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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겸애(兼愛)의 첫 걸음, 예수

20170108 쓰임교회 주일설교

겸애(兼愛)의 첫 걸음, 예수

<마태복음 2장 1-12절>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그런데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2. 말하였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3. 헤롯 왕은 이 말을 듣고 당황하였고,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그와 함께 당황하였다.
4. 왕은 백성의 대제사장들과 율법 교사들을 다 모아 놓고서,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실지를 그들에게 물어 보았다.
5. 그들이 왕에게 말하였다.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6. '너 유대 땅에 있는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가운데서 아주 작지가 않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올 것이니, 그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다.'"
7. 그 때에 헤롯은 그 박사들을 가만히 불러서, 별이 나타난 때를 캐어묻고,
8.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를 샅샅이 찾아보시오.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할 생각이오."
9. 그들은 왕의 말을 듣고 떠났다. 그런데 동방에서 본 그 별이 그들 앞에 나타나서 그들을 인도해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 그 위에 멈추었다.
10.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무척이나 크게 기뻐하였다.
11.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서,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서 그에게 경배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보물 상자를 열어서,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12. 그리고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 다른 길로 자기 나라에 돌아갔다.

동방박사로 시작된 그 이야기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2017년 두 번째 주이자 주현절 제1주입니다. '주현절'은 예수의 탄생 이후 그가 살았던 삶을 기억하고 또 기념하는 주간입니다. 오늘은 그의 삶을 기억하는 그 출발점에 있어 동방박사에 관한 하나의 에피소드와 예수의 삶에 관해 살펴볼까 합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2장은 동방박사의 등장으로 시작됩니다. 동방으로부터 몇 명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할 당시 유대 땅은 헤롯 안티파스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예루살렘에 와 이렇게 말하고 다니기 시작합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2).” 갑작스런 그들의 등장은 당시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헤롯왕, 그리고 지금의 우리까지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그래서 본문 3절은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 사람들이 몹시 당황했다 말하고 있습니다(3). 버젓하게 버티는 왕이 있는데 새로운 왕으로 났다는 말을 듣고 흥분하지 않을 왕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그 흥분은 분노일 수도 있지만 두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헤롯왕은 대제사장들과 율법 교사들을 불러 놓고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나실지 물어 보았습니다(4).

새로운 그리스도의 탄생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그리스도’하면 자연스레 예수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원래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은 받은 자’라는 뜻으로 왕으로 세움 받는 자들은 누구나 거치는 실제적 의식(예식)이자 왕 됨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박사들이 말한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을 헤롯이 ‘그리스도’라는 표현으로 바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날지 묻는 헤롯왕에게 대제사장들과 율법 교사들은 구약의 본문을 들어 이야기해 줍니다.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너 유대 땅에 있는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가운데서 아주 작지가 않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올 것이니, 그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다.'(5-6)” 조금 전의 이 말은 구약 예언자 미가가 했던 말입니다. 미가 5장2절에 나오는 말입니다. 대신 읽어 드리겠습니다.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2).” 미가의 예언은 혼란스런 시대적 상황 가운데 새로운 예언자이자 통치자인 한 사람이 등장함을 태초에 기원을 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미가의 예언을 기억한 제사장들과 율법 교사들은 새로운 유대인의 왕이 날 곳을 헤롯에게 일러 주었습니다. 다음의 사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구약의 약속이 신약에 와서 성취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새로운 그리스도가 태어날 곳을 알게 된 헤롯은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묻고 그들을 베들레헴에 보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서, 그 아기를 샅샅이 찾아보시오.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할 생각이오(8).” 만일 우리가 이 본문을 처음 읽는다거나 헤롯이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면 방금 그의 말을 우리는 순수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는 마치 하나님이 이루어 가실 역사를 기대하고 있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인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그리스도인 그 어린 아기를 찾아내 죽이려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아마 당시의 박사들은 그때까진 헤롯왕의 진의(眞意)를 모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12)을 보면 그들은 꿈의 지시를 통해서야 헤롯에게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헤롯의 말을 믿고 베들레헴으로 떠났습니다. 길을 떠난 동방의 박사들은 그들을 인도하던 별을 따라 걸었고 마침내 그 별은 아기가 있는 곳에 멈춰 섰습니다(9). 박사들은 그 별이 멈춰선 것을 보며 무척이나 크게 기뻐했습니다(10). 사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 지금의 우리로써는 알기 어렵지만, 아마 그들이 믿고 있던 무엇인가가 실현되는 그 순간의 현장에서 그들은 말할 수 없는 흥분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엎드려 마음을 담아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준비해 온 보물 상자를 열어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주었습니다(11). 이 세 가지 예물에 관해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그 중 한 가지는 세 가지 예물 중 ‘몰약’은 예수께서 참사람이라는 뜻이고 ‘유향’은 예수가 참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며 ‘황금’은 그가 하늘과 땅의 왕임을 고백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예물의 해석이 정확히 무엇이건 간에 분명히 드러난 사실은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가 유대의 새로운 왕임을 드러냈다는 것과 또 그들은 예수에게서 헤롯과는 다른 희망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666589&path=201701, <가톨릭 평화신문> 기사) 

 

묵가의 ‘애인약애기신’과 예수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신영복 선생님 책을 읽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동양 고전에 관해 풀이해 논 책 <담론>에서 그는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중 한 명이었던 ‘묵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묵자를 시조(始祖)로 한 학파 ‘묵가’는 묵자의 겸애(兼愛, 자타(自他)나 친소(親疎)를 가리지 아니하고 모든 세상(世上) 사람을 똑같이 사랑함) 사상의 기초를 애인약애기신(愛人若愛其身)에 담았습니다. 그럼 ‘애인약애기신’은 무슨 말일까요? 신선생님 책 <담론>의 한 부분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애인약애기신' 부분을 한번 번역해 보기 바랍니다. 여기서 '人(인)'은 다른 사람, 이웃의 뜻입니다.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성경 구절과 똑같습니다. 이 구절을 들어 예수 탄생 때 나타난 세 사람의 동방박사가 묵가가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기원전 100년경에 묵가는 중국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하기 이전까지는 묵가가 활동을 했기 때문에 어쩌면 예수가 묵가 그룹에서 공부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없지 않습니다.” / 신영복, <담론>, 돌베개, p.164

동양의 사상과 예수의 이야기가 섞여 조금 불편하십니까? 기저(근저)에 깔린 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과 맞닿아 있다면 그것이 동양의 사상이든 서양의 사상이든 우리에게 낯선 것일지라도 한번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묵가는 사람 사랑하기를 삶의 원칙으로 삼고 살았던 학파입니다. 예수가 복음서를 통해 이야기했던 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가 묵가 그룹에서 공부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마 19:19).’라는 원칙을 묵가에서 먼저 생각해 낸 것이라고 해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동일한 가르침을 주었다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또한 사람을 사랑하라는 겸애(兼愛) 사상은 누가 먼저 이야기했나보다 그것이 삶에서 정말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주장했다는 것에 그 핵심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의 삶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부분인 것입니다. 

이웃 사랑하기, 그 어려운 길을 당당하게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오늘은 주께서 현현하셨다는 다시 말해 주께서 그 모습을 드러내셨다는 ‘주현절’ 첫 주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공생애를 기억하는 첫 번째 단추는 이웃을 향한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그의 활동에 처음과 마지막은 사람 사랑하기였습니다. 동방의 세 박사가 묵가의 전통을 가지고 왔을 수도 있다는 이 희미한 가정이 예수 삶의 중심이자 그의 가르침의 핵심이었던 ‘이웃사랑’을 더욱 또렷하게 만듭니다. 물론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몇 번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 체념하게 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지난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함께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습니다." 막 12:33)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 기억했으면 하는 부분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나와 하나님이 사랑과 신뢰의 관계로 잘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뭐 이런 뜻인 거죠. 하나님을 잘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이웃 사랑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과 또 순서를 바꿔서 누군가 사랑하고자 하는 시도는 자연스레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설교는 말이라 잘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경험을 해봐야 알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시작된 주현의 절기, 예수의 가르침이자 그의 삶이 늘 보여주었던 ‘이웃사랑’을 우리 일상에서 잘 살아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진정한 ‘이웃’은 누구일까 재고하게 된다면 그것 또한 참 기쁜 일이 될 것입니다. 이웃의 경계를 허물고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과 만나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지 잊지 않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용기를 내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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