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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일상에 귀 기울이십시오

20181230 쓰임교회 송구영신예배 설교

 

일상에 귀 기울이십시오

 

<전도서 3장 1-13절>

 

1.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2.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3.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통곡할 때가 있고, 기뻐 춤출 때가 있다. 

5. 돌을 흩어버릴 때가 있고, 모아들일 때가 있다. 껴안을 때가 있고, 껴안는 것을 삼갈 때가 있다. 

6. 찾아나 설 때가 있고, 포기할 때가 있다. 간직할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다. 말하지 않을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 전쟁을 치를 때가 있고,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 

9. 사람이 애쓴다고 해서, 이런 일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10. 이제 보니,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수고하라고 지우신 짐이다. 

11.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닫지는 못하게 하셨다. 

12.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13.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

 

 

지혜자의 이야기 <전도서>

 

좋으신 주님의 평화가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한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길 빕니다. 쓰임교회는 송구영신예배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송구영신예배와 함께 드립니다. 한 해를 마무리 하고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오늘, 어떤 말씀을 나누면 좋을지 고민하던 가운데 <전도서>의 말씀을 보게 됐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가끔 이 <전도서>를 읽어보셨을 겁니다. ‘지혜자의 이야기 묶음’으로 알려진 이 <전도서>는 당연히 저자가 ‘솔로몬’일 거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라이프 성경사전>을 보면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본서에는 저자를 짐작할 만한 많은 구절들이 언급되고 있다. 1:1에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는 표현이 있다. 또 1:16에는 저자가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다’는 표현이 있고, 2:4-9에는 저자가 세상 사람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그래서 유대인들이나 초대교회 당시 대다수의 교부들(Hieronymus)은 전통적으로 솔로몬이 본서 저자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루터 이후 학자들 가운데는 본서 저자를 솔로몬으로 보지 않는 경향도 있다(Young, Wright, Delitzsch, Hengstenburg). 루터는 B.C. 2세기경 마카비 당시 지혜서를 쓴 ‘벤 시락’(Ben Sirach)을 본서 저자로 본다. 또 혹자는 포로 귀환 이후 익명의 저자가 솔로몬을 주인공으로 하여 본서를 기록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참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396073&cid=50762&categoryId=51387) 

 

전통에서 보면 <전도서>는 ‘솔로몬’이 썼다고 여겨지지만 루터를 포함한 몇몇의 학자들은 다른 누군가가 썼거나 또는 누가 솔로몬의 이름을 빌려서 썼을 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저자가 누가 되었건 간에 <전도서>가 ‘지혜서’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전도서>에는 하나님의 마음 혹은 하늘의 마음에 접속된 이의 진실한 고백이 드러납니다. 

 

무상함을 느낀 다음에

 

여러분께서는 <전도서>하면 가장 먼저 뭐가 떠오르십니까? ‘인생의 무상함’ 아닌가요?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전도서> 3장도 삶의 무상함에 관해 이야기하는 듯 보입니다. 사실 ‘인생의 무상함’하면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부터 드는 것이 솔직한 마음입니다. 삶이라는 게 살만한 이유나 의미가 없다고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무상함’에 그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전도서>가 ‘인생의 무상함’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는 건지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물론 ‘헛되다’는 말이 1장부터 반복되어 나타나기에 우리는 자연스레 ‘생의 무상함’에 관해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 ‘헛되다’는 말 다음에 어떤 이야기가 나오는지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단번에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인간은 기본적으로 고집이 있기 때문에 내가 붙잡고 있던 어떤 생의 가치들이 무너지거나 또 그것들을 내려놓게 됐을 때라야 진리 근처에 가닿을 수 있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전도서>는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전도서> 저자는 ‘때’에 관해 반복해서 말합니다. 사실 3장 1-8절까지의 말씀을 읽으면 우리는 그 이야기에 계속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많은 부분이 공감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통곡할 때가 있고, 기뻐 춤출 때가 있다.  돌을 흩어버릴 때가 있고, 모아들일 때가 있다. 껴안을 때가 있고, 껴안는 것을 삼갈 때가 있다. 찾아나 설 때가 있고, 포기할 때가 있다. 간직할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다. 말하지 않을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 전쟁을 치를 때가 있고,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 (1-8) 

 

여러분께서 느끼신 대로 <전도서> 저자는 삶에는 모두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인생을 ‘제대로’ 살아봄직한 사람에게서 나올 법한 이야기입니다. 정말 우리의 지난 삶도 그렇지 않던가요?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는 말말입니다. 

 

일상에서 가르침은 온다

 

그런데 이 말이 가질 부정적인 반응도 무시할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엔 ‘때’가 있다는 이 말이 인생을 수동적으로 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삶이 그저 우연처럼 ‘때’에 따라 정해지는 거라면 우리는 어디에 의미를 두고 살아야 할까요?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오고 나서 작가로의 새 인생을 살게 된 파울로 코엘료는 그의 책 <오자히르>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코엘료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신비주의’라는 것이, <전도서>의 나온 표현으로는 ‘삶의 지혜’를 깨닫는 것이 반드시 특정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산티아고의 길을 순례하면서 평범한 사람들과 만나 시간을 보내고, 우주가 자신만의 언어인 '표지'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선,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향해 눈과 정신을 활짝 열어 놓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는 신비주의가 과연 이 신비로운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유일한 문인지를 의심하게 되었다. 산티아고의 길에 관한 내 책을 통해서 나는 발전의 다른 가능성들을 숙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 

 

"깨어서 준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준비가 되어 있기만 하면 가르침은 언제든 온다. 만일 내가 그 표지들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가르침은 언제든 온다. 만일 내가 그 표지들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다음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무엇보다 인간은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하나는 언제 시작할지를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제 멈출지를 아는 것이다.”

 

_ 파울로 코엘료, <오자히르>, 문학동네, p.49-50

 

무슨 이야긴지 바로 와 닿지 않습니까?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아, ‘하나님의 마음’이란,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의 진리’란 것이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있구나,를 깨달았습니다. 물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코엘료의 말처럼 하나님의 마음이나 예수가 전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평범한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주의만 기울이면 언제든 그 가르침은 온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늘의 진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문인 것입니다. 특정한 소수만을 위한 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

 

그렇기에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해야 합니다.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11-13절이 우리가 앞으로 살아야 할 삶의 태도를 잘 이야기해 놓았습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닫지는 못하게 하셨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 (11-13) 

 

여러분,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을 일을 하는 것 그리고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만 있다면 이보다 좋은 일엔 무엇이 있겠습니까? 물론 이 말은 그저 삶에 ‘순응’하며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집중하는 것의 중요성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느끼며 또 가질 것보다 가진 것을 생각하며 그것을 적극 활용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지름길이자 유일한 통로인 것입니다. 

 

 

일상과 존재의 심연에 있다

 

쓰임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은 2018년도의 마지막 주일이자 한 해의 마지막 말씀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여러분의 한 해는 어떠하셨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런 한 해가 되셨습니까? 지금 우리는 누구도 밟지 않은, 막 내린 눈 위에 첫발을 내딛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니, 삶에는 모두 ‘때’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때’에는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우리에겐 새로운 한 해가 주어졌습니다. 새로운 한 해는 아직 하늘의 뜻이 펼쳐지기 전인 미래의 ‘시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도래할 그 새로운 시간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간을 어떻게 준비를 하면 되는지를 <전도서>의 말씀 속에서 엿봤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삶이란 ‘때’에 따라 일어나는 일의 축적입니다. 그리고 그 ‘때’는 오직 하나님만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손 놓고 마음대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나’를 중심으로 우리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들에 귀를 기울인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마음, 예수의 진리를 엿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진리는 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이,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상과 그리고 자신의 존재 심연에 있습니다. 이 사실 잊지 않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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