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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사랑으로 나아가는 첫걸음

20170910 쓰임교회 주일설교

 

사랑으로 나아가는 첫걸음

 

<로마서 13장 8-10절>

 

8.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9.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10.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Lumix gx9 / 20mm]

가을은 사랑하기 좋은 때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 왔습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차가운 겨울이 오기 전인 바로 이 때가 사랑하기 가장 좋은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이 무슨 계절을 타는가 의아해 하는 분들이 계실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랑과 관련하여 가을이 가진 의미를 이렇게 생각해봤습니다. 사랑하고 싶은 대상을 향한 마음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을 때가 가장 사랑하기 좋은 시간대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시간’을 ‘온도’로 바꿔 봐도 무관해 보입니다. 

 

물론 방금 제가 말씀드린 사랑의 방식은 머리와 연관이 있습니다. 머리는 곧 이성(理性)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가을은 사랑의 개념에 관해 머리로 고민해 보는 시기입니다. 그럼 언제 가을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언제 사랑의 개념을 이성으로 고민해 볼 수 있는 걸까요? 우리가 사랑의 한복판에 있을 때 혹은 사랑이 진행 중일 때 이 사실을 알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개념화하기 전에 이미 그 개념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개념과 하나가 된 상태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사랑이 지나가고 나서, 사랑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지나가고 나서야 우리는 사랑의 개념에 관해 재고해 볼 수 있습니다. 흥분되고 격양되어 있거나 어딘가에 치우쳐 있을 때 우리는 바로 보기 어렵습니다. 이렇듯 사랑을 가을의 관점으로 본다는 말은 현재 사랑이라는 바다에 빠져있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타자를 향한 사랑의 어려움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율법을 중요시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습니다. 정확한 지시가 명시된 ‘율법’과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인 ‘사랑.’ 바울은 이 상호대립적인 개념을 하나로 묶으며 율법이 나아가야 할 길은 곧 사랑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첫 구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바울은 사랑의 빚 외에 어느 빚도 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구약의 율법을 모두 이룬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율법 조항도 정말 많고 성경에 다 담지 못한 유대인들의 율법도 수백 개가 된다고 하는데 단 하나의 사랑으로 이 모든 율법을 다 이룬 것이라고 바울을 말하고 있습니다. 남을 향한 사랑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이 길래 그는 이런 말을 하는 걸까요? 

 

이어서 바울은 한 번 더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는데, 그는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의 중요성에 대해 바울은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왜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한 사랑을 가장 위대한 사랑, 율법을 다 이룬 사랑이라고 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그것을 실행에 옮겨본 사람만이 잘 알 수 있습니다. 왜 그 사랑이 대단한 것일까요? 바로 타자를 향한 사랑이 정말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라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책을 보면 함께 사는 것의 어려움에 관해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해당 글귀를 들려드리겠습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을 존경하고 받아들이며,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성급히 끌어당기지 않고 그에게 충분한 여백을 제공하여 그가 자유롭게 자기의 생각과 행동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페터 제발트, <사랑하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 p.185)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을 존경하고,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성급히 끌어당기지 않고 여백을 제공하는 것,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을 존경하기 어렵고,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성급하게 끌어당기는 게 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바를 갖고 있습니다. 본인이 알아차리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롤랑 바르트는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관해 이야기 했는데요. 그는 내가 원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욕망’이라고 말하며, 사랑의 대상은 단지 그 ‘도구’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p55) 사람이 늘 원하는 것은 결국 상대를 통해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시도이고 사랑은 이것을 극복하는 시도이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너 좋을 대로 하는 사랑

 

그런데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의 개념은 참 난해한데 바울은 그런 우리에게 사랑에 관해 힌트 하나를 줍니다. 율법을 완성시키는 그 사랑이 무엇이냐면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 아닌 것을 줄 때가 많습니다. 작가 한상봉은 우리가 행했던 그러한 방식의 사랑에 관해 이렇게 풀어 설명합니다. 

 

“충혈 된 눈은 '미친 사랑'이다. 그 안에 안식이 없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눈매로 품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을 가두고 상대방에게 집착하는 사랑이다. 사랑이 자유를 주지 못할 때, 그 사람은 내 눈 속에 맑은 모습 그대로 맺혀 있지 못한다. 정말로 사랑하는 이들은 충혈 된 눈을 풀어주기 마련이다. 절망하고 슬픔에 젖어 있는 붉은 눈망울을 가라앉히고 맑은 눈물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고 품어준다. 열정이 지나치면 원망이 생기고, 원망을 삭히지 못하면 상대방을 파괴하고 결국 자신도 파괴하는 걸 우리는 많이 봐왔다. 그래서 조금은 연약해 보이는 사랑이 필요한 법이다. "내가 널 지켜 줄게" 하는 강인한 사랑보다는 지켜보는 지긋한 눈길과 자상하게 돌보는 마음이 더 소중한 시절이다. 그 사람들은 적어도 '사랑 때문에' 남을 다치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한상봉, <너에게 가고 싶다>, p.23) 

 

율법을 완성시키는 ‘사랑’은 곧 나 좋을 대로가 아니라 너 좋을 대로 하는 사랑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대체 그 사랑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가능하긴 한 것일까요? 

 

우리의 의지와 그분의 도움으로 가능한 사랑

 

저는 한 권의 책에서 그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그 방법부터 이야기하자면 바로 ‘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태도를 갖기 위해 ‘애씀(노력)’이 필요합니다. 서두에도 인용한 책 <사랑하라 하고 싶은 것을 하라>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1. 먼저 들으려 애써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과 주위의 풍랑을 잠잠하게 하는 것이 우선 필요합니다. 책에 등장한 존이라는 신부의 말입니다. "마음의 귀로 듣고 그것을 심화시키세요.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천하세요. 하지만 이 일을 위해서는 고요함이 필요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듯이, 하느님은 강하고 거센 폭풍이 아니라 고요하고 부드러운 바람의 속삭임으로 우리를 찾아 오시니까요." (페터 제발트, <사랑하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 p98) 마음의 풍랑이 잔잔해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흥분이 가라앉고 나서야 이해하게 되는 경우를 자주 경험했습니다. 

 

2. 두 번째로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이야기로 들려주거나 눈앞에서 소리 내어 읽어주는 말은 눈으로 묵묵히 읽는 글과는 전혀 다른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듣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말에서 배울 자세, 그의 말을 선물로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위의 책, p101)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건 곧 주님의 음성을 경청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 앞의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세 번째는 사랑에는 위기를 넘어서는 끈질긴 노력이 필요합니다. “달콤한 사랑의 밀월 기간이 지나고 조금씩 불협화음이 일다가 어느 순간 차가운 기운이 방 안에 감돌 때, 그래도 서로 존중하고 갈등을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눈에 뛰게 사라져가고 있다.” (위의 책, p188) 이와 비슷한 글귀가 하나 더 있습니다. 들려드리겠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가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 나가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시작되는 그 순간의 황홀감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지속되는 하나의 구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끈덕지게 이어지는 일종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모험적인 측면은 사랑에 필요한 것이겠지만, 한편,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끈덕짐을 덜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하여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사랑에 대한 커다란 왜곡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그런 사랑일 것입니다.”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p.43) 사랑은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하여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사랑에 대한 커다란 왜곡인 것입니다. 사랑은 위기를 넘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실 제가 말씀 드린 위 세 가지는 태도에 관한 것, 노력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고는 될 수 있을지언정 너무 어렵거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주님께 어떤 도움을 구해야 할까요? 오늘 설교의 마지막은 다음의 이야기로 마칠까 합니다.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떤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게다가 하느님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지 않는가. 하지만 그분의 도우심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은 많다. 어떤 때는 작은 손짓으로, 어떤 때는 책으로, 또는 어떤 말을 통해서 도움의 손길이 찾아온다. 더러는 우리가 경험하는 특정한 고통과 고난이 그 통로가 되기도 한다. 결코 우연이라 볼 수 없는 섭리가 신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고, 그것이 우리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관계의 존재인 인간은 오직 다른 사람을 통해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계발하며 참된 자기를 찾을 수 있다.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하느님은 인간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오신다. 이는 신성한 원칙과도 같다. 그러므로 우리의 길, 삶의 의미, 삶 전체의 과제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드러난다.” (위의 책, p.216-217)

 

경계선을 허물고 일상의 모든 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또 그분의 도움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율법을 넘어선 사랑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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