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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마지막 하루를 사십시오

20161127 쓰임교회 주일설교

 

마지막 하루를 사십시오

 

<마태복음 24장 36-44절>

 

36.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이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38.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지냈다.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휩쓸어 가기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1.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2.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너희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집주인이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알고 있으면, 그는 깨어 있어서, 도둑이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44.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는 시각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Lumix gx9 / 20mm]

빛으로 오신 주님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한 달간 평안하셨는지요? 이미 눈치 채신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설교 서두의 문안 인사를 때 주님을 ‘빛’으로 표현하고는 합니다. 제가 주님을 ‘빛’으로 고백하게 된 이유는 지난 시간 저의 일상이 어둠 속을 거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매일 앞이 캄캄하여 길이 보이지 않았는데, 주님을 깊이 묵상하던 가운데 그분을 ‘빛’이라는 표현 안에 담아낼 수 있었고, 그 때부터 설교를 시작할 때 주님을 ‘빛’으로 고백하게 됐습니다. 

 

사실 시편 기자들 같이 주님은 다양하게 고백되거나 표현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 여러 모양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온 삶의 환경이나 처지에 따라 하나님은 다르게 고백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요즘의 대한민국이나 저 먼 국가에 선출된 지도자들의 입장을 볼 때면 더욱 주님을 ‘빛’으로 고백하고 싶어집니다. 왜냐하면 시대가 어두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둠이 짙을수록 작은 빛은 더욱 밝게 빛나는 법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과 저의 마음속에도 또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 가운데에서도 주께서 주신 생명과 정의의 불꽃이 꺼지지 않길 바라봅니다.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오늘은 대림절입니다. 교회력 가운데 가장 긴 절기인 성령강림절이 끝나고 예수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됐습니다. 지난번 한번 말씀 드리긴 했습니다만, 대림의 절기는 교단이나 교회의 사정에 따라 강림절 혹은 대강절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대림절’은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는 의미이고 ‘강림절’은 주님께서 강림 한다 혹은 다가온다는 의미입니다. 쓰임교회는 주님 오심을 기다린다는 의미의 ‘대림절’을 사용하는데, 이는 주님 오심을 능동적인 태도로, 우리의 의지를 활용하자는 의미에서 택하게 됐습니다. 대림절 첫 주를 맞는 오늘 이 시간, 마태복음의 한 구절을 통해 어떻게 우리의 ‘의지’를 주님의 ‘뜻’에 조율해 볼 수 있을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자가 오는 때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마태복음 24장은 예수께서 자신에게 주어진 죽음 혹은 십자가라는 ‘잔’을 마시러 가는 과정 중에 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이야기는 뭔가 당당하며 거침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말과 태도 속에는 어떠한 공포나 두려움도 없어 보이고, 하나님의 정신과 온전히 하나가 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의 태도는 비장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먼저 예수께서는 오늘 본문의 첫머리에서 인자가 올 것을 예견합니다(37). 예수 스스로 본인을 ‘인자’로 여겼는지 아니면 구약의 전통에 따라 ‘인자’를 표현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마태복음을 기록한 저자는 예수를 ‘인자’로 생각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후에 등장하는 예수의 고난, 죽음, 부활의 이 과정이 어떤 새로운 세상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저자 마태에게 있어서 ‘인자가 올 때’는 예수의 재림의 때와 같아 보입니다. 

 

다시 조금 전으로 돌아가 ‘인자가 온다.’는 그 때가 언제일까를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다는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버지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인자가 올 때를 아버지만 아신다는 이 말은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 때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다만 그 때나 지금의 우리에게는 ‘짐작할 수 있는 권한’만 주어졌습니다. 이 말은 노아의 경우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오는 때를 노아의 때와 비교하며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올 때가 노아와 때와 같을 거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방주를 지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홍수가 날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다시 말해 홍수가 나기 바로 직전까지도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을 들며 지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는 본인이 살던 당시의 삶을 또 하나의 예로 드십니다. 두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인자가 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는데, 인자가 오면 하나는 데려가고, 또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고 했습니다. 똑같이 밭에서 일하고 똑같이 맷돌을 갈고 있는데, 누구는 선택받고 누구는 버려진다는 이 말의 의미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인자가 오는 때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때는 오늘이 될 수도 있고 내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주 가까운 미래일 수도 있고 먼 미래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때’를 스스로 판단하고 짐작하여 살아내는 것입니다. 

 

의열단 ‘김원봉’의 무리들

 

혹시 지난 주 무한도전 보셨습니까? 두 주 동안 무한도전에서는 한국의 역사를 힙합과 연결 짓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습니다. (설민석이라는 역사 강사를 통해) 고조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큼직한 사건과 인물을 중심으로 한국역사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중 일제강점기 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저는 잘 몰랐던 한 무리에 대한 소개를 들었습니다. 의열단장인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집단 ‘의열단’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들 무리와 관련된 한 장의 사진을 보여줬는데, 그 사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독립투쟁을 하는 사람들 같지 않게 모두 말끔한 정장을 입고 머리에는 기름을 바르고 있었습니다. 왜 저들은 독립투쟁의 최전선에 있으면서도 항상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나 궁금했습니다. 왜 그러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매일을 오늘 하루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항상 정갈한 마음과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다녔습니다. 미국의 여성기자인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이라는 책에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오늘을 마지막 날로 살았던 의열단원은 언제나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머리를 잘 손질했으며 항상 죽기 전 마지막이라며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_ 님 웨일스 <아리랑> 中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의열단의 운명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들은 내일이 없는 삶을 살았기에 더욱 풍류와 멋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물론 지금의 우리가 이러한 삶의 태도를 흉내 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저분들이 살았던 당시의 절박함이나 긴장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들이 일상을 대하는 태도는 반드시 배울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인자의 때’를 말하며 삶의 자세를 고쳐 앉으라는 그 가르침과 아주 유사해 보입니다. 예수께서는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 알지 못하기에 오늘을 살아내라고 하십니다. 오늘을 마지막이라 여기며 일상에 적극적으로 복무하는 복무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깨어 있으라.’는 말의 다른 표현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마 6:34).”라고 하시며 오지 않을 내일을 기다리기보다 한 날, 하루를 살아내라 하시는데 그것이 참 쉽지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구절을 잘 살아내고 계십니까? 저는 이 말씀이 가장 와 닿지 않을 때가 언제냐면 바로 시험 보기 하루 전날입니다. 아주 강력하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오늘을 성실하고 즐겁게 살아내고 있는 사람이거나 또는 공부를 꾸준히 하고 있는 사람은 자연스레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시험’이라는 제도는 참 좋지 않은 평가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를 생기 있게 살아내라는 요청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예수께서 말씀하신 ‘인자가 오는 때, 인자의 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내일이 그 날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오늘을 살아내야 합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예수 시대의 사람들에게 인자가 온다는 것은 세상의 끝이 온다는 말과 같았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이 도래한다는 것이지요. 마지막의 때가 온다면 우리에게 내일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인자의 때’는 오늘 하루를 생기 있게 살라는 요청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생명이 충만한 삶이 다른 것이겠습니까. 지금 이곳에 계신 분들은 어떤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계신지요? 자녀를 위한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좋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내가 준 생명이라는 선물로 너는 너 자신에게 무엇을 선물했는지 말입니다. 

 

카톨릭 사제였던 브레넌 매닝(Brennan Manning)은 <아바를 사랑한 아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친구야, 네가 천국에 가면 아바께서 너에게 기도를 몇 번이나 했고 영혼을 몇 명이나 구원했는지를 묻지 않으시고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파이타(멕시코 음식)를 맛있게 먹었느냐?" 그분은 네가 열정을 품고 살기를 원하신다. 그분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누리면서 순간의 아름다음 속에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거룩한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보내게 됩니다. 올해 2016년의 대림절은 나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오심은 곧 오늘이 마지막 하루인 듯 살아내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초대임을 잊지 않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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