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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

20181225 쓰임교회 & 하늘소망교회 성탄절 설교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

 

<이사야 52장 7-10절>

 

7. 놀랍고도 반가워라!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면서, 시온을 보고 이르기를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하는구나. 

8. 성을 지키는 파수꾼들의 소리를 들어 보아라. 그들이 소리를 높여서, 기뻐하며 외친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오시는 그 모습을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9. 너희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함성을 터뜨려라. 함께 기뻐 외쳐라.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속량하셨다. 

10. 주님께서 모든 이방 나라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하신 능력을 드러내시니, 땅 끝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기쁘다 구주 오시네(The Lord is come)

 

성탄의 기쁨이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과 함께 하길 빕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그래서 오늘 모든 교회는 이 땅에 복된 소식을 전해주고자 오셨던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성탄절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얘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어떤 교수님 한 분이 예닐곱 살 때, 성탄절이 되어 집에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지금 우리도 많이 부르고 있는 성탄 찬송인 “기쁘다 구주 오셨네”(The Lord has come.)를 가사 그대로 부르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아들에게 가사가 틀렸다며 “기쁘다 구주 오시네”(The Lord is come.)로 고쳐 부르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참조: 마커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첫 번째 크리스마스>, 한국기독교연구소, p.299) 

 

“기쁘다 구주 오셨네”“기쁘다 구주 오시네.”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느낌이 오시나요? 당시 어렸던 교수님는 그 영문을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는 분명히 성탄절은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이기에 “기쁘다 구주 오셨네”로 부르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몇 년이 흐르고 나서, 그는 어머니의 말씀이 옳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성탄절'은 오래 전에 오신 주님이 현재에도 오심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오신 예수는 매년 성탄절마다 지금 여기에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성탄을 기념하는 목적은 과거를 현재로 가져오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랬기에 교수님의 어머니는 이미 과거에 끝나버린 듯한 “구주 오셨네”보다는 앞으로 맞이하게 될 “구주 오시네”로 부르며 아들에게 희망을 갖게끔 한 것입니다. 

 

사랑받는 것과 사랑하는 것 사이

 

기쁜 날인데, 처음부터 너무 무겁고 난해한 말씀을 드린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분위기 전환 차원에서 잠시 추억을 회상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지난 시절을 잠시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께서는 연애를 하실 때, 먼저 용기 내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사람이셨습니까? 아니면 상대방이 먼저 다가와주기를 바라는 사람이셨습니까? 물론 시대의 분위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제한되어 있을 수 있었겠습니다만, 여러분의 과거는 어떠하셨습니까? 

 

엊그제 친한 동생들과 연말 모임을 가졌었습니다. 그곳엔 연애는 원하지만 아직 시작은 하지 못하는 동생들도 몇 있었습니다. 그 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그들은 조심성이 많거나 거절이 두려워 망설이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누군가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상대방이 나를 좋아해주기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먼저 좋아해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동생들은 확실하게 기다리는 것도 아니면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모르는 상황들이 더 있을 수 있겠지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입니다. 언제 주어질지 모르는 상대의 관심과 사랑을 마냥 기다리기보단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로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단 훨씬 나은 선택일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에서의 ‘해방의 날’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2천 년 전 예수께서 이 땅에 보여준 그 '사랑'을 이제 우리도 살아내야 함을 말씀드리고자 함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사야서 52장을 보면,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기쁨의 날, 구원의 날에 관해 선포합니다. 본문을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7. 놀랍고도 반가워라!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면서, 시온을 보고 이르기를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하는구나. 

 

8. 성을 지키는 파수꾼들의 소리를 들어 보아라. 그들이 소리를 높여서, 기뻐하며 외친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오시는 그 모습을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9. 너희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함성을 터뜨려라. 함께 기뻐 외쳐라.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속량하셨다. 

 

10. 주님께서 모든 이방 나라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하신 능력을 드러내시니, 땅 끝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이사야’는 이사야서 초반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후반에는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오늘 본문은 후반부인 ‘구원의 메시지’에 해당되는데, 이사야는 곧 ‘하나님의 날’이 오는데, 그날이 오면 성을 지키는 파수꾼들이 기뻐하며 환호성을 지르고 황폐해진 모든 것들이 기쁨의 함성을 지를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주님께서는 백성의 고통을 위로하시고 또 이방 나라들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주실 거라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날’은 ‘해방의 날’인 것입니다. 

 

예수의 탄생과 ‘종말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은 곧 이와 같은 일들의 일어남과 관련이 있습니다. 좀 어려운 말로 이것을 ‘종말론’이라고 부릅니다. 

 

성탄은 이 ‘종말론’과 연관이 있습니다. ‘종말론’은 곧 하나님께서 이 땅을 변화시키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이 ‘종말론’은 이 땅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지 세상이 뭔가 황폐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종말론’은 한 마디로 정의와 평화로 세상이 새로워지는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관심은 이런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 지에 맞춰져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불편한 진실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의 탄생 이후 2천 년이 흘렀음에도 아직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세상이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직 구약의 말씀은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성탄 이야기’, ‘하나님의 날’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뜬구름 같은 허무한 공상 같은 이야기일까요? 불편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고민해봐야 합니다. 

 

사실 이에 관한 해답은 ‘하나님의 날’이 어떻게 오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종말론’에 관한 세 가지의 이해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교회에는 매우 다른 두 가지의 ‘종말론’에 관한 이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해당되는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는 “초자연적 종말론” 혹은 “개입적 종말론”입니다. 무슨 말인가 싶으시죠? 이 말은 쉽게 말해 이런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새로운 세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떤 극적인 개입을 통해서만 이 땅에 ‘하나님의 날’이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엔 이상하게 여겨질 만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하나님 한 분만의 노력으로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세상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두 번째는 “참여적 종말론” 혹은 “협력적 종말론”입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으시죠? 간단히 말해, 이것은 약속된 세상을 이루는데 있어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 혹은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새롭게 하시기를 기다리기보다 우리의 의지로 하나님의 일에 협력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입니다. 아주 의미 있는 견해입니다. 

 

물론 ‘종말론’에 관한 세 번째 입장도 있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종말론’을 내팽개쳐 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는 기독교가 단지 개인적인 구원에만 관련이 있다고 여깁니다. 이 세상이 즐거운 곳이거나 끔찍한 곳일 수도 있지만, 이들의 희망은 세상의 변화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참여적, 협력적 종말론

 

여러분, 저는 바로 두 번째 입장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여적 또는 협력적 종말론”말입니다. 저는 이사야가 선포하고, 예수의 탄생이 보여준 ‘하나님의 날’은 그저 기다리며 기도만 한다고 해서 올 수 있는 날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없이 홀로 ‘그 날’의 도래를 앞당길 수 없습니다. 더불어 우리도 하나님 없이 이 일을 시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서로 간의 협력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한 현대 기독교의 핵심 신학인 것입니다. 

 

지금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라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탄절’을 기념하는 목적은 과거를 현재로 가져오기 위함입니다. 과거에만 머무는 과거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전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 그 사랑의 시도를 이제 우리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날’인 ‘새 날’이 조금이라도 빨리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사람 혹은 소중하여 여기는 사람이 줄 사랑과 관심을 그저 멍하니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사랑을 보인다면 나중에 후회는 훨씬 덜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슬픔과 고통에서의 벗어날 그 ‘하나님의 날’은 가만히 기다린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날의 도래를 위해 지금 사랑해야 할 것들을 마땅히 사랑할 때, 그날을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사랑의 시도들’이 당신의 일이라고 여기시면 반드시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더불어 함께 공감하고 이해하고 그 일을 시도하는 사람들 또한 보내주실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가 기억해야하고 또 살아내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무슨 일에서든 용기를 내십시오.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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