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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있는 그대로 그 분 앞에

20160717 쓰임교회 주일설교

 

있는 그대로 그 분 앞에

 

<누가복음 10장 38-42절>

 

38.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41.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42.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여행, 있는 그대로의 나를 유지하는 시간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무더위 속 건강히 잘 지내고 계셨는지요? 

 

저는 두 주 전,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었습니다. 3박4일 제주도를 다녀왔는데요. 신학생 시절 동기들과 ‘여행’에 대해 이야기할 때 늘 나눴던 이야기가 ‘혼자 여행을 가서 좋은 점 하나는 내가 전도사인지 목사인지 굳이 밝히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경우는 목회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기대로 인해 덧입혀진 신분을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제주에서 하루에 5-6시간 산과 바다를 걷는 여행이라기보다는 ‘기행’에 가까운 시간들을 보내며, 그 시간들 사이사이에서 자유함을 누리고자 애를 썼습니다. 첫날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한 분 외에는 제가 누군지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되는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여러분들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 있으실 겁니다. 지금 내 삶은 나를 있는 그대로 품어주고 있는가? 또는 나는 현재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살고 있는가? 이런 생각들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함께 느껴보면 좋겠습니다. 

 

예수 일행을 맞이한 마르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누가복음 10장입니다. 신앙생활하며 많이 들어본 말씀일 것입니다. 예수와 그의 일행들은 마을을 두루 다니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 일행은 아마 예수의 제자들이었을 겁니다.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갔을 때,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이 여자에게는 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였습니다. 

 

예수와 그의 일행들을 집으로 맞이한 마르다는 소중한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하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일손이 부족하다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그의 동생 마리아가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동생 마리아를 찾게 되는데, 그녀는 예수의 제자들과 함께 예수의 발 곁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책망 받은 두 가지 이유

 

누가복음이 쓰일 당시 ‘누군가의 발 앞에 앉는다.’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출신 배경에 대해 설명하면서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의 율법의 엄격한 방식을 따라 교육을 받았다(행 22:3).”고 했는데, ‘문하’라는 말이 ‘발아래’를 뜻한다고 합니다. 유대의 랍비 전통에 의하면 오직 남성 제자들만이 스승의 발아래 앉을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를 발견한 마르다는 예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마르다의 이 말 속에 담긴 책망은 마리아가 자신을 돕지 않은 것에 대한 것도 있고, 더불어 여성이었던 동생 마리아가 사회적인 통념을 깨고 예수님의 제자인양 처신한다는 사실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만 남기고 오늘 본문은 끝이 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다가오길 원하는 예수

 

감리교 교회력에 따라 주어진 오늘 본문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런데도 제 마음 한 구석에는 계속해서 불편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게 뭘까, 생각을 하다 보니 저는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만 칭찬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마르다였어도 예수님과 그의 일행을 맞이하면 당연히 정성스런 대접을 하기 위해 애를 썼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얌체 같이 일은 돕지 않고 예수님 앞에 앉아서 그분의 이야기를 듣는 동생이 미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르다의 속마음은 몰라줄망정 예수께서는 오히려 마리아가 잘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조금 흥분을 가라앉히고 내가 빠뜨린 부분은 없나 생각하며 말씀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마르다를 향한 예수의 답변을 온화한 말투로 상상하며 읽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조금 다른 느낌의 문장으로 읽혔습니다. 예수께서 마르다를 향해 가장 먼저 이렇게 대답했었지요. “마르다야, 마르다야” 성경을 읽을 때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가 예수의 반복된 말입니다. 예수가 반복해서 하는 말에는 그의 마음과 강조점이 담겨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진정으로, 진정으로). 

 

마르다를 부르는 예수의 말투를 온화하게 상상하며 읽었더니 그분의 답변이 이렇게 읽혔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분주한 마음을 내려놓고 이제 편히 있어도 괜찮다. 다른 크고 위대한 사람들을 대하듯이 나를 대하지 않아도 괜찮다. 있는 모습 그대로, 있는 형편 그대로 나와 함께하면 좋겠구나.” 어쩌면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예수는 분주히 움직이는 마르다가 계속 눈에 밟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는 당시 사회의 부조리한 권위와 통념을 깨뜨리는 분이셨고, 그의 위대한 정신은 아주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는 대접을 받기보다 자신을 믿고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줄 친구 같은 존재를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동생 마리아의 태도는 예수의 눈에 그저 맑고 순수함으로 비춰졌을 것입니다. 예수의 눈에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던 것이지요. 동생 마리아에게 예수는 격식을 갖춰야할 부담스러운 분이 아니라, 친근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스스로 행복한 사람, 실존에 깊이 뿌리 내린 존재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진정한 내 모습, 진짜 자신의 모습을 자꾸 잃어만 가고 있는 건 아닌가하고 말입니다.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 사이에서 오는 어떤 괴리감,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삶에서 오는 고단함과 억울함 때문에 힘들어 하는 나 자신, 그리고 그러한 자신이 나약하게 여겨지는 것에서 오는 어떤 우울감 등 지금의 현실과 나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계시진 않은지요. 

 

최근 읽었던 책의 글귀를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 나온 한 대목입니다.

 

“모성애는 어린아이에게 살려고 하는 소망뿐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을 천천히 길러 준다. 이러한 사상은 성서의 다른 이야기에서도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약속된 땅은 '젖과 꿀이 넘쳐흐른다.'고 묘사되고 있다. 젖은 사랑의 첫 번째 측면, 곧 보호와 긍정적 측면의 상징이다. 꿀은 삶의 달콤함, 삶에 대한 사랑, 살아 있다는 행복감을 상징한다. 대부분의 어머니가 '젖'을 줄 수 있으나 '꿀'까지 줄 수 있는 어머니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꿀을 줄 수 있으려면 어머니는 '좋은 어머니'일 뿐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목표에 도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p.73)

 

어린아이는 결국 완전히 분리된 인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모성애의 참된 본질은 어린아이의 성장을 돌봐주는 것이며 이것은 그녀로부터 어린아이가 분리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뜻이다. 이 단계에서 모성애는 비이기성, 곧 모든 것을 주면서도 사랑하는 자의 행복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능력을 요구하는 어려운 과업으로 변한다. 또한 이 단계에서 많은 어머니들은 모성애라는 이들의 과업에서 실패를 겪는다. 자아도취적이고 지배욕과 소유욕이 있는 여자는 어린아이가 연약할 때에만 '사랑하는' 어머니로서 성공할 수 있다. 오직 참으로 사랑할 줄 아는 여자, 받기보다는 주는 데서 더 많은 행복을 느끼는 여자, 그녀 자신의 실존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여자만이 어린아이가 분리 과정을 밟고 있을 때에도 사랑하는 어머니일 수 있다.” (p.75-76)

 

물론 저는 평생가도 어머니와 아내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순 없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경험과 이론을 바탕으로 조금은 이해할진 모르지만, 남자는 평생가도 여자의 마음을 다 알 순 없습니다. 그런데 굳이 제가 이 글귀를 읽어드린 이유는 자녀에게 꿀을 주기 위해서는 스스로 행복한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실존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여성만이 어린아이가 분리의 과정을 밟고 있을 때에도 사랑하는 어머니 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책의 저자도 이것이 정말 어려워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이 과업에 실패한다고 했습니다. 다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어머니는 자녀들의 엄마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도 행복한 사람, 실존에 깊이 뿌리내리는 사람으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도 여기에 해당 됩니다. 젊든, 나이가 있든 간에 우리 모두는 있는 그대로 존중 받아야 마땅한 사람인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과 만나길

 

예수의 위대함은 바로 이와 관련된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마리아만 칭찬하고 마르다는 꾸짖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는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 왔던 일상의 무게들을 내려놓고, 지금의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 올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살아내고 있는 하나님의 본질 즉,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무언가 요구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품으시고 사랑하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오늘부터 각 가정으로 돌아가 “나 오늘부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 거야.”라고 말하며 집 안을 긴장 상태로 만들면 안 됩니다. 사람은 나 아닌 누군가의 깊숙한 요구와 바람을 알아차리기 정말 어려워합니다. 그건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나 이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물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만나면 정말 복 받은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내 속 깊은 사정과 바람과 감정들을 굳이 감출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뭔가 감추고, 뭔가 있어 보이려는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없다면, 나 스스로 하나님을 소심하고 쪼잔한 분으로 만드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가 갖춰야할 것은 없습니다. 그저 정직한 마음과 태도와 모습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꾸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일 때에 일상의 삶에서도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신뢰가 없다면 신뢰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됩니다. 늘 반복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나와 하나님이 사랑의 관계로 회복될 때, 자연스레 이웃 사랑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고, 이웃 사랑의 동력도 지치지 않는 것입니다. 방학을 맞이하는 한 달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솔직하고 정직하고 담백한 관계를 맺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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