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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좋은 것을 준다는 건

20181223 쓰임교회 주일설교

 

좋은 것을 준다는 건

 

<히브리서 10장 5-10절>

 

5.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입히실 몸을 마련하셨습니다. 

6. 주님은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래서 내가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나를 두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8.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주님은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들입니다. 

9. 그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첫 번째 것을 폐하셨습니다.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가까이 머무는 광신주의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이곳에 가득 하길 빕니다. 오늘은 대림절 네 번째 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틀 뒤 성탄절을 맞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이 대림의 절기를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질문 한 가지를 더 드려볼까 합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얼마 전 읽었던 책인데, 읽다가 아주 흥미로운 대목과 만났습니다. 물론 흥미로운 것이 유쾌한 것만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가 쓴 <광신자 치유>라는 책의 한 대목입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광신주의는 집에서 싹틉니다. 바로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좋은 마음으로 그들을 변화시키겠다는 매우 보편적인 충동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끔찍이 아끼는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마음가짐, 자식에게 "넌 엄마처럼 되지 말고 나처럼 되어야만 해" 혹은 "아빠처럼 되면 안 돼. 나처럼 되어야만 해"라고, 혹은 "좋아, 제발 네 부모처럼만은 되지 말거라." 따위를 요구하는 말, 이것이 광신주의의 시작입니다. ​ 

 

또는 결혼한 커플의 경우 "당신이 바뀌어야만해. 나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이 결혼생활은 파탄이야"라고 소리칩니다.”

 

아모스 오즈, <광신자 치유>, 세종서적, p.71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느낌이 오시지요? ‘선물’을 주는 건 내가 좋다고 여기는 것을 상대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받는 사람이 받길 원하고 또 만족해 할 만 한 것을 주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랑’이라는 명목 하에 즉, 보편적인 충동에서 내가 좋게 여기는 것을 상대방에게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랬기에 그 방식은 주로 강압적이었고 주고 난 뒤에도 자신이 원하는 반응이 상대로부터 오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광신주의는 특별한 사람만 빠지게 되는 그런 부류의 것이 아닙니다. 의식하지 않으면 누구나 빠질 수 있습니다. 좋은 의도로 상대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 일상과 아주 밀접한 곳들에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부부 간에, 부모와 자녀 간에, 연인 간에, 교사와 학생 간에,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그 가능성들을 엿볼 수 있습니다. 누구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광신자 치유>에는 짧은 시 하나가 소개되는데, 그 시는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우리가 옳다고만 여기는 곳에서는 꽃들이 피지 않아요.”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관심이라는 명목 하에 좋은 것을 준다고 하지만, 그것은 상대에 대한 이해가 배제된 폭력인 경우가 많습니다. 

 

새로운 것을 세우러 왔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소중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그럼 우리는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이며 또 그것을 어떻게 잘 줄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히브리서’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깔끔하게 정리해서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예수의 행적을 통해 하나님의 진짜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는 하나님께 받은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사람들과 나눴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 땅에서 아낌없이 사용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본문은 예수의 음성을 이렇게 전합니다. 

 

“주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입히실 몸을 마련하셨습니다. 주님은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나를 두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5-7) 

 

 

예수는 하나님께서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구약 전통인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는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말하는데, 그럼 예수가 말한 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8절 이후에서 그 힌트를 엿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께서는 율법에 따라 드리는 첫 번째 것들 즉, 제사와 예물을 폐하고 두 번째 것인 바로 이것, 우리가 함께 이야기해봐야 할 이 ‘새로운 것’을 세우러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10절 말미에 또 이런 말을 하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결국 이 말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요?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당신의 진짜 마음인 이 ‘새로운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여 있던 구약의 제사 같은 것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누는 행위입니다. 그럼 ‘가장 소중한 것’,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생명’입니다. 

 

 

‘생명’을 준다는 건

 

‘생명’하니까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로 들리시나요? 아니면 겁부터 나십니까? 서두에도 말씀 드렸듯이, 우리가 사랑을 하면 상대방에게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합니다. 물론 각자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그 중에 정말 소중한 것은 내가 가진 ‘생명’인 것이지요. 

 

생명! ‘생명’을 준다고 하면 흔히 상대에게 목숨 자체를 내놓는 행위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물론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 ‘생명’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먼저 ‘생명(生命)’이라는 말의 뜻은 ‘살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을 주고 나눈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것, 내 안에 ‘살아 있는 무엇’을 주고 나누는 행위입니다. 그럼 우리는 다시 묻게 됩니다. 내 안에 살아 있는 것, 그것은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무엇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너무 난해한 이야기인가요?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보면 ‘사랑’은 주는 행위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기 자신,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하면 생명을 준다. 이 말은 반드시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 -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를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타인을 풍요롭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킨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p.42

 

‘사랑’은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주고자 하는 마음인데,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내 ‘생명’입니다. 그런데 책에서는 ‘생명’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뜻하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렸듯이, ‘생명’을 준다는 건 내 안에 살아 있는 무엇을 주는 행위인데, 에리히 프롬은 그것을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 –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를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기에 제대로 준 ‘생명’은 나도 살고 타인도 살리게 됩니다. 나의 풍요가 곧 상대의 풍요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쌓는 ‘생명’

 

쓰임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대림절 마지막 주를 맞아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참 마음에 관해 살펴봤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않으심을 아시고 이 땅위에 ‘새로운 것’을 놓으려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새로운 것’이 내게 가장 좋고 소중한 것인 ‘생명’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내 안에 살아 있는 무엇인데, 그것은 내가 경험한 기쁨, 내가 지금 집중하고 있는 것에 관한 표현, 내가 가지고 있는 앎 혹은 지혜, 내가 가진 유머와 슬픔의 경험 등의 총합입니다. 

 

예수께서는 많은 기도와 성찰, 시도들을 통해 남들보다 많은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 풍성한 경험을 토대로 생명이 넘쳐흘렀고 그 생명이 그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와 만난 사람들 즉, 예수가 가진 ‘생명’과 만난 사람들은 어떤 풍성함으로 생동감 있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성탄’을 앞둔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예수를 잘 기다리기 위해서는 수동적인 태도로 가만히 머무는 게 아니라, 나를 풍성케 하신 예수를 믿고 내 안에 새로운 ‘생명’들을 쌓아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많은 도전과 모험을 통해서 가능할 수도 있고 때로는 고요한 침묵과 고독의 시간을 통해서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만난 하나님은 하나의 방식을 고수하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여러분만의 방식으로 ‘생명’을 쌓아가되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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