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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불평등한 하나님의 평등

20170924 쓰임교회 주일설교

 

불평등한 하나님의 평등

 

<마태복음 20장 1-16절>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2. 그는 품삯을 하루에 한 데나리온으로 일꾼들과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원으로 보냈다.

3. 그리고서 아홉 시쯤에 나가서 보니, 사람들이 장터에 빈둥거리며 서 있었다.

4. 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도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시오. 적당한 품삯을 주겠소' 하였다.

5. 그래서 그들이 일을 하러 떠났다. 주인이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 나가서 그렇게 하였다.

6. 오후 다섯 시쯤에 주인이 또 나가 보니, 아직도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왜 당신들은 온종일 이렇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소?' 하고 물었다.

7.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기를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신들도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이 되니, 포도원 주인이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기를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품삯을 치르시오' 하였다.

9.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을 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10. 그런데 맨 처음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은근히 좀 더 받으려니 하고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11. 그들은 받고 나서,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12.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였습니다.'

13. 그러자 주인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보시오, 나는 당신을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시오. 당신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 하였다.

16.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

 

 

새롭고 낯선 시도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여러분께서는 최근 어떤 새로운 시도들을 해보셨습니까? 아니면 일상을 벗어나 좀 낯선 곳에 가보신 기억이 있으십니까?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상황을 잘 보기 위해서라도 새롭고 낯선 어떤 시도들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등장한 것처럼 그것을 ‘떠남’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합니다. 

 

매우 이른 시간에 만난 일꾼들

 

오랜만에 만난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마태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하늘나라가 어떤 곳인지 설명하시며 하나의 비유를 드십니다.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포도원 주인과 일꾼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비유를 통해 하늘나라,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는 과연 어떤 곳일지 이야기 속에서 힌트를 얻어 보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는 먼저 이렇게 말씀하시죠.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원에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포도원 주인은 오늘 하루 자신의 농장에서 일할 일꾼을 찾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그가 요즘처럼 인력사무소에서 일꾼들을 만났는지 알 순 없지만 그는 일꾼들을 만나 하루 품삯을 계약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원으로 안내했습니다. 주인과 일꾼들이 한 합의는 무엇이었냐면, 하루의 일을 하고 그 대가로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주인이 방금 만난 일꾼들은 오전 9시 전에 만났던 일꾼이었나 봅니다. 왜냐하면 3절을 보면 주인이 그 다음 일꾼들을 만난 시간이 아홉 시쯤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가장 먼저 포도원에 일하러 간 일꾼들은 오전 9시가 되기도 전, 다시 말해 매우 이른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두 한 데나리온을 받다. 

 

첫 번째 일꾼들이 일을 하는 중에 주인은 차례로 몇 명의 일꾼을 더 만납니다. 먼저 오전 9시쯤 몇 명의 일꾼을 만났고 그 후로도 열 두 시에 몇 명, 오후 세 시에 몇 명의 일꾼을 더 만났습니다. 그리고 요즘의 노동시간 기준으로 본다면 9시나 9시 이전에 출근한 사람이 곧 퇴근할 시간인 오후 5시에도 주인은 일꾼을 불러 포도원에서 일을 하도록 시킵니다. 여기까지는 이상할 것 없이 모두가 그러려니 하고 지켜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주인의 행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제 오늘 일한 대가를 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 관리인을 불러 가장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 이르기까지 품삯을 나눠주라 했습니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럼 우리가 가장 먼저 포도원에 도착한 일꾼이었다면, 그 순간 어떤 생각을 했을지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9시나 열 두 시 혹은 세 시에 온 사람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적어도 다섯 시에 온 일꾼보다는 많은 돈을 받을 거란 생각을 할 겁니다. 사람이라면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죠. 그런데 일꾼들은 시간에 상관없이 모두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됩니다. 누가 봐도 억울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일한 양이나 시간을 따져보면 당연히 화가 나고 억울한 순간이 맞습니다. 

 

확장된 예수의 비유

 

그런데 오히려 주인은 뭐라고 합니까? 어떤 근거를 들어 억울해 하는 ‘일찍 온 일꾼들’을 나무랐습니까? 이렇게 말하죠. “이보시오, 나는 당신을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받아가지고 돌아가시오. 당신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그러니까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주인은 처음 합의했던 그 계약을 근거로 모두에게 준 품삯이 계약에 어긋나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일찍 온 사람들은 억울하긴 하지만 주인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상황을 글로 접해서 감정이입이 어려울 수 있지만 실제로 저런 상황에 놓이면 정말 억울할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는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하신 이 하늘나라의 비유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를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무엇을 말하고 싶으셨던 것일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약 올리려고 하신 건 아닐 텐데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역시 중요해 보입니다. 함께 읽은 본문 마지막 절은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은 신앙생활의 차원에서 ‘구원받음’은 순서가 없음을 나타내는 비유라고 할 수도 있지만, 오늘 이 시간에는 이 예화를 좀 확장시켜 생각해 보면 좋을 듯합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이름 붙여 봤습니다. 말을 좀 꼬아봤습니다. ‘불평등한 하나님의 평등’ 이렇게 이름 붙여 봤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 할 수 없었던 사람들

 

오늘 우리는 주인이 일꾼을 만났던 상황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일단 주인이 가장 먼저 만난 일꾼들은 어떠한 루트로 만나게 되었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추측해 보건데, 아마 그들은 적어도 ‘정보’를 들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이른 아침 몇 시에 어디에 모여 있으면 포도원 주인이 와서 자신들을 일용직으로 사용할 것을 알았던 모양입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첫 번째 일꾼들을 어렵지 않게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아홉시 이후에 만난 일꾼들입니다. 주인은 첫 번째로 만난 일꾼들에게 포도원일을 맡기고 장터로 나섰습니다. 그가 사람을 더 필요로 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볼일 때문에 장터로 나섰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장터에서 빈둥거리며 서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포도원으로 가 품삯을 줄 테니 일을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들은 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장터에 나와 있었던 것일까요? 아홉 시와 열 두 시, 세 시에 포도원 주인과 마주친 일꾼들을 통해서는 그들이 장터에 나온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7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포도원 주인과 다섯 시에 만난 일꾼들은 이렇게 말하죠.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정당한 노동을 할 수 없었던 이유로 당시의 사회적인 정황이나 그 구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가 살던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정당한 계약조건을 갖고 일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은 정말 몇 없었을 것입니다. 저희는 그 소수의 몇 사람을 아홉 시 이전에 주인과 만난 사람들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그 ‘수’까지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아마 주인이 아홉 시 이후 장터에서 만난 사람들의 수가 훨씬 많았던 것 같습니다. 주인이 사람들을 만난 ‘시간’의 배열이 그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주인은 뭔가 이상하다고 여겨, 장터에서 사람을 몇 시에 만나건 상관없이 그들을 자신의 포도원으로 불러들여 정당한 계약을 맺고 일을 시킵니다. 그리고 우리가 조금 전에 다뤘듯이, 주인은 그들이 일을 시작한 시간에 상관없이 동일한 급여인 ‘한 데나리온’씩을 주게 됩니다. 

 

개인의 구원과 시대의 아픔은 함께 간다. 

 

가장 먼저 온 일꾼들은 억울할 수도 있지만 주인은 계약 조건을 앞세워 그들의 불만은 잠재웁니다. 지혜롭고 현명했던 주인은 당시 시대의 분위기와 불합리한 상황을 읽어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더 많이 받지 않아 억울한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부조리한 사회적 구조로 기회를 갖지 못한 자들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주인은 모두가 보지 못한 사회의 어두운 면, 그 이면을 보아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수 있습니다. ‘나중 된 자가 처음 되고, 처음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이 말은 ‘신앙’과 ‘구원’에만 적용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도 생각해 봐야합니다. 개인의 구원문제와 시대의 문제, 사회의 불공평한 문제는 결코 다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개인과 사회는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틀 안에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1성서인 ‘구약’과 제2성서인 ‘신약’을 각 한 마디의 말로 정의내릴 수 있는 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제1성서는 ‘떠나라’이고 제2성서는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의 맥락에 적용해 본다면 어떻게 됩니까? ‘구약’이 하는 말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고향’이라는 익숙함으로부터 떠나서 자신을 자꾸 낯선 곳에 둘 때 진짜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바로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신약’은 예수의 삶과 그의 가르침을 일상 속에서 따를 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 참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이야기를 이렇게 적용해 볼 수도 있는 것이죠. ‘구약’은 나 자신과 하나님의 올바른 관계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알려주는 책이고, ‘신약’은 예수를 따름으로 시대에서 소외되고 아픔 가운데 있는 이들을 사랑하라 알려주는 책을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 두 권이 합쳐진 성경에서 진리를 발견하기위해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의 구원과 시대의 아픔을 반영하는 성경의 두 흐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 아닐까요? 사실 시간만 허락된다면 ‘구약’ 안에서도 당시 부조리했던 이스라엘 사회를 확인할 수도 있을 테고, ‘신약’ 안에서도 하나님과 나 자신의 관계에 그 초점을 맞춰 살펴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오늘은 이 정도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기회의 균등, 균등한 부의 분배

 

아무튼 오늘 마태복음의 비유가 ‘개인이 구원문제’ 뿐만 아니라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를 나타낸다는 말을 하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존 도미닉 크로산이라는 (역사적 예수 연구) 기독교 학자는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성경이 끊임없이 강조하는 이야기는 차별 없이 균등하게 부가 분배되는 것이고 또 공의가 회복되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문제는 항상 분배 정의와 회복적 공의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전통은 극한적인 가난을 때로는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예를 들어, 출애굽 기간 동안), 극한적인 불평등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존 도미닉 크로산,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한국기독교연구소, p32) 

 

이 말이 오늘 본문과 아주 잘 맞아 떨어진다고 봅니다. 포도원 주인은 사람들이 가난할 순 있어도 그들에게 기회가 균등하게 돌아가지 않는 근원적인 불평등은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만난 시간이 언제인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불평등한 하나님의 평등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평등’이 우리 입장에선 ‘불평등’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거나 또는 일상을 살아가다가 너나 할 것 없이 다 고생하는데, 나보다 저 사람이 더 많은 몫을 받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또는 내가 혹은 우리 자녀가 남들보다 뭔가 더 일찍 시작한 게 있는데, 더 늦게 시작한 사람의 결과가 더 좋게 나오는 걸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마다 우리의 시선을 자꾸 하나님께 돌려 내가 받을 몫을 충분히 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뭔가를 시작할 수 있는 내적인 동기 또는 건강한 몸 등과 같은 데서 받은 몫을 우리는 잊을 때가 많습니다. 특히 부(돈, 재산 등)와 관련된 문제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내가 서 있는 기준에서 한쪽을 쳐다보면 나보다 더 가진 사람이 있고 또 그 반대쪽을 보면 덜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어느 기준점으로 옮겨도 반복되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결국 사람의 욕망이 문제인데, 하나님을 삶의 기준삼아 그것을 잘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한 장면의 그림을 묘사를 하고 마칠까 합니다. 세 명의 사람이 담장 너머 운동경기를 관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의 키가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가장 키가 큰 한 사람은 아무 도움 없이도 담장 너머 운동경기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그 옆의 한 사람은 방금 사람보다 키는 작지만 받침대 하나만 있으면 담장 너머 운동경기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키가 가장 작은데, 그는 받침대 하나를 받아도 담장 너머의 경기를 볼 수 없습니다. 받침대가 딱 두 개만 있으면 경기를 볼 수 있을 상황입니다. 기본적인 그림의 설정은 이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일반적인 평등’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 세 사람 모두에게 받침대를 하나씩 주어야 마땅합니다. 어느 누구하나 소외되는 사람 없이 받침대를 하나씩 주는 것입니다. 이게 일반적인 상식의 평등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본문을 통해 본 ‘하나님의 평등’은 무엇입니까? 받침대가 하나만 필요했던 사람은 일반적인 기준에 맞게 받침대 하나를 받습니다. 그런데 가장 키가 작았던 사람은 가장 키 큰 사람에게 가야 할 받침대를 포함해 두 개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키 작은 사람은 일반적인 평등 기준의 몫을 받아서는 운동경기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받침대를 하나만 받는 것은 하나도 받지 않는 것과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을 혹자는 ‘정의’를 이루는 방식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하나님께 있어서 ‘정의’는 ‘불평등한 정의’가 맞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고자 함은 하나님이 보는 시각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기 위함입니다. 조금 더디더라도 지금부터라도 하나님의 사랑방식, 하나님이 세상과 사람을 보는 방식을 잘 깨달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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