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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용서에 담긴 하나님의 뜻

20170917 쓰임교회 주일설교

 

용서에 담긴 하나님의 뜻

 

<마태복음 18장 21-35절>

 

21.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22.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마치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과 같다.

24. 왕이 셈을 가리기 시작하니, 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는 빚을 갚을 돈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그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랬더니 종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하고 애원하였다.

27. 주인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서, 그를 놓아주고, 빚을 없애 주었다.

28.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자, 붙들어서 멱살을 잡고 말하기를 '내게 빚진 것을 갚아라' 하였다.

29. 그 동료는 엎드려 간청하였다.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 하지 않고, 가서 그 동료를 감옥에 집어넣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하였다.

31.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딱하게 여겨서, 가서 주인에게 그 일을 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애원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다 없애 주었다.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34. 주인이 노하여, 그를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하였다.

35.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제주, <여행가게>

성경 앞에 당당히 서는 태도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마태복음의 말씀입니다. 아마 여러분께서 자주 듣고 자주 읽었던 말씀일 텐데요. 마태복음 내용의 흐름상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시던 때의 일입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누군가를 용서해 본적 있으십니까? 아니면 지금 용서할 수 없는 그 누군가 있으십니까? 누군가를 용서하려고 노력해본 분이시라면 용서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아실 겁니다. 나에게 손해를 입힌 누군가를 용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들여다봤을 때, 성경은 너무 가볍게 ‘용서’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용서’가 굉장히 쉬운 일인 양 느껴지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기분입니다.  

 

성경을 볼 때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태도가 있습니다. 때론 믿어지지 않는 말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 있을 때 물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론 의문을 갖고 말씀 앞에 당당히 맞설 필요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중요한데, 왜 우리가 때론 말씀에 의문을 갖고 맞설 필요가 있냐하면 믿지 않기 위함이 아니라 더 잘 믿기 위해서입니다. 무슨 말인가 싶으시죠? 어쩌면 어떤 말씀에 관해 무조건적인 수용, 무조건적인 받아들임은 애정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두가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누군가에 관해 실망을 한다는 건 그 사람에 대한 기대가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군가에 관해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습니다. 테레사 수녀께서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다.’라고 했던 말도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증오도 생기는 법입니다. 정말 사랑하지 않는 자는 상대에게 아예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나 믿음에 관해 정말 좋지 못한 태도는 오히려 믿어지지 않아 믿지 못하는 것보다 관심 없이 그냥 믿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봐야합니다. 정말 참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빚을 탕감 받은 만 달란트 빚진 자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과연 ‘용서’는 무엇이며, 주님께서는 왜 ‘용서함’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셨고 또 ‘용서’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함께 고민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21절부터이지만 23절부터 먼저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22절과 23절 내용의 흐름이 딱히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1-22절은 후반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23절의 말씀은 예수께서 베드로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질문에 ‘용서’에 관한 한 에피소드를 들려주십니다.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는 마치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는 어떤 왕과 같다며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어떤 나라의 왕이 종들을 불러들여 자신이 빌려준 돈을 돌려받으려고 했습니다. 왕이 여러 사람을 두고 정산을 하던 중 만 달란트를 빚진 종의 순서가 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화폐척도에 따르면 당시 노동자의 1년 연봉이 약  6,000드라크마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6,000드라크마가 곧 1달란트라고 합니다. 이 화폐척도에 따르면 만 달란트는 사실 엄청 큰돈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 달란트를 빚졌다는 말은 갚을 수 없는 돈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왕 앞에 불려온 종은 자신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그 돈을 다 값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25절에서 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빚을 갚을 돈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그 아내와 자녀들과 그밖에 그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갚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말은 곧 무슨 말입니까? 자신과 자신이 관계 맺은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서 지워지게 된다는 말의 다름 아닙니다. 종은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라고 애원하게 됩니다. 그러자 주인은 종을 가엾게 여겨, 그를 놓아주고, 빚을 탕감해 줍니다. 어찌 보면 좀 당황스러운 이야기 전개 같지만 어쨌든 주인은 종의 상황과 그의 진심을 고려하여 빚을 탕감해 줍니다.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못한 자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합니다. 빚을 탕감 받은 그 종은 밖으로 나가서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납니다. 그는 빚진 동료를 만나자마자 멱살을 잡고 자신에게 빚진 것을 모두 갚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동료는 왕 앞에 섰던 본인과 마찬가지로 자신 앞에 엎드려 “참아주게. 내가 다 갚겠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과 달리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그 동료를 감옥에 가둔 채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했습니다. 로마의 화폐였던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나 군인의 하루 품삯에 해당(마20:13) 됐습니다. 백 데나리온이면 한 노동자의 세 달치 정도의 임금이었을 텐데, 한 평생 진 빚을 한순간에 탕감 받았던 그는 노동자의 세 달치 임금을 빚진 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사실 사람이 다 비슷합니다. 만 달란트 빚 탕감 받은 자를 함부로 욕할 수 없는 건 우리도 이런 실수를 자주 범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주위에 있던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았고 이를 매우 딱히 여겨 주인에게 그 일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다시 종을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애원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다 없애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난 주인은 백 데나리온 빚졌던 자가 처한 상황과 동일하게, 그를 형무소 관리인에게 넘겨주었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이야기를 마치며 우리가 자주 듣고 또 읽었던 말씀으로 마무리를 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주의 도움이 필요한 용서

 

예수께서 오늘 본문 마지막에 하신 말씀과 또 ‘빚 탕감 자의 이야기’는 우리를 우리가 서두에 던졌던 질문 앞에 다시 서게 만듭니다. ‘용서’는 쉽지 않은 일인데, 그럼 오늘의 본문은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을 행하라고 했는지 또 왜 이러한 것이 곧 ‘하늘나라’의 삶이라고 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용서’는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인가? 다시 말해 ‘용서’는 우리에게 속한 문제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 속한 문제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군가를 용서하고자 했을 때 ‘용서’가 잘 되십니까? 혹시 그것이 가능했다면 어떻게 가능하셨습니까? 

 

예수께서 하신 비유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동일한 상황에서 ‘용서’ 해야 하는 입장에 놓였던 두 명의 인물이 나옵니다. 그들이 누구였습니까? 왕(주인)과 종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잘 헤아려 빚을 탕감해준 사람은 왕(주인)이었습니다. 결국 같은 비유에서 ‘종’은 자신의 동료의 곤경을 잘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은혜를 입은 자였음에도 말입니다. 이 부분을 두고 고민이 좀 됐습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이 비유를 통해 무엇을 전하고 싶었던 걸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들었던 생각은 ‘용서’는 우리의 영역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하실 영역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하나님과 함께 해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에서 왕 혹은 주인은 곧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셨고 종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람은 용서에 실패합니다. 물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용서’가 하나님의 영역이라 하여 우리의 역할이 없어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결국 용서를 해야 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지만 그 일에는 반드시 주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다르게 표현해 본다면, 주님과 함께 누군가를 용서해야 한다는 말은 곧 자기 자신의 의지를 죽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이 됩니다. 사실 이러한 원리는 ‘신앙생활’의 본질에도 적용이 가능합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후반부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평생의 과업으로 삼아야 할 ‘용서’

 

그런데 우리는 용서가 어렵다는 것을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설교 서두에 21-22절을 건너뛰었었는데요. 바로 이 구절에 저는 용서하는 것의 어려움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이렇게 물었지요. 그러자 예수께서는 뭐라고 답하십니까?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 그럼 여기서 또 계산하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일흔 번을 일곱 번 용서한다는 말은 몇 번을 용서하라는 말합니까? 칠십 번씩 일곱 번이면 총 490번을 말합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살아가며 딱 490번 용서하고 나서 491번부터는 용서하지 않겠다! 물론 그런 말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 알고 계실 겁니다. 

 

이 말은 용서하되 평생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나타냅니다. ‘용서하는 일’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으라는 말일 것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처럼 누군가로부터 받은 피해를 없던 일로 여기는 건 단숨에 될 수 없기에 반드시 ‘시간’ 혹은 ‘과정’을 경유해야 합니다. ‘시간성’을 필요로 한다는 말인 것이지요. 이러한 원리도 ‘신앙’을 대하는 태도와 맞닿아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용서인가?

 

그런데 우리는 한번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용서’는 과연 누구를 위해 하는 걸까?’, ‘용서는 누구 좋으라고 하는 거지?’ 우리는 쉽게 ‘용서’는 상대를 위해 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용서하지 않아서 가장 힘든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입니다. 

 

이미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용서하지 못해 가장 힘든 건 바로 ‘나 자신’입니다. 잘못과 실수를 한 사람은 편히 발 뻗고 자는데 그로부터 피해를 받은 나는 분을 삭이지 못해 밤잠을 설칩니다. 더구나 잘못한 자가 사과의 뜻까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상황에서 받는 피해는 고스란히 나의 몫인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께서 빚 탕감 받은 자의 비유를 통해 하고자 하신 말씀은 용서를 통해 스스로를 살려내기 위함 아니겠습니까? 결국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줌으로 내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도 제대로 살기 위함입니다. 나도 모른 채 분노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이에게 자유함을 선물로 주기 위한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의 바람을 잘 감싸주는 기도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본문은 ‘용서’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신앙생활의 본질’ 몇 가지를 드러냅니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신 예화를 보면 왕으로 표현된 주님께서는 용서를 하셨고 종으로 표현된 우리 사람은 실패를 했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 결국 용서를 해야 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지만, 그 일에는 반드시 주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이 말은 ‘자신의 의지(자아)’를 줄이는 과정이라고도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자신의 의지를 끊임없이 꺾고 내 삶을 통해 주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중요한 건 자신의 의지를 자꾸만 꺾어야 하는데, 이것은 억지로 누르거나 모른 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욕망은 저항하는 힘이 있어 억압된 것은 반드시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를 꺾는 방법은 있는 그대로의 바람(소원)을 알아주고 잘 감싸줘야 합니다. 기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나의 감정, 생각, 바람 등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주님 앞에 드러내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숨김없이 마음을 드러내놓고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부드럽고 섬세한 주님의 손길을 경험할 때라야 자신의 의지를 꺾어 낼 수 있습니다. 꺾는다는 표현보다는 흘려보낸다는 말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이렇듯 신앙생활은 주님의 도움, 주님의 따스한 손길이 없으면 지속하기 힘듭니다. 우리 삶 가운데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일들도 있는 법입니다. 

 

‘시간성’을 갖는 신앙생활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신앙의 본질’은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 속에 힌트가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용서하는 일’은 평생의 과업으로 삼으라는 말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베드로에 하신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조금 어려운 말이지만, 신앙은 ‘시간성’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몸에는 원래의 모습으로 자꾸만 돌아가려는 관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어도 내일 그 일을 똑같이 할 거란 보장이 없습니다. 물론 반대의 입장도 가능하겠지요. 성경은 이를 두고 죄의 관성이라고도 합니다만 어찌됐든 우리는 끊임없이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앙생활과 함께 가야하는 것은 바로 ‘훈련’입니다. 시간성을 갖는다는 말은 곧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라는 학자는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존경하는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께서는 신앙생활은 ‘고백과 삶 사이의 거리를 좁혀가는 과정’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렇죠.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한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그 ‘고백’을, 우리의 삶으로 드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하는 것입니다. 단숨에 되는 일은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평생을 두고 해야 하는 작업인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 말씀을 통해 ‘용서’에 관해 나눴습니다. 용서하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주님께서는 그 어려움을 모른 채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그저 강요하는 분이 아닙니다. 어떠한 어려움이든 공감하고 충분히 이해해 주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함께 보았듯이 ‘용서’라고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데, 주님께서는 이 ‘용서’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길 바라는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삶의 모든 부분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길 원하십니다. 또 모든 일에 인내를 가지라고 응원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당신 앞에 솔직한 것입니다.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당신 앞에 나오길 언제나 원하십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하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께 주님의 도우심이 함께하길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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