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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담장을 넘어, 길에 들어서다

20160731 쓰임교회 주일설교

 

담장을 넘어, 길에 들어서다

 

<골로새서 3장 1-11절>

 

1.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

5.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6. 이런 것들 때문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립니다.

7. 여러분도 전에 그런 것에 빠져서 살 때에는, 그렇게 행동하였습니다.

8.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그 모든 것, 곧 분노와 격분과 악의와 훼방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말을 버리십시오.

9.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11.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Lumix gx9 / 20mm]

동서 문물이 교차하는 길목의 ‘골로새’

 

성령강림절 제11주인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골로새서 3장 1-1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올해 3월 저희 지방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알게 된 사실이긴 합니다만, 골로새서는 골로새에 있는 어떤 하나의 특정한 교회를 향해 쓴 서신이 아니라, 골로새 지역 전체에 퍼져있는 교회에 보낸 서신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 전·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등과 같은 서신들은 고린도, 에베소, 빌립보라고 이름 붙여진 단 하나의 교회에 보낸 서신이 아니라, 그 지역 전체교회에 보낸 편지라는 것입니다. 뭐 이렇게도 표현이 가능할까요? ‘성남동서신’이라는 편지가 있고, 이 편지를 주님의 제자교회 성도들이 읽었다? 만약 이렇게 접근해본다면, 우리가 '성남동서신'을 읽을 때 이 지역의 위치와 문화, 성도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편지를 쓸 땐, 그럴만한 이유를 염두해 쓰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터키에 위치한 골로새는 성경이 쓰일 당시, 동서 문물이 교차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서쪽에 있는 라오디게아, 라오디게아 북쪽 인근의 히에라볼리와 함께 삼각지역을 이루고 있는 교통과 무역의 중심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은 일찍부터 이단 사상과 다양한 철학들이 성행했습니다. 

 

이러한 문화의 영향으로 골로새 교인들 중에는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는 부족하여 천사숭배, 금욕주의, 율법주의, 영지주의를 탐닉하는 이들이 있었고, 또 이러한 것들이 혼합되어 있는 사상을 좇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골로새의 성도들은 다시 교회의 본질, 신앙의 기준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서야 했습니다. 본 서신의 저자인 ‘골로새의 바울’은 여기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골로새서에 담긴 하나의 기준

 

그 가운데 오늘 본문 3장은 변화된 신분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해 이야기 합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신앙인들은 믿음의 출발점이 다양합니다. 어떤 분들은 모태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또 어떤 분들은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또 어떤 분들은 성인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시작점은 다르지만 모두가 가진 공통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를 알고 난 후 우리의 삶이 뭔가 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된 이후, 우리에게 신분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지요. 요한복음 15:15에서 예수께서는 우리를 향해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너희를 친구로 부르겠다.’는 그 말이 스스로의 존재를 새로 보게 만들었습니다. 

 

‘골로새의 바울’은 골로새 지역이 처한 여러 혼돈 가운데, 두 가지를 염두 해 두고 편지를 썼는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를 믿는 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속과 죽음의 의미

 

오늘 본문의 3장 초반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위에 있는 것을 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한 번 더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1).” 여기서 ‘위’라고 하는 것은 어떤 공간을 가리킨다기보다는, 하나님과 예수가 함께 거하시는 곳, 달리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상징적 위치라고 보면 좋을 듯합니다. 

 

이어서 ‘골로새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2-5).” 이 단락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소속’입니다. 우리의 생명 즉, 우리의 살아있음은 어둠 속에서 곤충들이 빛으로 모여들 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우리가 육신의 부모로부터 자연스레 얻게 된 생명 말고, 하늘빛과 마주하며 얻게 된 ‘새로운 이 생명’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달리 갖게 합니다. 자신과 타자를 바라보는 마음과 태도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금 읽었던 본문 가운데, ‘여러분은 이미 죽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러분,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저는 이렇게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조금 어려운 말로, ‘주체의 상실’이라고 말입니다. 한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사실 누군가의 죽음은 ‘나’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하는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지만, ‘나’의 죽음은 그런 감정을 느끼는 주체 그 자체의 소멸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타인의 죽음은 내가 사는 세상의 한 조각이 사라지는 것이지만, 나의 죽음은 내 삶과 나 자신, 내가 인식하고 상호작용하는 세상이 통째로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이미 죽었다’는 말은 어떻게 생각해볼 수 있을까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생각, 내 판단 다시 말해, 지금까지 내 삶의 주인이 ‘나’였다면, 이제는 예수를 길잡이 삼아 그의 길을 함께 걸어가게 된 것,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정신’이 내 삶을 이끌어 가게 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바라보는 ‘죽음의 의미’ 아니겠습니까? 평범한 일상에 ‘나’라는 주체가 소멸하고, 예수의 정신이 또렷이 새겨진 주체가 탄생하는 것! 저는 이것이 '죽음'이 가리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저와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우리는 주님의 새로운 초대 앞에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들의 경계

 

이어서 본문은 특히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는데, 땅에 속한 일들로는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이라 말하며, 탐욕은 곧 우상숭배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앞에 열거된 것들은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자기 자신은 잘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음행과 더러움, 정욕과 악한 욕망, 탐욕은 겉으로 잘 드러나진 않지만, 자신은 알고 있는, 숨길 수 있는 것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6절은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7절을 보면 땅에 속한 이러한 일들은 과거에 지나간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마치 과거의 것을 의도적으로 꺼내어 잃었던 신앙의 본질과 기초를 다시 상기시키려 하는 듯해 보입니다. 

 

그러고 나서, ‘골로새의 바울’은 8절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행위들, 무분별하게 행동했던 것들을 나열하며 이러한 것들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을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 모든 것, 곧 분노와 격분과 악의와 훼방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말을 버리십시오.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8-9a).” 지금 읽어드린 본문은 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부끄러운 말과 거짓된 말을 버려야함을 이야기합니다. 당시 골로새 지역의 교회 안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새로 보는 것이다.

 

다음의 나오는 말씀은 아마 자주 들어보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9b-10).” 좀 전에도 말씀드리긴 했습니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된 이후에, 또 예수의 위대한 사랑의 정신과 만나고 난 이후에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기존에 당연하게 믿어왔던 사실들을 새롭게 보는 눈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 태어남, ‘부활’의 본질 아니겠습니까? 일상을 새롭게 보게 되고, 나와 타자를 욕망 충족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게 되는 것, 이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에 따른 새로워짐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아는 것이 모든 책에 들어 있는 수많은 지식보다 소중한 ‘참 지식’인 것입니다.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삶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로 넘어가기 전에, 함께 살펴볼 단어가 있습니다. 혹시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바로 ‘끊임없이’입니다. ‘이 말이 뭐가 특별한가?’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끊임없이’라는 말만큼 그리스도인의 삶을 증명하는 표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지속성’이라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의 교인들은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말만 믿고, 교회 안의 생활과 일상이 삶을 구분 짓고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서는 ‘믿음’ 좋은 사람처럼 행동하다가, 교회 문밖을 나가면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수많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가슴 찔리는 이야기지만, 목회자들 가운데도 그러한 삶을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저를 포함해서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하늘의 뜻을 묻고 또 물으며 살아야 합니다. 어쩌면 믿음을 갖게 된 그때부터, 본격적인 신앙의 여정이 시작됐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도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이야기할 때, 거룩한 존재가 된다는 ‘성화’의 사건이 단번에 일어난다 해도, 그 ‘완전함’의 전과 후로는 항상 선한 행동이 있어야 하고, 그 ‘완전함’이라는 것은 또한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과정을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한평생 이루어가는 것이지요. 

 

벽을 허물고 담장을 무너뜨렸던 분, 예수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11).” 이 부분이 아주 핵심 대목입니다. 지금까지 서두에 이야기한 모든 말씀들은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건 상관없이 모두에게 해당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성경이 쓰여 진 당시를 상상하긴 쉽진 않지만, 오늘 본문이 쓰여질 당시만 하여도 차별이 극심한 세상이었습니다. 인종 간의 차별, 종족 간의 차별, 남녀 간의 차별, 유대인과 비유대인과의 차별, 종과 주인과의 차별 등 차별이 일상인 그때는 하나님의 말씀 또한 구분 지어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자격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에 관한 모습은 다양하겠지만, 제가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그분의 모습은 ‘벽을 허무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세워져있던 보이지 않는 ‘담장을 무너뜨리는 분’이셨습니다. 예수께서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너와 나의 경계선을 허무는 것 말입니다. 

 

예수의 법 아래에서는 헬라의 선진문물을 누렸던 ‘그리스인’이나 야훼 하나님을 믿던 전통 ‘유대인’이나 모두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율법 아래서 할례를 받아 순수한 혈통을 갖고 있던 ‘할례 받은 자’나 여러 가지 문화적인 제약 때문에 그러지 못했던 자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헬라어를 사용할 줄 모르거나 헬라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는 종족인 ‘야만인’이나, 학자들 간에 주장하는 바가 좀 다르긴 합니다만, 기원전 700년경 이란의 유목민이었던 몹시 잔인했거나, 몹시 존경받았던 민족인 ‘스구디아인’들도 예수에게 있어서는 동일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종’과 그렇지 않은 ‘자유인’의 구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너와 나의 담장을 넘어, 예수의 길에 들어서라

 

주님의 제자가 되고자 이곳에 모인 ‘주님의 제자교회’ 공동체 여러분, 저는 이곳에 모인 분들을 ‘길벗’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삶의 길잡이 삼아, 그가 걸어가신 길을 함께 걸어갈 길 위의 친구들입니다. 동역자인 것이지요. 그럼 신앙의 기준이 되신 예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은 어떤 길입니까? 너와 나 사이에 있는 담장을 허물고, 설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설 자리가 되어주고, 고난 받는 이들의 자리에 나아가고, 내 삶의 문제에만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겪는 고통에 귀 기울일 줄 아는 것, 그것이 ‘예수의 길’ 아니겠습니까? 

 

신앙생활을 한다는 건 그리고 예수를 따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보여주는 가치관과는 다른 가치관을 보며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않아도 될 것은,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과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넘치는 힘과 용기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모든 것을 새롭게 보기 위해 애쓰시기 바랍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여정입니다. 그 길 걷다가 넘어질 수 있습니다. 비틀 거릴 수도 있습니다. 길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 앞에 놓인,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러면 또 어떻습니까? 우리는 육체를 지닌 사람이기에 그러한 과정은 당연한 것입니다. 툭툭 털고 일어나, 하늘 한번 쳐다보고 다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걸어가면 됩니다. 그리고 너무 외로워 마십시오. 우리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길벗들이 있음을 항상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너와 나’라는 담장을 넘어, 늘 예수의 길을 따라 걸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살롱에서 나누는 말씀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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