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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파 Note / 고난주간 기도회] 예수의 침묵

말씀살롱 2025. 4. 16.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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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5 청파교회 고난주간 설교 

 

예수의 침묵

 

<누가복음 23장 1-12절> 

 

1. 그들 온 무리가 일어나서, 예수를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갔다. 

2. 그들이 예수를 고발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우리 민족을 오도하고,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자칭 그리스도 곧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3.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대답하셨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소." 

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는 아무 죄도 없소." 

5.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그 사람은 갈릴리에서 시작해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온 유대를 누비면서 가르치며 백성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6.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서 물었다. "이 사람이 갈릴리 사람이오?" 

7. 그는 예수가 헤롯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서, 예수를 헤롯에게 보냈는데, 마침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었다.  

8. 헤롯은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예수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오래 전부터 예수를 보고자 하였고, 또 그는 예수가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싶어하였다. 

9. 그래서 그는 예수께 여러 말로 물어 보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곁에 서 있다가, 예수를 맹렬하게 고발하였다. 

11. 헤롯은 자기 호위병들과 함께 예수를 모욕하고 조롱하였다. 그런 다음에, 예수에게 화려한 옷을 입혀서 빌라도에게 도로 보냈다.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서로 원수였으나, 바로 그 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

 

 

 

악역을 맡은 자들 

 

오늘은 고난주간 기도회 두 번째 날입니다. 우리의 발걸음은 점점 어둠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누가복음 23장입니다. 누가복음 22장부터 24장은 하나의 묶음으로 묶일 수 있는데, 이 세장의 말씀은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 부활 이 세 가지로 요약이 가능합니다. 

 

먼저 22장의 말씀은 그야말로 폭풍전야의 말씀입니다예수를 죽일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유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서 기자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서 이런 일을 꾸몄다고 이야기합니다(22:3). 사실 이러한 표현이 우리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예수를 팔아넘긴 것이 정말 유다인지아니면 유다에게 들어간 사탄의 일인지가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유다를 탓해야 하는 것인지아니면 사탄을 탓해야 하는 것인지가 점점 혼란스러워집니다. 유다 같은 이를 대할 때면, 인생에서 ‘악역을 맡은 자’가 따로 있나, 라는 생각마저 들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를 곤란하게 만드는 성경 속 인물들이 몇몇 더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곤란하게 만드는 이유는 기독교 전통은 그들을 늘 나쁘게 여겨왔지만, 과연, 정말 그들이 나쁜 사람인가, 라는 의구심을 들게 하기 때문입니다그들이 처한 상황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그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공감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누구도 함부로 정죄하지 못하게 됩니다이러한 인물 가운데는 방금 말씀드린 가룟 유다가 있고 또 의심 많은 도마가 있고 마지막으로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있습니다그들은 2천 년이라는 세월 동안, 모든 믿는 자들의 욕받이가 되어 왔습니다. 

 

유다 다시 생각하기

 

유다는 은 서른 닢(은 30냥) 예수를 팔아넘긴 자였습니다. 그가 예수를 팔아넘긴 금액이 얼마인지는 마태복음에만 등장합니다. 사실 유다는 꽤 부유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은돈 서른 닢은 그에게 아주 적은 돈에 불과했을 것입니다은돈 서른 닢은 보통 노예 한 사람을 팔고서 받는 값에 해당하는데, 부유했던 유다가 예수를 노예 취급을 한 것인지, 아니면 당장의 푼돈이 필요했던 것인지 확실히 알 순 없습니다. 성경에서 생략된 부분은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가룟 유다의 이야기는 사실 유대 사회로 들어가면, 더 복잡해지고, 그 무게감이 훨씬 무거워집니다왜냐면, 유대 사회에서는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겼다는 이 이야기가 유다 개인의 문제로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히브리어로 발음하게 되면, ‘예후다’가 됩니다그런데 이 ‘예후다’라는 말은 다시 ‘예후디’ 혹은 ‘암하-예후디’로 읽히는데, 바로 이 ‘예후디’ 혹은 ‘암하-예후디’라는 말은 유대인이유대 민족 전체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유다라는 인물은 한 사람의 이름을 뜻하기도 하지만, 더 넓은 의미로는 유대 민족 전체를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다의 배신은 유다 개인의 배신이 아니라 유대 민족 전체의 배신으로도 읽힐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 사회와 멀리 떨어져 살기 때문에 유다의 배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지만, 유대 사회에서 이 유다라는 존재는 그리 간단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베드로 다시 생각하기 

 

그리고 우리를 고민에 빠뜨릴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는데, 그는 바로 시몬 베드로입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이번에도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그 순간에, 사탄의 꼬드김이 있었다고 말합니다(22:31). 예수는 말합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31) 주님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신뢰했던 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은 선한 존재이고인간이 악한 행위를 하는 것은 늘 유혹 때문이라고 주님은 말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릅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사실 그가 대표성을 띠어서 그렇지그의 믿음이 다른 제자들에 비해 그 크기가 더 작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예수의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동일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분명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자신을 모른다고 한 것을 두고그를 책망하거나 서운한 티를 내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는 베드로의 배신과 관련하여 어떠한 비난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고 난 뒤, 예수와 눈이 마주칩니다. 눈은진실을 드러내는 창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베드로는 예수와 눈이 마주치고 난 다음,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베드로의 깨달음은 예수를 외롭게 두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베드로가 예수와 눈이 마주치고 난 뒤‘비통하게 울었다고’(6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와 눈이 마주치고 난 뒤,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무척 외로우셨겠다는 깨달음과 그리고 그 외로움에도 불구하고 “그런 너를 다 이해한다”라는, 예수의 그 공감의 눈빛을 베드로는 깨달았을 것입니다. 예수는, 그렇게 가깝게 지내던 제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부인을 당하면서도, 끝끝내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예수의 죄목 세 가지

 

누가복음 23장은 누가복음 가운데 가장 어두운 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의 죽음 이야기가 그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결국 사형 판결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십니다그리고 머지않아, 숨을 거두게 되고, 무덤에 묻히게 됩니다오늘 우리는 이러한 내용 가운데, 예수의 사형 판결 이야기를 더 나눠보려고 합니다. 

 

예수를 사로잡은 사람들은 그를 빌라도 앞으로 데려옵니다. 드디어 예수와 빌라도가 첫 대면을 합니다. 예수를 빌라도 앞으로 끌고 온 사람들은 예수의 죄목이 무엇인지 상세히 알려줍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우리 민족을 오도하고,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자칭 그리스도 곧 왕이라고 하였습니다.”(23:2) 

 

그들이 말하는 예수의 죄목은 총 세 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민족을 오도한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한 것이고, 마지막 한 가지는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칭한 것입니다. 먼저 그들은 예수가 민족을 오도했다고 말했습니다. ‘오도’라는 말은잘못된 길로 인도하다’라는 말입니다. 사람들 눈에 예수는 민중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 때문에 길을 잃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한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됩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른길그른 길은 대체 어떤 길인지가 궁금해집니다. 

 

사람들이 기대했던 길은 바로 ‘힘의 길’입니다. 그들은 강력한 힘으로 세상에 평화가 도래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러한 평화는 로마가 보여준 평화였습니다. 그들은 로마가 이루고자 했던, 그 힘의 평화를 고스란히 따르고 싶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예수에게 기대한 바도 바로 이러한 ‘힘의 평화’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추구한 길은 그러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정확히 그 반대의 길을 추구했습니다미가서(4장)에는 예수께서 추구하신 길이 어떤 길이지가 아주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예언자 미가는 말합니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4) 

 

어찌 보면, 예수는 민족을 오도한 게 맞습니다. 예수는 힘과 권력으로 도래하는 나라가 아니라, 서로 위협하지 않는 그런 평화로운 나라를 꿈꾸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죄목 

 

이어서 예수를 빌라도 앞으로 끌고 온 자들은 예수가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 20장 20-26절에 이미 등장한 바가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세금 논쟁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들에도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그런데 오직 이 누가복음에서만, 예수가 고발당한 이유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가 고발당한 이유는 로마에 대한 납세의 의무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예수는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였던 것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골탕 먹이기 위해 이렇게 질문합니다. “우리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눅 20:22)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두 가지뿐입니다. 옳거나, 그르거나입니다. 어떤 선택을 해도 예수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옳다고 말하면 로마에 동조하는 것이 되고, 그르다고 말하면 로마에 반항이나 저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덫 그대로를, 그들에게 돌려줍니다. 예수는 말합니다. “데나리온 한 닢을 나에게 보여다오. 이 돈에 누구의 얼굴상과 글자가 새겨져 있느냐?”(눅 20:24) 사람들은 그 데나리온에서 황제의 얼굴을 보았고, 예수는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는 이처럼 그들의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덫과 같은 질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예수를 고발한 자들은 바로 이날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여, 예수가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들의 고발은 누가 봐도 억지에 가까웠습니다. 

 

세 번째 죄목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가 고발당한 이유는 예수가 자신을 ‘자칭 그리스도 곧 왕’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한 근거는 앞서 등장한 22장 후반부의 이야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고발하려고 모인 사람들은 예수를 향해 당신이 그리스도 곧 메시아냐고 묻습니다. 예수는 이 질문 또한 적대자들이 놓은 덫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이번에도 그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시고대신 우회하는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제부터 자신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시편 110편 1절의 말씀을 통해, 가장 먼저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시편 110편은 다윗의 노래로 알려져 있는데, 이 노래는 ‘왕의 대관식’ 때 쓰이던 예배문입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너의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셨습니다.”(시 110:1) ‘오른쪽’이라는 단어는 '옳은'에서 온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오른쪽’은 곧 ‘도움이 오는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오른쪽은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는 곳인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신이 곧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게 될 거’라는 이 답변 안에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말이 담겨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늘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을 수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번째 죄목 

 

빌라도는 예수의 죄목 세 가지를 모두 들었습니다. 그는 세 번째 죄목에 관해서 잠시 짚고 넘어갔을 뿐, 예수로부터 어떤 죄의 흔적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군중들을 향하여 “이 사람에게는 아무 죄도 없소.”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빌라도의 믿음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예수를 처벌해도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게 없기에 했던 그런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빌라도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흥분과 격분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더 이상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에게 네 번째 죄목 한 가지를 더 뒤집어씌우는데, 그들은 예수가 “온 유대를 누비면서, 가르치며, 백성을 선동하고”(23:5) 있다고 말했습니다. <새한글성경>은 ‘선동하다’를 ‘마구 부추기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진리’라고 하는 것은 물론 저절로 전해지기도 하지만,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는 ‘선동하고, 부추기는’ 방법만이 유일한 진리 선포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물러서지 않는 백성들 때문에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는 원래 탐욕스럽고, 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와 직접 대면하고 난 이후, 그는 양심에 거리끼는 판결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좋은 수를 떠올립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갈릴리 출신임을 알게 되었고그를 그곳의 통치자인 헤롯 안티파스에게 넘기기로 한 것입니다. 

 

‘폰티우스 필라투스’(라틴어, Pontius Pilatus)라고 하는 이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로부터 파견된 총독이었습니다그러니까 그는 로마 사람이었기 때문에 유대 사람들의 일에 깊이 연루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 사람이었던) 이 예수의 운명을 헤롯 안티파스에게 맡기게 되는데이 헤롯 안티파스라는 자는 (갈릴리가 속한) 유대 땅을 다스리던 분봉왕이었습니다

 

예수의 침묵 

 

헤롯과 예수 또한 첫 대면을 합니다성경은 말하기를, 헤롯은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3:8). 물론 (헤롯이) 자신이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났기 때문에 기뻐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에 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예수가 일으킨 기적을 가장 궁금해했습니다. 그러니까 헤롯이 예수를 보고 기뻐한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장난삼아 예수께 이것저것을 묻습니다. 예수는 보통 적대자들의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방식으로 답하곤 하였으나, 헤롯의 질문에는 일절 어떠한 답변도 하지 않고,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예수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여전히,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자기 앞에 있는 자가 정말 누구인지 그리고 예수가 일으킨 이적들이 로마가 추구했던 세상과 정반대의 세상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침묵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누군가의 무지를 드러내기 위한 침묵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한다고 하여도, 자신은 결코 이해받을 수 없음을 알았기에 택했던 방법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그들의 눈에 예수의 침묵은 헤롯을 무시하는 태도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로 지금이 예수를 고발할 절호의 기회라 여겼습니다그래서 예수의 적대자들은 헤롯을 자극하기 위해 예수를 맹렬하게 비난했습니다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그들이 원했던 일’을 성공시킵니다. 헤롯은 예수를 모욕하고, 조롱하는 일에 동참하였고, 그에게 화려한 옷을 입혀서 다시 빌라도에게 보내기로 합니다. 성경은 이 계기로 헤롯과 빌라도가 좋은 친구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이 일로 자신들이 서로 한 편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의 미소 

 

오늘의 이야기를 보며, 느껴지는 하나의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 감정은 외로움이었습니다. 고난의 길을 앞둔 예수는 외로웠습니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줄 거라 여긴 제자들도 떠났고, 종교 지도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자신을 따르던 군중들마저도 자신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예수는 말의 부질없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을 변호하고,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쳐주고 싶었지만, 그는 그 일을 단념합니다사람들은 결코 자기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침묵은 또 하나의 목소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설 <침묵>의 저자인 ‘엔도 슈샤쿠’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내면이나, 자신의 슬픔, 그리고 괴로움을 이해해 주지 않고 또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상대에 전할 수 있는 최후의 커뮤니케이션은 미소밖에 없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는 유다와 베드로를 보며, 미소 지으셨는지도 모릅니다그리고 예수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미소 짓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예수는 외롭습니다. 예수의 외로움은 현재진행형입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며, 우리가 예수의 마음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의 마음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하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우리의 철저한 자기반성과 성찰도 필요합니다부디 예수께서 우리를 통해 회의와 절망의 미소에서 벗어나 기쁨의 미소를 회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잠시 거둠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말씀을 나누고 공부하는 살롱(salon)입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삶에 적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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