새로운 시작의 알림이자 삶의 중심을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잘 기다리는 자는 잘 맞이하기 위해 마음의 분주함을 내려놓습니다. 설렘으로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찾습니다. 그것이 바로 대림이 갖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 소중한 절기를 통해 주님과 나 사이에 있는 경계와 나와 내 이웃 사이에 놓여있는 경계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사랑으로 허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함을 신뢰한다면 분명 주님의 마음을 알아챌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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