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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계속해 나가는 신앙

20171015 쓰임교회 주일설교

 

계속해 나가는 신앙

 

<출애굽기 32장 1-14절>

 

1. 백성은, 모세가 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으니, 아론에게로 몰려가서 말하였다. "일어나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게 한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2. 아론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의 아내와 아들 딸들이 귀에 달고 있는 금고리들을 빼서, 나에게 가져 오시오."

3. 모든 백성이 저희 귀에 단 금고리들을 빼서, 아론에게 가져 왔다.

4. 아론이 그들에게서 그것들을 받아 녹여서,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드니, 그들이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5. 아론은 이것을 보고서 그 신상 앞에 제단을 쌓고 "내일 주님의 절기를 지킵시다" 하고 선포하였다.

6.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서, 번제를 올리고, 화목제를 드렸다. 그런 다음에,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흥청거리며 뛰놀았다.

7.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어서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

8.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이렇게 빨리 벗어나서, 그들 스스로 수송아지 모양을 만들어 놓고서 절하고, 제사를 드리며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하고 외치고 있다."

9.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 백성을 살펴 보았다. 이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10.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노하였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그러나 너는, 내가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11. 모세는 주 하나님께 애원하였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주신 주님의 백성에게 이와 같이 노하십니까?

12. 어찌하여 이집트 사람이 '그들의 주가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그들을 이끌어 내어, 산에서 죽게 하고, 땅 위에서 완전히 없애 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려 하십니까? 제발, 진노를 거두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주님의 백성에게서 이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13. 주님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시며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모든 땅을 너희 자손에게 주어서, 영원한 유산으로 삼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14. 모세가 이렇게 간구하니, 주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시고, 주님의 백성에게 내리시겠다던 재앙을 거두셨다.

 

[Lumix gx9 / 20mm]

불안을 느끼는 존재, 사람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이번 주부터 날이 몹시 추워졌습니다. 옷 따뜻하게 입으시고 감기 걸리지 않게 쉼도 잘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사람에 대한 여러 이해 가운데 하나는 사람은 불안을 잘 느끼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가시적인 것이 없으면 자꾸 불안해하는 존재입니다. 현대사회가 그것을 명확히 드러내 보이고 있죠. 집의 규모, 차의 종류, 땅의 위치와 넓이, 소유한 건물의 층수 등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서로를 판단하는 그런 사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눈에 확연히 띄는 자기 존재 증명서가 아니어도 사람은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많은 것에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많은 것을 믿으며 살아갑니다. 그런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윤리와 도덕, 가치관, 사회관, 자기이해 등이 있겠지요. 이렇듯 사람은 가시적인 것이든 비가시적인 것이든 많은 것을 의존하고 또 믿고 삽니다. 

 

기다림에 지쳐 불안한 백성들

 

사실 이러한 사람의 성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구약의 출애굽 사건’과 ‘신약의 도마의 이야기’이죠. 출애굽 사건은 곧 다룰 이야기기에 잠시 보류하도록 하고 도마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도마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떤 반응을 합니까? “나는 내 눈으로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요20:25).”고 했지요. 사실 이것이 이상할 것이 없는 정상적인 사람의 반응입니다. 오히려 생각해보면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을 더 의심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 사람이자 참 하나님이셨던 예수께서 이런 이해가 없으실 리 없었겠죠. 

 

그럼 오늘 함께 읽은 구약의 말씀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지도자 모세와 함께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한 가운데 머물고 있었습니다. 시내 산 근처였던 그 광야에서 백성들은 며칠 동안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미 시내 산 위에 올라가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시내 산 위에 올라가 있는 시간이 좀 길어졌나 봅니다. 기다림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형 아론에게 다가가 그들의 불안감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던 아론에게 말하죠. 우리를 이끌고 출애굽한 모세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어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달라고 말입니다. 그들의 요구를 들은 아론의 태도는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그는 말하죠. “여러분의 아내와 아들 딸들이 귀에 달고 있는 금고리들을 빼서, 나에게 가져 오시오.”라고 말합니다. 이미 모세의 형 아론도 어떤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론의 말을 들은 출애굽한 백성들은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 가져왔습니다. 아론은 그것들을 받아 녹이고 그 녹인 것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이 송아지 상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신이 바로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낸 너희의 신이라고 서로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 신상을 주님으로 여긴 그들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 그 자리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주님의 진노와 모세의 간청

 

이 사실을 아신 주님께서 모세를 향해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으니 어서 산에서 내려가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주님께서는 서운함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죠. “나는 이 백성을 살펴보았다. 이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노하였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변심에 지쳤다는 듯 더 이상 참지 않고 그들을 완전히 쳐 없애겠다고 하십니다.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일까요? 이 말을 들은 모세는 주님께 애원합니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주신 주님의 백성에게 이와 같이 노하십니까? 어찌하여 이집트 사람이 '그들의 주가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그들을 이끌어 내어, 산에서 죽게 하고, 땅 위에서 완전히 없애 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려 하십니까? 제발, 진노를 거두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주님의 백성에게서 이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주님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시며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모든 땅을 너희 자손에게 주어서, 영원한 유산으로 삼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님께서는 모세의 간절함을 느끼셨고 그래서 당신의 뜻을 돌이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기로 한 재앙을 거두십니다. 

 

가시적, 비가시적 대상을 찾는 존재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이 말씀은 평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이죠. 특히 ‘우상’에 관해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본문입니다. 여러분, ‘우상’은 설교 서두에 말씀드렸던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많은 부분 의지하고 있는 가시적 혹은 비가시적 대상에 의존하고 있다는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에게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말했던 건 그동안 자신들이 믿고 의지하던 대상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불안했던 거죠. 모세라는 지도자를 의지하며 원대한 희망을 갖고 이집트에서 탈출한 백성들은 두 가지가 단번에 사라지자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들이 두려워했던 건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는 지도자 모세였고 다른 하나는 젖과 꿀이 흐르는 희망의 땅 가나안, 바로 이 두 가지를 잃을까 두려웠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우리는 한 가지를 깨닫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대상 즉, 마음의 안정을 위해 가시적인 무언가를 계속해서 찾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사람은 뚜렷한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근원적으로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확신할 수 있는 대상이 없으면 불안해합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죠. 우리가 무엇인가 자꾸 사고 싶고 갖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현재 자신이 외롭거나 불안해하는 상태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심리가 구매하고자 하는 욕구로 드러나기에 결국 쇼핑을 통해서는 근원적인 외로움과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사람은 누군가로부터 받는 인정, 혹은 삶의 의미, 보람 등이 없어도 불안해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충족되지 않는 ‘무엇’으로부터는 사람은 자신의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없습니다. 물론 삶에 있어 의미와 보람, 인정 등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비가시적인 종류의 것도 말씀 드린 이유는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매번 채움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느끼지 못한 순간도 정말 많습니다. 

 

영혼의 어둔 밤을 견디는 신앙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실까요? 바로 ‘용기’ 아닐까요? 다른 말로 ‘확신’ 혹은 ‘힘’이라고 이야기해도 좋겠군요. 결국 우리가 믿는 주님은 대기 속 산소와 같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말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보이는 대상이라면 그의 말과 행동을 따르면 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대상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비가시적 존재를 일상에서 가시화하여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죠. 

 

그럼 우리는 여기서 다시 무엇을 말해야 할까요? ‘계속해 나가는 용기’입니다. 때론 주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을 겁니다. 혼자가 된 기분이 들 때도 있을 겁니다. 연애를 할 때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랑을 할 때 뜨거운 밀월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차가운 듯 차분해 지는 시간이 반드시 옵니다. 항상 뜨겁기만 하다면 아마 사람은 빨리 소진되어 타버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공허한 시간을 견딜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주님을 믿는 과정이자 신앙생활의 한 단면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어느 경지에 올라 그 경지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주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과정으로 삼고 때론 차갑고 때론 뜨거운 시간을 계속해서 살아 나가는 것입니다. 비가시적인 주님을 계속해서 믿고 때론 질문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도 ‘어둔 밤’을 보냈습니다. 제랄드 메이는 그의 책 <영혼의 어두운 밤>에서 이야기합니다. 

 

영성적 진보는 영혼의 비밀스런 장소에서, 요한의 말처럼, ‘지성도 악마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더욱이 그것은 종종 퇴보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생략) 요한은 밤의 전통에서, 영혼이 침체나 목적의 결핍처럼 보이는 것들을 참아 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올바른 행동이라고 주장합니다. “영혼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하여 ‘영혼이 아무런 진보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요한은 이렇게 충고합니다. “영혼은 아무것도 안 함으로써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여러분에게 증명해 보일 것입니다.” (제랄드 메이, <영혼의 어두운 밤>, p.166)

 

여기서 요한이란 인물은 16세기에 활동했던 수도사,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을 말합니다. 또한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St. Theresa of Avila)도 이와 비슷한 ‘어둔 밤’을 경험합니다. 그렇죠. 요한은 영혼이 침체나 목적의 결핍으로 보이는 것들을 참아 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올바른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영혼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하여 아무런 진보도 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시간과 주님의 시간은 다르게 흐릅니다. 

 

계속해 나가는 용기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삶에 관한 이해가 굉장히 깊습니다. 참 사람이셨던 주님께서 우리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하기 원하는지 모르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가진 아픔, 약함, 상처 등을 있는 그대로 당신 앞에 드러내길 원하십니다. 자신에 관해 잘 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곧 주님을 알아가는 과정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 가장 필요한 요소는 ‘계속해 나가는 용기’입니다. 삶에 아무런 자극이 없고 불투명한 삶의 모습 때문에 불안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지속해 나가는 힘을 기르는 겁니다. 우리가 어두운 밤 가운데 있는 듯해도 때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내가 믿고 의지했던 존재가 사라진 듯해도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분이 하실 일을 기대하며 지금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분이 하셨던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현재의 삶에 온전한 뿌리를 내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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