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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다양한 삶을 응원하는 거룩한 영

20160117 쓰임교회 주일설교

 

다양한 삶을 응원하는 거룩한 영

 

<고린도전서 12장 1-11절>

 

1. 형제자매 여러분, 신령한 은사들에 대하여 여러분이 모르고 지내기를 나는 바라지 않습니다.

2. 알다시피 여러분이 이방 사람일 때에는, 여러분은, 이리저리 끄는 대로,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끌려 다녔습니다.

3.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지만, 섬김을 받으시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6. 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

9.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10.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11.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하시며, 그는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십니다.

 

 

나는 왜 저들과 같아지고 싶어 하는가?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최근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에, 저의 지나온 삶을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84년도에 태어난 저의 동갑내기 친구들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고 다른 부모를 만났으며 각자의 상황에 맞게 돌봄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모두 자기만의 학창 시절을 보내고 신학교라는 곳에서 만났습니다. 신학교에 들어와서도 저들과 나는 다른 관계망 속에서 놀고 공부하기를 반복했고 또 서로 다른 자리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생각뿐만 아니라 신학함과 신앙의 결에 있어서도 다양한 모습과 형태를 갖게 됐습니다. 사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신학을 했던 사람이던 아니든 간에 누구나 비슷한 삶의 과정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다음이었습니다. 전혀 다른 과정의 삶을 살아왔던 내가 나와 같은 과정을 겪지 않은 사람들과 같아지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들과 내가 같지 않음에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주류에 탑승하지 못한 변두리 인생이라는 불안감이 저를 사로잡는 걸 느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한순간이었고 그 고민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고 그 가운데 하나의 질문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나는 왜 저들과 같아지고 싶어 하는가?’였습니다. 

 

고린도전서에 관하여 

 

처음부터 너무 제 이야기를 늘어놔 죄송합니다만, 오늘 본문의 말씀이 마치 요즘의 저에게 주는 메시지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이 이야기하는 근본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오늘 본문은 <고린도전서>입니다. 바울의 이름이 들어간 서신 가운데 고린도전서만큼 바울의 서신이 확실한 서신도 없습니다. 본 서신이 스스로 바울이 저자임을 이야기(고전 1:1; 16:21)하고 있기도 하고 사도행전에 언급된 바울의 고린도 사역과 본 서신에 나타난 고린도 교회의 정황이 일치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본 서신에 사용된 언어나 문체, 중심 사상 등이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도 일치(네이버 라이프 성경사전 검색, <고린도전서-저자>)하는 것을 보았을 때 고린도전서는 바울의 서신임이 확실해 보입니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헬라 최고의 상업도시이자 항구였습니다. 물질적으로 번성하기는 했지만 그만큼 우상 숭배와 도덕적 타락도 만연한 시대였습니다. 이 여파는 교회에까지 미쳤는데 이러한 여파는 그리스도인의 소송, 독신과 결혼, 우상 제물을 먹는 여부, 성만찬의 의미 등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네이버 라이프 성경사전 검색, <고린도전서-목차>). 바울은 이러한 교회 내의 문제를 두고 고민했고 나름의 해결책을 이 서신에 담았던 것입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영

 

이러한 정황 가운데 우리가 함께 읽었던 12장은 교회의 문제들 가운데 서로 간의 다름, 즉 서로 간의 다른 형태를 띠고 있는 은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성령’, 바로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렇기에 12장은 성령의 역할과 그 특성에 관해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 그렇듯이 고린도교회 안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성향과 형태를 지니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짐작해보건대 서로 다른 모양새를 두고 누가 잘 났다 못났다와 같은 이야기가 오고 갔을 거라 여겨집니다. 그 모양새라는 것이 ‘은사’였던 모양입니다. 

 

바울은 이 ‘은사’를 성령의 역할과 특성을 중심으로 설명했습니다. 먼저 3절을 보면 그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에 이끌린 사람들만이 교회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것이고 또 그들이 서로 하나임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8절부터 10절까지 다양한 은사의 역할을 나열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역할들이 있는지 하나씩 읽어가며 확인해 보겠습니다. 

 

1.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해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2.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 

3.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믿음을 주시고, 

4.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5.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시고,

6.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은사를 주시고,

7. 어떤 사람에게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8.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주시고,

9.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이 구절들을 읽다보면 우리는 성령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거룩한 힘이지만 우리에게 똑같은 역할을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하나의 은사 틀에 가둬두고 모두 똑같은 역할을 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11절에서 은사는 성령이 원하는 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이야기하며 사람이 은사의 경중을 따질 수 없음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역할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성령’ 즉 ‘하나님의 영’의 역할은 바로 이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온전히 나 일 수 있도록 하는 힘, 저는 이것이 성령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한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 조금만 둘러보면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아니기에 나와 많은 것이 다릅니다. 같은 것이라고는 ‘하나님’을 ‘주’로 고백한다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서로 다른 우리에게 같은 역할을 주진 않았을 겁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누군가에는 지혜의 말씀을, 누군가에는 지식의 말씀을, 누군가에는 더 큰 믿음의 분량을, 누군가에는 병 고치는 은사를,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 등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런 역할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나와 같지 않은 누군가를, 다시 말해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를 바라는 힘입니다.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인정받고

 

하지만 신앙 공동체를 향한 이러한 관점을 교회 밖으로 넓혀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 안과 밖을 나누는 우리의 시선과 또 나와 다른 입장을 가진 이들을 품을 수 있는 품이 지금보다는 더 넉넉해지지 않겠습니까? 내 생각과 다른 누군가를 틀렸다고 규정하기를 좀 더디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하는 성령의 역할은 우리의 삶 전반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두에도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긴 했습니다만, 거룩한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주체적이고 다양함 속에서 창조하신 그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형태와 방식도 다양하게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이 인정받기 쉽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이렇게 살아가면 어떻겠습니까? 조금 긴장을 놓고 서로의 불안함을 인정하되 우리를 응원하고 기대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이 사실을 믿고 있으면 조금 비틀거려도 괜찮지 않을까요? 다른 이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더라도 혹은 못하더라도 내가 있는 자리가 소중하고 내게 주어진 삶의 역할이 있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면 우리의 마음은 좀 편안해지지 않을까요? 제가 가졌던 질문인 ‘나는 왜 저들과 같아지고 싶어 하는가?’라는 생각에서 조금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교회 안에서 은사의 역할이 다양하듯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모양도 다양합니다. 교회 안의 은사가 경중이 없듯이 우리가 사는 삶의 모양도 경중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향해 누군가와 비교하기를 멈추고 ‘자신의 길을 걸으라.’ 요청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다양함 속에서 살고는 있지만 그 다양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까지 하나님의 뜻이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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