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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왜 하필이라고 말하지 말라

20170903 쓰임교회 주일설교

 

왜 하필이라고 말하지 말라

 

<출애굽기 3장 1-15절>

 

1.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인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가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서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갔을 때에,

2. 거기에서 주님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에 불이 붙는데도, 그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3. 모세는, 이 놀라운 광경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어째서 그 떨기가 불에 타지 않는지를 알아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4. 모세가 그것을 보려고 오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모세가 대답하였다.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5.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

6. 하나님이 또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뵙기가 두려워서, 얼굴을 가렸다.

7.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8.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이 땅으로부터 저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사는 곳으로 데려 가려고 한다.

9. 지금도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가 나에게 들린다.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는 것도 보인다.

10.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하겠다."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

12.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다음에, 너희가 이 산 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때에,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냈다는 징표가 될 것이다."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15. 하나님이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

 

 

두 인물이 주고받는 대화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9월입니다. 9월은 좀 특별하죠. 온도의 변화만으로는 여름과 겨울의 경계를 뚜렷이 알기 어렵지만 9월이 오면 정말 가을이 온 느낌을 받습니다. 기분 탓만은 아니겠죠.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부는 걸 보면 가을이 오긴 온 모양입니다. 

 

오늘은 출애굽기 말씀을 두고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본문에는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한 명은 모세고 다른 한 분은 하나님입니다. 물론 주님의 천사가 잠깐 등장하긴 하지만 그의 역할이 모세와 하나님을 연결해주는 것에만 한정된다면 오늘 본문의 등장인물은 두 명으로 보아도 무관합니다. 이 두 인물이 서로 주고받은 내용에 관해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호렙산에서 나눈 하나님과 모세의 대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했던 리더이기 이전에 ‘목자’였습니다.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던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목자였습니다. 어느 날, 모세는 양떼와 함께 산책을 하던 중 광야를 지나 호렙산에 이르게 됩니다. 그날 모세는 생각할 거리가 많았는지 아니면 무엇에 이끌렸는지 모르겠으나 평소보다 많은 거리를 걸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제일 먼저 떨기에 불이 붙었는데도 타지 않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에 덥힌 불꽃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주님의 천사는 안중에 있는지 없는지 별 신경 쓰지 않은 듯 떨기나무로 향합니다. 그 때 모세를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더니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내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 

 

이어서 한 말씀을 더 하십니다.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주님께서는 역사 속에 등장했던 자신의 신분을 나열하듯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모세는 그런 하나님 보기가 무서워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주님께서는 이번에는 이집트에서 억압받고 고통 받는 자신의 백성들의 관해 말씀하십니다. 주께서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알고 계셨고 이제는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곧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사는 곳’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야기를 마치신 주님께서는 모세를 그 역할을 감당할 사람으로 지목하셨습니다. 그를 이집트 왕 바로에게 보내겠다고 하십니다. 

 

몹시 당황한 모세는 하나님께 따지듯 묻죠. 내가 무엇이라고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끌어내겠냐고 말입니다. 저희라도 충분히 그런 반응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고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이끌어낸 다음 이 호렙산에서 자신을 예배하게 될 때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낸 징표가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말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두렵고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그는 조금은 뻔해 보이는 질문을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이곳으로 보내셨다고 하면 그들은 그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과연 당신의 이름을 무엇이라 대답해야 하냐고 묻습니다. 사실 이 뻔해 보이는 질문은 그렇게 뻔 한 질문만은 아닙니다. 두 가지가 그것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 질문에 답하는 하나님의 자기 증명이 하나님 존재의 어떤 상(像)을 마련해 주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겠다는 그 질문에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것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 사회가 다신(多神)의 사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십니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들이 잘 알아챌 수 있는 이야기 방식으로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세 가지의 중요한 메시지

 

사실 오늘 본문에 세 가지 중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따로 떼어 설명해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이 세 가지를 간단히 집고 넘어가되 왜 하필 이러한 일이 모세에게 일어났는가에 대해 집중해 볼까합니다. 이 세 가지 이야기 속에 무심코 혹은 우연히 호렙산에 당도한 모세라는 인물의 존재의미가 나타납니다. 호렙을 밟은 모세의 발은 우연이라기보다는 필연에 가깝습니다. 

 

본문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세 가지 중 그 첫 번째는 떨기 앞에서 신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너는 신을 벗어라’ 여기서 말하는 신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신’이란 ‘신발’을 나타내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신발이란 뭡니까? 우리가 걸어 다닐 때 우리와 함께 있는 몸의 도구이죠. 이를 좀 확장시켜 생각해 본다면, 우리와 늘 함께 있어 우리 몸과 마음에 켜켜이 쌓인 습성 혹은 관습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향해 신을 벗으라고 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 앞에 나오라는 말과 같을 것입니다. 나를 둘러싼 이름과 신분, 명예, 아픔, 상처마저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말일 것입니다. 모세는 우연히 왔다고 여겨지는 호렙산에서 우연히 하나님의 일을 맡게 된 데에는 필연의 연관성이 있다고 봅니다. 

 

두 번째 본문에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대목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자손들을 해방시키겠다는 대목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 내용상 본다면 하나님과 모세의 만남의 주목적은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 자손의 해방입니다. 우연히 오게 된 산에서 엄청난 미션을 받게 된 모세. 그는 좀 억울했을 수도 있습니다. 전혀 연관성 없어 보이는 이 걸음 속에 모세는 구약을 관통하는 대업을 맞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우연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필연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하게 볼 본문의 대목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누가 나를 보냈냐고 그의 이름을 물을 때 무엇이라 답해야 하는지에 관한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곧 나다’라는 말씀을 하셨지요. 나는 곧 나다. 영어로는 ‘I am who I am’입니다. 이 말 속에는 하나님 존재의 뿌리가 담겨 있습니다. ‘나는 곧 나다’라는 말은 개역개정의 표현대로라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됩니다. 곧 하나님은 무엇으로부터 말미암은 대상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인 것이지요. 말이 좀 어렵습니다만, 오히려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인 ‘하나님은 창조주시다’라는 말로는 이 말의 무게를 다 담아낼 수 없어 보입니다. 모세는 호렙산을 오름으로 하나님 존재의 근거를 알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그 날 아침만 해도 전혀 하루가 이렇게 펼쳐질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일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

 

저는 모세가 우연히 가게 된 호렙산에서 만난 하나님과의 대화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반영한다고 봅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호렙산에서 나눈 모세와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 일상의 ‘진리’가 드러난다고 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삶이 늘 즐겁고 유쾌하고 만족스러울 수 없습니다. 그런 시간들이 조금씩 길어지다 보면 삶의 의미를 잃기도 합니다. 그럴 땐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나쁜 게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에 원망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아무튼 우연히 던져진 세상에 답 없이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이런저런 일에 집중해 보지만 근원적인 헛헛함을 채울 순 없습니다. 

 

사실 오늘 호렙산에 오른 모세는 충분히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나에게’라는 생각 말입니다. 호렙산에 오르지 않고 광야를 돌아 다시 집으로 갔다면 아무 일 없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 충분히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산 위에서 하나님께 들은 말씀의 무게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키라니.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죠.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느낄 때가 많은 것이죠. 원치 않는 일이 우리에게 닥쳐오고 때로는 지루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일상을 살 때가 많습니다. 사실 그런 일상은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오늘 본문이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눈 하나는 ‘신을 벗으라’는 요구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 앞에 감출 것 없이 서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하기 위해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듯이 우리의 일상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심아래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참 조심스러운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어려움과 낙심에 빠진 사람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누군가를 통해 전해져야하기 보다는 스스로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나는 곧 나다’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고 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상을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역할, 그분의 성품과 바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해야 할 몫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그의 책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무료한 일상을 사는 것에 관해 불평하는 이들을 향해 일침을 가합니다. 

 

“당신의 일상이 너무 보잘것없이 보인다고 당신의 일상을 탓하지는 마십시오. 오히려 당신 스스로를 질책하십시오. 당신의 일상의 풍요로움을 말로써 불러낼 만큼 아직 당신이 충분한 시인이 되지 못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십시오. 왜냐하면 진정한 창조자에게는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보잘것없이 보이지 않으며 감흥을 주지 않는 장소란 없기 때문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p.15) 

 

모세도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찾아서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물론 해야 할 몫이라는 것이 누군가 알아주는, 사회가 인정하는 그런 일은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일,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릴케는 환경과 상황을 탓하는 이들을 향해 일상의 풍요로움을 불러내지 못한 그들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음을 피력했습니다. 

 

파울로 코엘료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의 책 <순례자>를 보면 삶은 매순간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고 말하며 우리는 지혜롭고 강인해 질 수 있지만 단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모험을 감행해야 할 때 그것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 말해주기 전부터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삶은 매 순간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니까요. 따라서 비밀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매일의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도 솔로몬 왕처럼 지혜롭고 알렌산드로스 대왕처럼 강인해 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이번처럼 특별한 모험에 참여하게 될 경우에만 그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문학동네, p.281) 

 

여기서 누군가를 가르치고 특별한 모험에 참여하라는 말은 꼭 그 두 가지를 해야 한다는 말이라기 보단 일상을 새롭게 보려는 어떤 시도들을 해보라는 말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우리는 살면서 “왜 하필?”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합니다. 물론 대부분 부정적인 상황에서 이런 표현을 씁니다. 서두에도 잠시 말씀드리긴 했습니다만, 삶이란 모호함 투성이고 그러다보니 내가 처한 상황이 사면초가로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고 평범한 속에 깃든 하나님의 은총과 뜻을 잊지 말며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런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나만 왜 이럴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을 것입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은 모두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만 왜 이럴까?’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우리 모두는 닮아 있습니다. 그 깊은 내면에 침잠하여 잠잠히 기다리고 계신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 바깥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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