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 Note] 예수를 믿는다는 건

2015. 9. 20. 21:27Note

20150920 쓰임교회 주일 및 속회설교

 

예수를 믿는다는 건

 

<마가복음 9장 33-37절>

 

33.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다. 예수께서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34. 제자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35. 예수께서 앉으신 다음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36.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에, 그를 껴안아 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

 

오늘 이렇게 쓰임교회 오신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오늘 말씀을 나누기 전에 여쭈어볼게 있는데, 혹시 기억하시는 분 계신가요? 지난 달 속회 때 드린 하나의 미션이었는데요.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나 시간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지요. 어떠셨습니까? 그런 공간과 시간을 잘 마련하셨는지요? 저도 실패와 성공을 반복했는데요, 중요한 건 시도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가정이나 직장에 그런 공간과 시간을 마련할 수 있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 질 것입니다. 사실 이런 시도는 시간의 흐름과 일상이 하나님의 품 안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한 노력인 것입니다. 마음대로 잘 안되더라도 생각날 때마다 시도해보면 참 좋겠습니다.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가복음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버나움으로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가버나움으로 가던 중 제자들끼리 다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제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제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 알고 계셨던지 예수께서는 이야기를 이어가십니다.

 

누가 더 큰 사람이냐

 

우리도 본문을 읽어 이미 알고 있듯이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다투었습니다. ‘크다’라는 것! ‘큰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생존하고 번식하기 위해 자신의 몸집을 키웁니다.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인간의 성질’입니다.

 

하지만 뭐든지 지나침과 과함이 문제입니다. 특히 요즘은 큰 것과 강한 것, 힘 있는 것이 인정받고 존경받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시대 속에 작고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 혹은 그런 사람들은 속절없이 사라지고 잊혀져갑니다. 저는 기독교의 존재목적이 있다면 이런 이들을 위한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것, 그들을 위해 준비된 시간과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전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기독교라는 종교의 중심에 계신 예수께서는 역시 제자들의 생각을 뒤엎으셨습니다. 이는 곧, 로마시대의 가치를 전복하는 발언이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35)." 사실 이 말씀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왜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어야 하는지, 왜 큰 사람이 되려면 가장 작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의 언어는 ‘가슴의 언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말씀은 마음으로, 그분 존재자체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가 꿈꾸는 세상은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었습니다. 높고 낮음이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마땅히 꼴찌가 되어야 했고, 꼴찌의 자리에서 섬기고 있던 사람은 이미 첫째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이지요. 혹시 지금 우리의 마음이 집이나 일터에서, 크고 작은 모임에서 첫째가 되고 싶어 하진 않는지 돌아봐야하겠습니다.

 

아이를 안아주는 건 아이의 모든 걸 안아주는 것

 

이어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 앞에 세우시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37)."

 

교회를 좀 다니셨다고 하시는 분들은 이 말씀이 아주 익숙하실 겁니다. 그런데 이번 메시지를 준비하며 이 부분을 읽는데 평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주로 ‘어린이, 어린아이’는 순수하고 연약하며 보호가 필요한 그런 존재로 여겨졌었습니다. 물론 실제로 어린아이는 그러합니다.

 

제 이야기를 잠깐 드릴까 하는데요. 저에게는 두 살 터울의 누나가 있습니다. 누님은 2-3년 전쯤 결혼을 했고 지금으로부터 세 달 전쯤인가, 아기를 낳아서 저는 어떨 결에 삼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씩씩했던 누나가 아기를 키우며 많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매일 카톡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어보자니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아이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밤낮없이 1시간 반, 두 시간마다 깨서 울고 얘가 제대로 자라고 있는 건지, 또 자신은 잘하고 있는 건지 모든 게 불안해 보였습니다. 처음 겪는 일이라 더 그랬던 모양입니다.

 

최근의 이런 일과 더불어 유초등부와 중고등부를 가르쳤던 경험이 떠오르더니, 예수님이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던 말씀이 그렇게 기쁨으로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어린아이처럼 작고 연약한 존재를 품어주고 돌보는 것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데 그렇게 쉬운 것 하나 못할까라고 생각했지만, 이 ‘어린아이’의 존재에 대해 알아 가면 알수록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아직 미혼이라 잘 모르지만 자녀를 둔 부모님들은 지극히 청개구리였던 자녀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으실 겁니다.

 

이런 생각 중에 문득, 어린아이를 맞아들인다는 건 그 아이의 좋은 모습뿐만 아니라 못난 행동까지도 품어주는 것일 텐데 예수님을 맞아들인다는 것도 이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를 믿는다는 건 그가 걸어간 길 중, 평탄한 길로만 걷는 게 아니라, 그의 굴곡 있고 거친 길로도 걸어가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위에 힘들어하고 삶의 의미를 잃은 이들의 설자리가 되어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원치 않았음에도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 또한 기꺼이 맞아들이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근데 그게 말은 참 쉽지만 실제로 겪어 내는 게 너무나 힘듭니다. 저도 최근에 큰 어려움 하나를 맞이했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습니다. 그냥 말도 잃어서 하나님 앞에 묵묵히 서 있습니다.

 

가버나움 속회원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건 나 좋을 대로 사는 게 아닌가 봅니다. 제가 방금 드린 이 말씀을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건 나 좋을 대로 사는 게 아닙니다!”라고 강하게 말씀 드리지 못했던 이유는 사실 저 스스로도 피하고 싶은 말씀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게 하나님 말씀이면 잠잠히 머물러 보는 수밖에요. 그렇다고 굳이 피하고 싶은 일을 일부러 대면하진 마십시오. 때에 따라 주시는 주님의 힘과 용기와 위로가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살다보면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들을 자꾸 맞이하게 됩니다. 자기 속에 매몰된 사람들은 ‘당신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내 의지와 노력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피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을 때에는 조급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그 시간들을 견뎌낼 수 있는 힘 또한 주옵소서.

 

주님, 당신을 믿는다는 건 첫째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꼴찌가 되어 섬기는 것임을, 또 뜻대로 되지 않는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일상에서 일어나는 외면하고 싶었던 일들마저 품어 안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주님, 우리와 함께 이 일을 겪고 계신 당신과 또 이 일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있어 우리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빛과 호흡 속에 늘 머물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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