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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하나님과 안팎이 일치된 사람

20160417 쓰임교회 주일설교

 

하나님과 안팎이 일치된 사람

 

<요한복음 10장 22-30절>

 

22. 예루살렘은 성전 봉헌절이 되었는데, 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께서는 성전 경내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다.

24. 그 때에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

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언해 준다.

26.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도 더 크시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2년이 지난 오늘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 이 시간,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여러분 앞에 섭니다. 어제는 4월16일이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있고 난 후, 2년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커다란 아픔이 있고 나서 2년여가 지난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여전히 아홉 명의 희생자들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저 차가운 바다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며 그 아홉 명의 이름을 찾아봤습니다. 처음 찾아봤습니다. 그 동안 아홉이라는 숫자는 알고 있었지 그 이름은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단원고 학생(4) 조은화, 허다윤, 남현철, 박영인, 교사(2) 고창석, 양승진, 일반인(3) 권재근씨와 그의 아들 권혁규군, 마지막으로 이영숙씨. 그들의 이름을 설교문에 기록하다 울컥 하기도 했습니다. 멀게만 느껴졌던 그들이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있고 난 후 2년여가 지난 오늘, 주위를 가만히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밝혀지지 않은 진실과 싸우는 유가족들, 그들의 상실과 아픔을 공감하며 그들 편에 서서 힘을 쓰고 있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지만, 처음과는 다르게 마음을 돌이킨 사람들도 눈에 띄게 많아진 걸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만들었을까? 지금의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여러 가지 질문들이 떠올랐습니다. 

 

며칠 전, 이러한 사회의 흐름을 분석한 기사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2866). 처음 여론은 희생자 가족인 ‘유족’에 대해 강하게 감정이입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특례’, ‘특별법’ 등 유가족들이 정부에 과도한 요구를 한다는 정서가 여론을 이끌어가게 됐고, 시간이 더 흘러 이러한 여론은 ‘(담배, 공무원)세금’이라는 사회적인 이슈와 더불어 세월호 유가족들을 하나로 묶게 되며,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냐? 라는 논리로 세월호 이야기가 어서 그치기를 바라게 됐습니다. 이 기사에서는 공적 문제의식 없이 사적 공감대 하나만으로 버티던 감정이입은 국면 변화에 취약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특혜, 특권층, 혈세낭비 등의 대립 항이 나타나자 여론은 쉽게 반전되었고, 더욱이 국민의 세금 문제와 맞물려 세월호 유가족들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된 분노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국가와 국민 서로에 관한 ‘신뢰’의 문제까지로 이어지게 됩니다. 

 

기사의 내용을 간략히 말씀드리느라 각 단락의 연관성을 발견하기 어려운 분도 계셨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했던 것은, 세월호 참사가 있고나서 2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마음은 어떠하냐는 것과 더불어 지금 이 사회와 여론의 흐름을 잘 살피며 쉽게 요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 이야기에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더 이상 아픔과 고통이 있는 곳에 힘과 응원을 보내지 말자라는 말이 아니라 어떠한 감정에 휩쓸려 아픔과 고통이 있는 이들의 편에서 돌아서지 말자는 것입니다. 기도가 필요한 순간이 바로 이 순간입니다. 성경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이 말은 우리가 매순간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자신의 판단을 가능하면 유보하라는 말 아니겠습니까? 물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옳을 때도 있지만, 사실 사람은 자신을 타자화하기 무척 힘든 존재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도 그 이유가 되겠지만, 그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멈춰서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의 길목 길목에서 하나님의 뜻을 여쭈어야 합니다. 

 

 

‘하누카’라는 성전 봉헌절

 

오늘 설교의 서두가 좀 길었습니다. 너무 정치적인 발언을 해서 불편한 분들도 계셨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를 비롯한 예언자들은 생명과 평화를 훼손하는 각 시대의 문제와 아픔을 서슴없이 폭로했고, 불의한 자리에 있는 이들을 거침없이 비판했습니다. 물론 저는 믿음과 용기가 부족해 이 이상의 것들을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저는 예수의 정신은 이 시대의 정신과 맞닿아있다고 늘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시대의 아픔과 부조리의 고발은 신앙인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늦었지만, 오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설교본문인 요한복음 10장2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은 성전 봉헌절이었는데, 때는 겨울이었다(22).’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께서 요한복음 묵상 글에 봉헌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 놓았습니다(<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 글모음 中). ‘성전 봉헌절’은 ‘하누카’라고도 부릅니다. 이 축제는 유다 마카비를 중심으로 한 저항세력이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오커스 4세에 의해 더럽혀졌던 성전을 재탈환하여 그것을 정화한 후 하나님께 봉헌했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하누카 축제 때면 유대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큰 가지를 중심에 두고 좌우 각각 네 개씩 도합 여덟 개의 가지를 가진 ‘메노라’ 즉 촛대에 매일 하나씩 불을 붙여나갑니다. 불이 하나씩 더해질 때마다 그들의 종교적 감정은 더욱 고조되었을 것이고, 사람들이 부르는 ‘할렐 송’으로 인해 촛불은 더욱 흥겹게 일렁였을 것입니다. 

 

그가 하는 일을 통해 드러나다.

 

하지만 예수는 그 축제와 같은 날들에 합류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위적으로 밝혀놓은 빛 너머의 어둠을 응시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성전이 성전구실을 하지 못하고 사람의 의식을 옥죄고 있는 일들로 마음이 번잡했습니다. 그런 예수에게 유대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24).”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등 중에 있었습니다. 

 

질문을 받은 예수는 이렇게 답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언해 준다(25).” 이 말이 가진 의미는 매우 무겁습니다. 이미 말했는데 믿지 않았다는 이 말도 엄청난 것이지만, 그보다 다음에 말했던 예수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그 방식에 우리는 귀 기울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존재가 어떠한지는 그가 했던 말이 아니라 그가 하는 일을 통해 그러나기 마련입니다. 예수가 하는 일이 곧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그 일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듯이,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억압으로 질식 상태에 있는 생명을 일으키기 위해 그는 힘써 살았습니다. 사실 이러한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께 속한 존재입니다. 

 

김기석 목사님은 예수를 통해 드러나는 일을 보면서도 믿지 않는 것은 다른 주인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주인의 이름을 일러 돈, 자아, 체면, 이념, 가족, 성공 등이라고 말씀하시며 예수의 뜻을 살아내려 하기보다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를 동원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과연,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지요? 

 

예수의 목소리를 알아듣는가?

 

이어서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27-28).” 이 말씀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예수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그 ‘양’의 무리에 자신이 포함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여겨지십니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 전, 총선 때 기독교 이름을 달고 나온 당으로부터 문자를 여러 번 받았습니다. 어떻게 번호를 알았는지 연락이 계속 왔습니다. 자신들을 뽑아 달라는 선거홍보용 연락이었습니다. 그 문자 맨 아래에는 이 당을 후원하는 목사님들의 이름이 거론돼 있었습니다. 대부분 모르는 목사님들이었지만, 아는 이름의 목사님들은 한국에서 대형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분들의 선거공략부터 ‘정말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게 맞나’라는 의문이 있었지만, 이전부터 알고 있던 그분들의 신앙관이 이미 ‘예수의 목소리를 제대로 알아듣는 그 양이 맞나’라는 의심이 있어왔던 터였습니다. 김기석 목사님은 예수의 말은 오늘의 교회에서 경청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에게 침묵을 강요하며 그에게 금관을 씌워 그의 입을 봉인했다고 하셨습니다. 범람하는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는 시대가 지금의 시대가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예수, 하나님과 안팎으로 일치된 존재

 

마지막으로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도 더 크시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29-30).” 예수께서는 자신의 존재근원이 하나님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그의 모든 삶의 뿌리가 하늘과 맞닿아 있음을 한시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존재근원을 잊지 않는 말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나 지금이나 예수의 오늘 본문 마지막 발언인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는 말의 참된 의미를 잘 알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김 목사님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는 말은 예수께서 하나님과 당신을 동일시한다(identity)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안팎 없이 일치됨(unity)을 이르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신성모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양식, 다시 말해 행동근원이 하나님임을 드러내는 발언인 것입니다. 결국 ‘성전 봉헌절’에 유대인들은 스스로 성전이신 분을 죽이려 했습니다. 

 

하나님과 일치된 사람입니까?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세월호 2주기를 맞아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설교의 운을 띄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며 고통 받는 자, 설 곳을 잃어버린 자, 아픔 가운데 있는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어야 한다고 늘 말해왔습니다. 물론 세월호 유가족들만이 그 사람들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그들을 내버려두고 우리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의 가족이고 이웃이고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말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셨지만, 그보다 자신이 몸으로 하는 일을 통해 당신 스스로와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셨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도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삶과 신앙, 주일의 삶과 평일의 삶의 구분이 없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교회 안에만 머물 때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과연 우리는 안팎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된 사람입니까? 돌아봐야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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