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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안산나눔 Note] 하늘빛에 비끄러매다

20150913 안산나눔교회 주일 저녁설교

 

하늘빛에 비끄러매다

 

<야고보서 3장 1-12절>

 

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 우리는 다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3. 말을 부리려면, 그 입에 재갈을 물립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말의 온 몸을 끌고 다닙니다.
4. 보십시오. 배도 그렇습니다. 배가 아무리 커도, 또 거센 바람에 밀려도, 매우 작은 키로 조종하여, 사공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끌고 갑니다.

5. 이와 같이, 혀도 몸의 작은 지체이지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고 자랑을 합니다. 보십시오, 아주 작은 불이 굉장히 큰 숲을 태웁니다.

6. 그런데 혀는 불이요, 혀는 불의의 세계입니다. 혀는 우리 몸의 한 지체이지만, 온 몸을 더럽히며, 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고, 결국에는 혀도 게헨나의 불에 타버립니다.

7. 들짐승과 새와 기는 짐승과 바다의 생물들은 어떤 종류든지 모두 사람이 길들이고 있으며 길들여 놓았습니다.
8. 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걷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9.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10. 또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11. 샘이 한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낼 수 있겠습니까?
12.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거나,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짠 샘은 단 물을 낼 수 없습니다. 

 

 

기회를 주심에 감사

 

저는 현재 중앙연회 성남동지방에 소속되어 있는 쓰임교회를 담임하고 있습니다. 올해 4월 안수를 받음과 동시에 단독목회를 시작했습니다. 단독목회를 시작한 지 6개월 정도 지난 것 같습니다. 개척교회 시작이 대부분 그러하겠지만 현재 저희 교회에는 성도가 없습니다. 홀로 교회를 지키고 예배를 드린다는 건 참 외로운 일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만큼 의미도 있는 것 같습니다. 삶과 자신과 교회를 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오늘과 같은 자리와 시간은 굉장히 설레면서 떨리는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기회를 만들어주신 신현희 목사님과 나눔교회 성도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안산나눔교회 담임 목사님의 행적

 

설교의 운을 어떻게 띄우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신현희 목사님과 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목사님과의 만남을 기억하자니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됐습니다. 서울남연회 서초지방에 있는 수표교교회라는 곳에서 목사님과의 첫 만남이 있었습니다. 군 제대를 하고 시작하는 첫 사역이었기에 모든 것이 낯설고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그랬기에 제 사역은 모든 것이 서툴고 모든 것이 어설펐습니다. 당시 그 교회에서 수련목회자 과정을 밟고 있던 (당시) 신현희 전도사님의 사역은 (조금 클래식한 비유를 들자면) 그야말로 ‘홍길동’ 같았습니다. 실제로 홍길동처럼 거의 날아다니다시피 부지런히 뛰어다니시며 여러 가지 일들을, 아주 훌륭히 감당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신목사님의 탁월함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화려하면서도 조리 있는 언변이었습니다. 말이 짧은 저에게 ‘세상에, 저렇게 말을 잘하는 양반이 다 있나’라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로 말솜씨가 좋은 분이었습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때는 물론이고 설교 강단에서든 어디서든지 떨거나 긴장함 없이 이야기를 잘하는 분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제가 아들을 낳으면 저렇게 키워보고 싶다고 생각해 신목사님 어머님을 만나 뵙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갈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 혹시 오해하실 분들이 계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는데, 제가 신목사님께 무슨 뇌물(?)을 받아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아니고 단지 이러한 경험이 오늘 설교전개에 꽤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좀 전의 이야기를 이어 나가 보자면 신목사님은 업무처리를 잘하고 말도 잘하셨지만 그보다 더 대단했던 부분은 말과 행동이 일치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본인이 한 말을 지키려고 무척이나 애썼고 후배들에게 궂은일을 시키지 않고 본인이 직접 몸을 움직여 일들을 처리했습니다. 몸과 생각이 일치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의 삶은 아름다웠습니다.

 

말보다 위대한 행동

 

사람을 구분 짓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두 가지 유형으로도 구분 지을 수 있습니다. ‘말이 몸보다 앞서는 사람’과 ‘말보다 몸이 앞서는 사람’이 그것입니다. 두 유형 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가장 되기 어려운 사람이자 가장 무서운 사람의 유형이 조금 전에 말씀드린 두 가지 유형을 혼합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힘이 세고 권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한 말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나 ‘예수’는 자신의 말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와 또 그렇게 말함으로 자신들의 생이 어떻게 될지 앎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말을 지켰다는 데에서 그 위대함이 드러난다 말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내뱉은 말을 끝까지 지키며 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단계 더 나아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말과 행위가 동일해야 한다는 ‘언행일치(言行一致)’와 더불어 ‘우리가 어떤 말을 해야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말을 하느냐가 곧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고 합니다. 그만큼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사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야고보가 보낸 서신

 

오늘 감리교 교회력에 따라 주어진 본문 야고보서는 ‘말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본문 1절에서 뜬금없이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며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멈칫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자리에 한 번씩은 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가르치는 부모라는 선생이고 직장이나 교회, 크고 작은 모임에서 누군가를 지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부분은 목회자들에게 있어서도 절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대체 왜 야고보는 이런 얘기를 한 것일까요? 다음 대목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다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2).’

 

결국 야고보는 가르치는 자들이 빼놓을 수 없는 그 ‘말’이라는 것을 경계하라고 이렇게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사실 ‘말’이라는 것은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몸의 일부인 것이지요. 하지만 이 ‘말’이라는 것은 놀랍게도 그 힘이 대단합니다. 3절과 4절을 보면 동물 ‘말(Horse)’을 길들이려면 입에 재갈을 물려 조련하면 되고, 커다란 배도 ‘작은 키’만 움직이면 사공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힘 있는 동물이나 커다란 배도 작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들로 인해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혀(말)를 다스리는 것의 중요성과 그 어려움

 

우리 몸에도 말의 재갈, 배의 키와 같은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5절에 나오는 ‘혀’가 바로 그것입니다. 5절을 보면 혀는 몸의 작은 지체이지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고 스스로 자랑합니다. 이 혀는 불과 같아서 큰 숲을 태울 수도 있고, 인생이라는 수레바퀴에 불을 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혀’도 ‘지옥’을 상징하는 ‘게헨나’의 불에 타버리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놈의 ‘혀’가 어찌 된 녀석인지 도저히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8). 들의 짐승과 새와 기는 짐승과 바다의 생물은 사람이 길들일 수 있으나 ‘혀’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야고보의 주장입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혀’에 대한 극단적인 표현도 서슴지 않습니다. ‘혀’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찼다고 말합니다(8).

 

이렇게 독선적이고 독단적인 ‘혀’, 혹은 ‘입’은 주님을 찬양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오는 것이지요(9). 하지만 우리는 이 부분의 강조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입이 행하는 ‘찬양’이 문제가 아니라 ‘저주’가 문제임을 말입니다.

 

11절에 야고보가 기록한 말을 그대로 옮겨 여러분과 제 자신에게 드려보겠습니다. “여러분, 샘이 한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동시에 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말이 지녀야 할 역할

 

신목사님과 제가 존경하는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해 보고자 합니다. 김목사님께서는 말이 지녀야 할 역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서로를 향해 내미는 화해의 몸짓이다. 말다운 말은 완전하게 동화될 수 없는 타자들을 서로 매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에 대한 상호 신뢰이다. 하지만 지금 공적 분야에서 우리의 말살이는 어떠한가? 누군가에게 타격을 가하거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발설된 독한 말들, 허위에 찬 말들이 조자룡의 칼처럼 난무하고 있다. 독한 말은 또 다른 독한 말을 부른다. 사람은 태어날 때에 그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온다지 않던가. 어리석은 자는 말을 함부로 함으로써 그 도끼로 자신을 찍고 만다.”

 

김기석 목사님 글, <말의 신뢰성이 회복 되어야> 인용

 

인간은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말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남게 되는데, 하늘빛에 잇대어진 우리는 과연 어떤 말들을 입에 담고 살아야 할까요? 언어는 나뉘었던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 즉, 매개체였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지금에 와서는 이 언어가 오히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향해 내미는 화해의 몸짓이어야 할 ‘말’이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로 인해 상처받고 분열을 일으키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빛에 비끄러매다

 

하지만 여러분, 사실 우리가 어떤 말을 하며 사느냐는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느냐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는 말은 우리의 중심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와 다름없습니다. 마음의 문제, 중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하는 말의 시작점, 다시 말해 말이 샘솟는 샘의 근원에 우리는 무엇을 담고 있습니까? 바로 이곳에 ‘하늘의 빛’을 담아야 합니다. ‘하늘의 빛’이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생명을 보고 감탄할 줄 아는 것, 예수께서 친구 삼으셨던 소외된 이들 곁에 다가가 그들의 설자리가 되어 주는 것, 연약한 것들을 짓누르는 힘을 향해 끊임없이 저항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높아지고 굳어져가려는 마음 밭을 자꾸만 예수의 마음에 비끄러매야 합니다. 결국 하늘의 빛, 예수의 마음에 접속된 사람의 마음에서 생명의 언어, 평화와 화해의 언어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더디게, 그러나 꾸준히, 함께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무뎌질 대로 무뎌져 버린 우리의 마음을 말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빛에 접속된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의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비워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잠잠히 하나님과 머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침묵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답답한 마음에 부르짖는 것도 좋지만 그런 외침의 끝이 고요함이면 더욱 좋습니다. 이야기를 했으면 들어야 할 시간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말을 하느냐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혀’를 다스릴 줄만 알아도 이 세상에서 큰 과업을 이루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말은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나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마음을 늘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늘 주님의 빛, 하늘의 빛에 비끄러매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조금 됐다 싶으면 다시 흐트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절대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성공과 실패를 삶의 기준으로 내세우지만 주님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실패도 성공입니다. 하늘빛에 비끄러매기 위해 더디더라도 꾸준히 걸어가십시오. 우리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이 이곳에 있습니다. 사랑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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