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 Note] 말씀을 등불로 삼는다는 건

2017. 10. 8. 13:01Note

20171008 쓰임교회 주일설교

 

말씀을 등불로 삼는다는 건

 

<시편 18편 25-30절>

 

25. 주님, 주님께서는 신실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신실하심으로 대하시고, 흠 없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26. 깨끗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간교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절묘하심을 보이십니다. 

27. 주님께서는 연약한 백성은 구하여 주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십니다. 

28. 아, 주님, 진실로 주님은 내 등불을 밝히십니다. 주 나의 하나님은 나의 어둠을 밝히십니다. 

29. 참으로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서 도와주시면, 나는 날쌔게 내달려서 적군도 뒤쫓을 수 있으며, 높은 성벽이라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30.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흠도 없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티도 없다. 주님께로 피하여 오는 사람에게 방패가 되어 주신다.

 

[Lumix gx9 / 20mm]

잊지 말아야 할 이웃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지난 한 주간은 대명절인 한가위였습니다. 식구들과 모여 많이 웃고 또 많이 울기도 하셨는지요? 이렇게 큰 명절이나 긴 연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갖가지 사정상 모이기 힘든 이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명절 없이 생업을 이어가야만 하는 이들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너의 즐거움이 나의 즐거움이 될 수 있는 세상이 바로 예수님의 꿈꾸셨던 세상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말씀을 등불로 삼는 법

 

오늘은 ‘말씀’에 관해 이야기 나눠볼까 합니다. 대체 우리가 등불 삼아 읽는 성경은 어떻게 읽고 또 바라보아야 하는지 시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특별히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의 책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에 나온 글귀를 함께 읽어보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해마다 12월 셋째 주일은 성서주일로 지킨다.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책이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가장 많은 출판부수를 기록한 책이기도 하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그래서인가? 사람들은 그 귀한 말씀을 잘 보존하려고 가장 속에 혹은 책꽂이에 잘 꽂아둔다. 해가 지나도 깨끗한 성경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왜 성경을 읽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읽어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이들을 위해서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려고 한다. 

 

재능보다 꾸준함이 낫다

 

황상은 열다섯 살 나던 해인 1802년 10월에 다산 정약용 선생을 처음으로 만났다. 당시 다산은 천주학쟁이로 몰려 강진으로 귀양 가 있었다. 황상은 서울에서 온 훌륭한 선생님이 아전의 아이들 몇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용기를 내어 주막집을 찾아가 발치에 앉아 엉거주춤한 자세로 글을 배웠다. 그때의 만남이 참 아름답다. 이레째 되는 날 다산이 황상에게 문사 공부할 것을 권했다. 

 

그는 쭈뼛쭈뼛하더니 부끄러운 빛으로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제게는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꽉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한 것입니다.” 

 

황상이 말했다. “배우는 사람에게 큰 병통이 세 가지가 있다.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 데 민첩한 사람은 소홀한 것이 문제다(한 번만 보면 척척 외우는 사람들은 그 뜻을 깊이 음미할 줄 모르기에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둘째로 글 짓는 것이 날래면 글이 들떠 날리는 게 병통이지(제목만 주면 글을 쉽게 지어내는 사람들은 똑똑하다고는 할 수 있지만, 저도 모르게 경박하고 들뜨게 되는 것이 문제다).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거친 것이 폐단이다(한 마디만 던져주면 금세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들은 곱씹지 않으므로 깊이가 없다). 

 

대저 둔한데도 계속 천착하는 사람은 구멍이 넓게 되고, 막혔다가 뚫리면 그 흐름이 성대해진단다. 답답한데도 꾸준히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하게 된다(자신이 둔한 줄 알기에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크게 이루게 마련이다. 끝이 둔한 송곳으로 구멍을 뚫기는 어렵다. 하자만 일단 뚫고 나면 웬만해서는 막히지 않는다). 천착을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뚫는 것은 어찌하나? 부지런히 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할까? 부지런해 해야 한다. 네가 어떤 자세로 부지런히 해야 할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정민, 《미쳐야 미친다》, 182-183쪽에서) 

 

삶의 날실

 

이게 학문의 길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겠는가? 성경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당장에는 깨달음이 없더라도 꾸준히 읽고, 그 말씀에 비추어 자기 삶을 조율해 나가는 사람은 때가 되면 자기 앞에 활짝 열린 길을 보게 될 것이다. 정규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삶의 명인처럼 보이는 분들이 있다. 뭉특하지만 말씀을 붙들고 평생을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우리는 태산 같은 든든함을 발견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삶에 지침이 될 만한 경구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럴 목적이라면 명심보감을 보면 된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까닭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든 내용이 거기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디모데후서 3:16-17).

 

성경은 사람을 온전케 한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하도록 준비시킨다. 그렇기에 자기 스스로 만족에 겨워 살아가는 사람들은 성경을 잃지 않는다. 위로부터의 간섭이 싫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 삶을 어떻게 성화시킬 것인가를 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하는 억울한 이의 비명이 있다. 또 가장 힘겨운 처지에 빠진 사람이 부르는 희망의 노래가 있다. 인간의 비열함과 음모가 빚어낸 악의 현실이 있고,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성경을 읽으면 우리 속에 용기가 생긴다. 힘이 생긴다. 

 

성경이라 할 때 ‘經’은 ‘도리, 법도, 날실’을 뜻하는 단어다. 날실은 피륙을 짤 때 도리(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 앉아 그 위에 서까래를 놓는 나무)와 바탕받침에 미리 둘러친 실을 의미한다. 거기에 실을 끼워 넣은 후 바디로 내리치면 씨줄이 한 줄씩 짜이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중심은 날실이다. 우리 삶도 그렇다. 날줄이 팽팽해야 그것을 바탕으로 삶이 구성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 삶이 욕망을 따라 흘러가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소중한 버팀목이다. 

 

하나님, 움직이는 거울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주님, 주님께서는 신실한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신실하심으로 대하시고, 흠 없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완전하심을 보이시, 

깨끗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간교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절묘하심을 보이십니다(25-26절). 

 

한마디로 하나님은 거울과 같으시다. 거울에 비친 상은 정확히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거울에 비추어보듯 자기 자신을 비추어보기 위해서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에 직면할 때 우리는 주님의 자비하심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거울처럼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기만 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분이시다. 그렇기에 그분은 움직이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잘못된 것은 꾸짖고, 잘한 일에 대해서는 함께 기뻐해 주신다. 시인은 이것을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연약한 백성은 구하여 주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십니다(27절). 

 

성경 어디를 보아도 우리는 인간이 빚어낸 온갖 모순과 무질서를 바로잡아 가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힘이 있다고, 돈이 있다고 마음이 교만해진 자는 낮추시고, 스스로 살아갈 힘을 잃는 사람은 붙들어 일으켜주신다. 지친 사람에게 새 힘을 불어넣어 주신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것은 교만이다. 7세기에 살았던 시나이의 수도자 요한 클리마쿠스는 교만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교만이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고 악마의 발명품이며 인간에 대한 경멸이다. 그것은 비난의 어머니이고 칭찬의 자식이며 불모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고 광기의 선구자이며 몰락의 창조자이다. 마귀에 들리는 원인이고 분노의 원천이며 위선으로 가는 통로이다. 그것은 악마의 요새, 죄의 후견인, 냉혹함의 근원이다. 연민의 부정이요, 지독한 위선자요, 무자비한 심판관이다. 교만은 하나님의 원수이다. 신성을 모독하는 뿌리이다. 

 

하나님이 교만을 미워하시는 까닭은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너져야 인간은 자유롭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교만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샛별이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하나님이 우리 속에 오셔야 한다. 아니, 이미 우리 속에 계신 주님을 우리가 알아보아야 한다. 눈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다. 빛이 있어야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빛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의 은총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시인은 고백한다. 

 

아, 주님, 진실로 주님은 내 등불을 밝히십니다. 주 나의 하나님은 나의 어둠을 밝히십니다(28절). 

 

하나님이 우리 등불을 켜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가장 보편적인 것은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온다. 읽지 않고 듣지 않는 사람이 깨달을 수는 없다. 운동선수들이 슬럼프에 빠지면 코치들은 그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동작을 반복하도록 한다. 그 동작을 반복하면서 그들은 서서히 회복되는 것이다. 요동치는 버릇이 든 물은 바다에 이르러야 고요해지듯이, 우리 삶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면 삶의 기본을 가르쳐주는 성경으로 거듭해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 우리에게 더욱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이,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베드로후서 1:19).

 

말씀은 어두운 데를 밝히는 등불이다.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은 길을 잃지 않는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길이다’하고 말씀하셨다.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길이 되는 사람이다. 하반신 장애자인 유진서 씨는 누구와 대화를 할 때마다 음식을 받아먹듯이 이야기에 집중한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 해주신 말씀의 씨앗을 잘 키워서 여물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주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말씀과 만나면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따라 살다가 마침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흠도 없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티도 없다”(30절)는 시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김기석,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 꽃자리, p.297-303

 

좁은 보폭으로라도 꾸준히 

 

쉽게 얻고 쉽게 발견한 것은 쉽게 잃기 마련입니다. 혹시 단숨에 얻었다 여겨지는 것이 있습니까? 한번 뒤돌아 생각해 보면 그것을 얻기 위한 지난했던 시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좁은 보폭으로라도 꾸준히 걷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간은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시간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분께 시간을 맡기되 우리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뚜벅뚜벅 걸어야 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살롱(salon)에서 성경에 담긴 생명과 평화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with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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