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 Note] 빌립보와 사랑의 여정

2017. 10. 1. 02:18Note

20171001 쓰임교회 주일설교

 

빌립보와 사랑의 여정

 

<빌립보서 2장 1-13절>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2.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3.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4.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5.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6.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12.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13.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성경구절과 소설글귀의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

 

빛이신 주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좀 특별한 설교를 해볼까 합니다. 설교의 제목을 ‘빌립보와 사랑의 여정’이라고 이름 붙여 봤지만 소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통해 살펴볼 결혼생활 혹은 연애’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 복음의 진리를 전한 것이 제가 최근에 읽은 책인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에 나오는 내용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그렇기에 말씀의 적용이 조금은 편협해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그 깊이에 있어서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럼 빌립보서 본문을 한 구절씩 살펴봄과 동시에 책의 글귀들도 인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돌보려는 애씀 

 

먼저 바울은 1~2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이런 이야기를 하죠.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나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나,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서두의 운을 띄우는 이 말은 무엇을 말하기 위함일까요? 그리스도안에서 격려나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동정심과 자비 등은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받게 된 마음의 은총입니다. 이미 하늘의 마음을 받았다면 우리의 다음 관심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말을 하죠.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달라고 말입니다. 자, 그럼 바울은 ‘같음’을 반복해서 말하는데 우리는 어디, 어느 곳에서, 어느 누구와 한 마음 한 뜻을 품어야 할까요? 

 

바울은 3~4절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연인의 관계, 사람의 관계에 적용해 보면 어떻게 될까요? 

 

보통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사랑의 시작(p18)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시작했는지에 관해서는 큰 관심을 나타내지만 정작 어떻게 사랑을 지속하는지에 관해서는 정말 무관심합니다.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시작하는지에 대해서는 과하게 많이 알고, 사랑이 어떻게 계속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모하리만치 아는 게 없는 듯합니다(p27). 이렇게 정말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않은 무관심으로 인해 ‘결혼’ 혹은 만남은 하나의 도박이 됩니다. 

 

“결혼: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버린 미래에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 무한히 친절한 도박(p.65).” 

 

이렇게 사랑과 결혼이 도박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상대방도 나와 같은 사람, 나와 같이 상처입고 아픔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 아닐까요? 상대를 이해하고 알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책의 저자는 사소한 다툼과 실망, 분노 등에는 서로 간의 신뢰의 문제가 얽혀있다고 말합니다. 

 

“싸움의 핵심에는 신뢰의 문제가 있다. 두 사람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덕목이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부당한 실망을 극복해야했고 그 결과 감정의 노출이 어색하기만 한 대단히 방어적인 성인이 되었다. 그들은 공격 전략과 요새 구축에 능통하지만, 경계를 늦추고 자신의 약점과 슬픔을 인정할 때 오는 불안을 견디는 일에는 대단히 서툴다. (생략) 둘 다 상처를 진심으로 인정하거나 느끼거나 또는 상처를 준 상대방에게 그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상처를 붙들고 있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을 불쾌하게 한 사람을 계속 믿는 데 필요한 비축된 자신감이 없다. 사실은 ‘화가 났거나’ ‘냉담한’ 게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이고 가슴 아프고 애정을 받아 마땅한 ‘상처받은’ 상태임을 분명히 하려면 상대방을 충분히 믿어야만 할 텐데도 말이다. 그들은 낭만적인 면에서 가장 필요한 선물, 즉 그들 자신의 취약점에 대한 안내서를 주고받지 못했다(p.259-260).” 

 

이러한 이해와 관심, 상대가 누구든 그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만을 앞세워서는 안 되는 것이죠. 이것이 곧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라는 말의 한 단면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랑: 이해하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인내

 

그러나 누군가에게 이런 관심을 지속해서 갖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애인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쉽지가 않죠. 6~8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하죠. 우리가 신앙고백을 할 때 자주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은 예수께서도 자기를 낮추시고 순종하셨는데 어디까지 순종하셨냐하면 죽기까지 순종하셨다고 합니다. 결국 죽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순종을 보여주셨다는 것인데,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도 보았습니다. ‘죽음의 무게처럼 매일 자신을 낮추기 위해 애쓰셨다.’ 성자이신 예수. 그도 이렇게 애쓰셨는데 우리라고 거저 될 게 있겠습니까. 우리의 애씀도 예수의 애씀을 닮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이렇죠. 애인을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방식에 이 애씀은 적용이 됩니다. 작가의 말을 인용해 볼게요. 그는 먼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닌 문제’는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 라비와 커스틴의 결혼 생활에서 ‘아무 것도 아닌 문제’를 두고 벌어지는 말다툼은 거의 없다. 작은 쟁점들은 사실 단지 필요한 관심을 받지 못한 큰 쟁점들이다. 일상에서의 논쟁은 그들 성격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어져 나온 실밥이다(p.78).” 

 

사실 이 말은 일상의 사소한 논쟁은 서로 간의 성격의 근본적 차이를 드러내는 아주 정상적인 현상이라는 말인 것이죠. 그러면서 저자는 이러한 성격상의 결함을 맞추기 위해 ‘협상의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협상을 위한 인내심이 없으면 비통해진다. 원인도 잊은 채 화가 나는 것이다. 잔소리를 하는 쪽은 굳이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이야기를 끝내려고만 하고, 잔소리를 듣는 쪽은 자신의 반발이 합리적 이론이나 그도 아니면 가엾고 용서 받을 만한 성격상의 결함에서 나온 것임을 더는 설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양 당사자는 그들에게 똑같이 지루하기만 한 이 문제가 그냥 지나가기만을 바란다(p.79).” 그렇죠. 나 아닌 누군가를 알아가고 이해하는 것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부분이 숨겨져 있는 것이죠. 그것을 알고 또 알아가는 과정이 사랑의 여정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는 그 자세가 평범한 일상에 매우 필요한 것이지요. 

 

사랑: 내면교사의 가르침과 안내를 받는 것

 

바울은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를 하죠.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바울의 이 말은 자신이 항상 여러분 옆에 붙어 일일이 해야 할 일을 가르쳐줄 수 없음을, 다시 말해 이런 사랑의 여정에 관한 동기부여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함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내면교사’는 곧 성령의 도움 혹은 하나님의 은총, 그분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 지속성이 곧 스스로를 자기 구원에까지 이른다고 바울은 본 것이죠. 

 

이 ‘내면교사’의 가르침, 곧 성령의 인도하심이 곧 연애와 결혼, 사람과 사람이 맺는 모든 관계에 있어 구체적인 결과와 열매들을 맺길 바라봅니다. 마지막으로 낭만주의적인 사랑을 내려놓고 진짜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 말씀을 마칠까합니다. 

 

1.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무엇보다 완벽함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2.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타인에게 완전히 이해되기를 단념했기 때문이다. 

3.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이 미쳤음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4.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커스틴이 까다로운 게 아님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5.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사랑을 받기보다 베풀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6.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항상 섹스는 사랑과 불편하게 동거하리라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7.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이제 (평온한 날에는) 행복하게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차분하게 가르침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8. 라비와 커스틴이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그들이 서로 잘 맞지 않는다고 가슴 깊이 인식하기 때문이다. 

9.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대부분의 러브스토리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고, 영화와 소설에 묘사된 사랑이 그가 삶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랑과는 거의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죠. 사랑이 이렇듯 우리가 누구와 사랑을 하던 사랑을 향한 여정에는 꾸준한 노력과 애씀, 이해와 인내가 필요한 것이죠.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신뢰하고 또 그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애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삶의 전부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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