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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내 말의 진심은, 그렇다

20160724 쓰임교회 주일설교

 

내 말의 진심은, 그렇다 

 

<호세아 1장 2-10절>

 

2. 주님께서 처음으로 호세아를 시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주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아라! 이 나라가 주를 버리고 떠나서, 음란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3. 호세아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과 결혼하였다. 고멜이 임신하여, 호세아의 아들을 낳았다.

4. 주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다.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하여라. 이제 곧 내가 예후의 집을 심판하겠다. 그가 이스르엘에서 살육한 죄를 물어서 이스라엘 왕조를 없애겠다.

5. 또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평원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겠다."

6. 고멜이 다시 임신하여 딸을 낳았다. 이 때에 주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다. "그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라고 하여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용서하지도 않겠다.

7. 그러나 유다 족속은 내가 불쌍히 여기겠다. 그들의 주 나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그들을 구출하겠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활이나 칼이나 전쟁이나 군마나 기마병으로 구출하는 것이 아니다."

8. 로루하마가 젖을 뗄 때에, 고멜이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9.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고 하여라. 너희가 나의 백성이 아니며, 나도 너희의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져서,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되어 보거나 세어 볼 수 없을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이 너희를 로암미라고 부른 땅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를 것이다.

 

 

에둘러 사랑을 표현하다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 간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좋은 효과를 거두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에둘러 표현’하는 것입니다. 에둘러 표현한다는 게 무슨 말일까요? 나의 마음을 전할 때 ‘좋다, 싫다, 나쁘다’ 등과 같이 직접적인 표현을 쓰지 않고, 마음을 어딘가에 빗대어 이야기하거나 말하고자 하는 것의 의미는 살리되 표현방식을 달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직접 고백보다 이러한 간접 고백이 숨겨진 마음을 전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모든 경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간혹, 눈치가 없는 상대방이 에둘러 표현한 내 마음을 몰라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마음을 전한 당사자는 굉장히 당혹감을 느낍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상황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이해해 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호세아에,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아내인 고멜로 비유했고, 당신의 마음을 두 부부의 관계에 빗대어 에둘러 표현하셨습니다. 물론 에둘러 표현했지만, 그의 음성은 단호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마음의 근본은 사랑이었습니다. 지금부터 오늘 본문인 호세아서를 차근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호세아가 살던 시대적 상황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세(BC 793-753)와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었던 호세아(BC 732-722) 때까지 활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지자와 왕의 이름이 같습니다. 한편, 동시대에 남유다에서는 웃시야(BC 791-739), 요담(BC 750-731), 아하스(BC 735-716), 히스기야(BC 728-687)왕이 돌아가며 통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 당시, 북이스라엘은 솔로몬 왕 이후 가장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여러보암 2세는 북방 하맛 어귀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강화하며, 경제적 안정까지 꾀하였기에 북이스라엘 역사 이래 최고의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북이스라엘은 이러한 번영의 복을 잘 유지하지 못하였고, 결국 사치와 타락에 빠지게 된 북이스라엘은 호세아 왕 때에 이르러 앗수르에게 패망하고 맙니다(BC 722).

 

여기까지가 호세아가 살아가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입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이 번영한 이후, 타락의 시기로 접어들었을 바로 이 시기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와 하나님의 첫 만남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배역 ‘호세아’, 이스라엘의 배역 ‘음란한 여인’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아라! 이 나라가 주를 버리고 떠나서 음란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말 속에서 하나님의 답답하고 억울한 심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음란하게 산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성경에는 음란함이 주로 여성에게 적용되는데, 음란한 여성은 결혼한 자신의 남편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다른 남성들에게 기웃대기를 즐겨합니다. 성경에는 다른 남자들과 관계를 맺는다고도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음란하다는 말은, 사랑을 기반으로 한 언약의 관계를 파기하고 혹은 잃어버리고, 자신의 욕망이 시키는 대로 무분별하게 살아가는 것을 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라고 하십니다. 호세아 입장에서 보면 이 말은 수용하기 어려운 것일 텐데, 사실 호세아가 하나님 역할을 담당한다고 볼 때, 이미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과 결혼한 상태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음란한 여인으로 상징되는 호세아서의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이미 창세기 때부터 언약의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라고 명한 것은 그의 마음을 두 부부관계의 상황으로 묘사하기 위한 하나의 역상황적 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호세아의 세 자녀와 하나님의 마음

 

아무튼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호세아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과 결혼하게 됩니다. 음란한 딸로 상징되는 고멜은 임신하여 호세아의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 아이의 이름은 ‘이스르엘’입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주신 이름으로, 이스르엘이라는 뜻은 ‘하나님이 씨를 뿌리시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르엘은 역대상 4장3절에 유다의 자손으로 등장하는데, 이 이름을 지명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등장하는 예후는 기원전 9세기에 살았던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오늘 본문에서는 아마 유다를 상징했던 이스르엘을 친 심판받을 이스라엘로 비유되고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르엘(유다)에서 살육한 죄를 물어 이스라엘 왕조를 없애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화가 대단해 보입니다. 

 

호세아의 아내인 고멜은 둘째를 낳게 되는데, 딸을 낳게 됩니다. 그 때도 하나님께서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시는데, 그 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하라 명하십니다. 로루하마의 뜻은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딸’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낳는 모든 사랑의 결과물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용서하지도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유다 족속은 불쌍히 여기 직접 하나님이 구출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활이나 칼이나 전쟁이나 군마나 기마병으로 그들을 구출하진 않겠다고 하는데, 이 말은 아마 그들의 상황을 황폐하게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품으시겠다는 말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비교하고 계십니다. 

 

고멜은 또 셋째를 낳게 되는데, 셋째는 아들이었고 하나님은 그 아이의 이름을 ‘로암미’라고 지어주십니다. 로암미라는 뜻은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름을 지으신 이유를 ‘너희가 나의 백성이 아니며, 나도 너희의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무섭게 심판하시고자 작정하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진심을 에둘러 표현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맺은 지난 언약을, 자신의 사랑을 기억해 달라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심판을 도구 삼아 겁을 주시고, 그런 심판을 당하기 싫거든 다시 돌아오라고 하는듯한 이 말이 어쩌면 협박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부모와 자식의 관점으로 보면 조금 달리 보입니다. 아직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나이의 자녀에게 부모는 좀 엄한 모습을 보입니다. 아이의 고집과 바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면 후일에 지나친 자기중심적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엄하다하여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엄한 자녀 교육은 매우 조심스러운 부분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심은 심판이 아닙니다. 그분의 진심은 심판에 담겨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10절에서 당신의 진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져서,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되어 보거나 세어 볼 수 없을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이 너희를 로암미라고 부른 땅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를 것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심은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내다보시며 그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모를 때가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마음이 쉽게 변했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로암미’ 즉, 나의 백성이 아니라는 그 이름에서 ‘암미’ 즉, 나의 백성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그러합니다.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입니다. 속상하고 답답하고 때론 실망하더라도 끝까지 품고 가는 것이 자녀를 둔 부모의 심정인 것이지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두 가지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부유해진 이스라엘에서 가진 자들은 더욱 배를 불렸고, 가난한 자들은 사회의 지위와 권리마저 박탈당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배 불리기에만 급급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에 지위와 권리를 박탈당해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의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관심으로 시작해 물질, 양보, 이해, 입장 그리고 우리의 몸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다른 한 가지는 무엇이냐면,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드는 사람들과만 지낼 수 없습니다. 나와 맞지 않는 이들은 어딜 가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무겁게 고민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러한 일은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주 하나님 앞에 머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의 도움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날이 정말 무덥습니다. 시원한 곳만 찾게 되는 요즘, 우리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진심을 잘 알아차려 하나님의 마음 또한 시원하게 만드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이중생활

문학과 여행 그리고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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