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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

20161120 쓰임교회 / 새날교회 주일설교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

 

<빌립보서 4장 4-9절>

 

4.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7.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8. 마지막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이면, 이 모든 것을 생각하십시오.

9. 그리고 여러분은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듣고 본 것들을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새날교회 인사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먼저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새날교회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이곳을 책임지며 돌보시는 세 분의 목사님과 선생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빌립보서의 이해

 

오늘은 교회력 절기상 추수감사절입니다. 말 그대로 오늘은 한 해를 돌아보며 먹이시고 입히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시간인 것이지요. 혹시 이곳에 앉아 계신 분들은 문득 떠오르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십니까? 뭐든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망각이라는 선물 때문에 잊어 버리셨을 수도 있고, 아니면 대부분의 순간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마음이 무엇이건 간에 정말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꼈는지 입니다. 내 마음을 알아가는 과정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과정과 정말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빌립보서’입니다. 빌립보서는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바울의 4대 옥중서신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옥중서신’은 감옥에 있는 중에 쓴 편지라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2차 선교 여행 때 빌립보 교회를 설립(행 16:12-40. AD50년경)했는데, 이 빌립보라는 지역은 현재의 그리스와 터기, 바울이 살던 당시로는 로마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교통과 전략의 요충지였습니다. 그럼 당연히 다양한 문물과 문화들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썩 어울리는 비유는 아니겠습니다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보슬보슬 내리는 비를 우습게 여기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홀딱 젖어버린 내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빌립보에 살던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니었겠습니까?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처해있다 보면 당연히 새로운 가치관과 기준들에 물들게 됩니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비유처럼 옛 것을 ‘새 노래’로 불러야 할 때와 ‘새 부대’에 담아야 할 때도 있기 마련이지만 변하지 말아야 할 본질마저 변해버린다면 그것은 바로 잡을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 사도는 빌립보에 있는 교회들을 향해 신앙의 본질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며 성도들의 내면을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빛과 평화로 인도하실 주님의 기쁨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말씀인 빌립보서 4장에서 이러한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4절과 5절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표준새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4-5).” 사실 오늘 본문이 감리교(교회력)에서 추수감사절을 맞아 주어진 말씀 중 하나여서 그런지 몰라도 기뻐하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은 과연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세례 요한의 탄생을 지켜보며 그의 아버지가 요한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는 자신의 아들에게 예수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눅 1:79).” 저의 묵상이 반드시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저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의 의미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됐습니다.  

 

지난 목요일 수능이 있었습니다. 매년 수능을 마치면 시험 성적을 비관한 고3 아이들이나 재수생들의 죽음, 혹은 그들이 받은 좌절이나 상처가 기사화 되곤 했습니다. 저도 매년 그러한 불상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런데 올해 수능이 마치고 나서 가장 많이 기사화된 내용 중 하나가 무엇이냐면 수능을 끝낸 수험생들이 촛불을 들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는 것이었습니다. 현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불신, 하위권의 내신 성적을 받고서도 특혜를 입어 명문대에 입학한 정권 실세로 지목되는 최모씨의 딸의 이야기 등 자신의 자리에서 성실히 삶을 살아가던 학생들 혹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는 삶의 의욕을 앗아 가기에 충분합니다. 너무 불공평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곳에 있는 우리 청소년들도 사회의 부조리나 시대의 아픔 등 많은 것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에 한 발식 더 다가가면 갈수록 시대의 불공평함과 이웃의 아픔, 정의롭지 못한 사회를 많이 경험하게 될 겁니다. 그런 실망감들이 자꾸만 우리 마음과 일상에 쌓이다 보면 우리는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일이 반복된 상황 가운데서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바울의 이야기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사가랴는 예수를 일러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시는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는 분’이라고도 말했습니다. 예수가 살던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힘겹고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혹한 착취와 핍박 속에 빛 없이 살아갔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한 줄기 빛 같은 존재였습니다. 주님은 지금이나 그 때나 우리를 사람답게 하는 ‘사랑의 근원’이셨습니다. 아마 새날교회에 몸담고 있는 우리 학생들도 삶의 아픔을 여럿 경험했을 겁니다. 하지만 어둠이 짙을수록 작은 빛은 더욱 선명해지는 법입니다.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빛으로 오신 주님께서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고 또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와 사회를 바라보는 실망 속에서도 우리가 기뻐할 수 이유인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정의는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란 정직하게 아뢰고 하나님의 헤아림을 기다리는 것이다

 

처음부터 너무 어둡고 무거운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혹시 요즘 우리의 삶을 바라보며 힘겨워하시는 분들이 계실까하여 드리는 말씀이었습니다. 분위기를 전환하여 다음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6-7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6-7).” 

 

여러분, 요즘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사회적인 것 말고 개인적인 일상에 겪는 여러분들의 마음의 상태 말입니다. 많이 지쳐계십니까? 어느 누구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지 않아 슬프십니까? 혹시 옆에 있는 친구나 선생님, 또는 학생이나 가족들이 내 마음을 몰라줘서 서운하진 않으신지요? 사실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때가 있지만,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사람에게 의지하자니 저 사람이 도대체 내 마음을 알아차려주지 않습니다. 특히 사랑이나 연애를 할 때 자주 느끼곤 합니다. 

 

흥미로운 질문 한 가지를 더 드려볼까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정말 본인이 원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가요? 방금 읽어 드렸던 빌립보서 6-7절을 보다보니 ‘기도’가 혹시 이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자신이 바라는 것과 또 기도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시는 ‘기도’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우리가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요? 바울의 이야기를 통해 기도에 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기도란 나의 바람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이고, 가감 없이 다시 말해 나의 생각을 더하거나 빼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만 정작 그분 앞에 설 때나 기도할 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잘 드러내지 못합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체험을 일러 이렇게 표현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내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체험, 나의 모습 그대로 온전히 수용되는 경험을 하나님의 체험이라고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사실 하나님은 그런 분 맞죠. 그런데 정작 하나님 앞에 우리가 정직하고 솔직하지 못합니다. 연애 중에 연인에게 어떤 불편한 마음을 계속 숨겨두고 아닌척하며 지내는 게 얼마나 힘듭니까? 사람은 내 마음 다 이해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그런 분 아니시잖아요. 가끔 보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조잔한(좀스러운) 양반으로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조금 전의 이럴 때가 그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개념은 우리의 사랑 개념과 달라요.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 말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고,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면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게 될까요? 7절의 말씀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죠.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준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 모든 것을 정직하게 쏟아 놓은 후, 진짜 내가 바라는 나의 마음을 하나님과 함께 알아차리는 것, 이것이 기도입니다. 이것이 기도이자 치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마음을 속 시원하게 하나님께 털어놓는 일과 그러고 나서 하나님 앞에 잠잠히, 고요히 머무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뭔가 막 쏟아 놓기만 하고, 하나님 저 갈게요, 안녕! 이렇게 하면 좀 곤란하고 하나님의 평화가 내 마음에 깃털처럼 가라앉을 때까지 머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또 단숨에 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많은 부분에 훈련과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의 소중함

 

마지막 8절의 말씀입니다. 읽어 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이면, 이 모든 것을 생각하십시오(8).” 마지막 이 말씀을 두고 씨름을 좀 했습니다. 바울은 왜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라고 했을까, 고민하게 됐습니다.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순결한 것, 사랑스러운 것 등등 가만히 지켜보니 이러한 것들의 공통점이 하나 보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냐면 이러한 것들은 눈에 보이는 않는 것들이고 우리가 직접 살아내기 전에는 증명되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몇 가지는 나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것들이고, 또 다른 몇 가지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만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바울은 교통과 전략의 요충지이자 다양한 문물의 흡수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하나님은 돈과 물질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고 또 돈과 물질보다 우리 개개인의 삶에 집중하고 계심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이 한 모든 이야기를 마치며 본인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듣고 본 것들을 실천하고 그리한다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할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세 가지 기쁨

 

지금 이곳에 모인 분들은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날, ‘새날’을 만들어갈 위대한 분들입니다. 그리고 이미 새날을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를 지니고 있기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많은 유혹과 시련과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는데 우리라고 특별할 게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한 지난 일들과 과거가 비록 어둡다 하여도 또 앞으로 맞이할 삶이 우리 눈에 어두워 보인다 하여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빛이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이 땅에 평화의 길을 만들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주어지는 기쁨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아주 가까워지기 원한다는 사실 또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작은 바람과 마음의 소원까지 알기 원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친구와의 관계도 친해지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듯이 하나님과의 관계 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계시기에 내가 먼저 그분께 한 발자국 다가갈 때 엄청난 기쁨으로 여러분들을 맞아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관심은 늘 사람에게로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분의 책 중에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가 늘 바라봐야 하는 것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길은 사람에게로 향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끊임없는 입시경쟁, 성공, 발전과 같이 보이지 않는 신기루만을 쫓아가자고 자꾸만 부추깁니다. 말 그대로 신기루입니다. 오르고 또 올라보면 그곳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함께 살자, 더불어 살자고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친밀감 속에 솟아나는 진정한 감사

 

추수감사절을 맞아 이렇게 좋은 친구들과 또 좋은 분들과 만난 자리에 너무 무거운 얘기만 한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정말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들 때가 언제냐면 누가 시켜서할 때보다 내 마음에 기쁨이 가득 찰 때 더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하나님은 강요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친밀해지길 원하시고 또 그 친밀함 갖고 세상의 아픔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쁨이자 감사의 제목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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