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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선한 목자의 선택

20180422 쓰임교회 주일설교

 

선한 목자의 선택

 

<요한복음 10장 11-18절>

 

11.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의 것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가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를 흩어 버린다. -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14.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15.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 

16.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양떼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으려고 내 목숨을 기꺼이 버리기 때문이다. 

18.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는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

 

[Lumix gx9 / 20mm]

예수를 드러내는 일곱 가지 정의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께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가 자신을 소개하는 ‘내가 있다’, ‘나는 ~이다’라는 뜻의 일곱 개의 문장이 등장합니다.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라고도 하는데요. 이 문장은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6:35)’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빵 혹은 떡이라 비유하시며 자신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고 자신을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등장하는 것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8:12)’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빛으로 표현하시며 자기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거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는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본문 바로 위 구절에 등장한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요10:7)’입니다. 예수는 자신을 양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통해 들어오면 누구나 구원을 얻고 꼴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네 번째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 나오는 ‘나는 선한목자이다(요10:11)’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길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다섯 번째 등장하는 것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11:25)’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부활이자 생명이라고 칭하시며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 했습니다. 

 

여섯 번째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하시며 자신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는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요15:1)’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은 참 포도나무이고 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시며 자신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반대로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내가 있다’, ‘나는 ~이다’라는 뜻의 ‘에고 에이미’를 일곱 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일곱 가지 가운데 예수 자신을 드러내는 네 번째 방식인 ‘선한 목자’의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

 

예수께서는 자기 스스로를 ‘선한 목자’라고 하십니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요한복음을 서술한 저자 요한의 고백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고백에 담긴 예수의 상징은 의미가 깊습니다. 

 

자신을 ‘선한 목자’라 칭한 예수는 이에 관해 증언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립니다. 선한 목자는 특히 삯꾼 목자와 비교되는데, 삯꾼 목자는 양들이 원래부터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에 이리가 오면 양들을 버리고 먼저 도망가 버립니다. 이런 목자는 이름 그대로 삯꾼이기에 양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삯꾼은 어떤 사람입니까? 말 그대로 품삯을 받고 임시로 일하는 일꾼이기에 그는 맡겨진 대상에 관해 애정과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선한 목자는 다릅니다. 예수는 말합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4)” 그런데 다음 구절에서 이 ‘앎’은 확장됩니다. 예수는 말씀하시죠.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15)” 선한 목자가 자신의 양들을 알아보고 양들 또한 선한 목자를 알아본다는 것은 곧 예수 자신과 아버지 하나님이 서로 아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럼 이 말을 무슨 말입니까?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가 서로 안다는 것은 서로의 본질을 안다는 것 그리고 그 본질은 사랑이며 이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주고받는 존재들임을 안다는 것 아닐까요? 조금 더 풀어 말씀드리면,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들이자 친구이듯 선한 목자인 예수와 양이 상징하는 우리들도 곧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이자 친구라는 뜻일 겁니다. 결국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자신의 가장 좋은 것, 소중한 것을 내어주는 사랑 즉, ‘목숨까지 내어주는 사랑’을 말하는 것일 텝니다. 

 

교회 안팎의 사람들

 

그런데 예수께서는 16절에 이런 이야기를 건넵니다. 선한 목자인 예수는 모든 양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양들은 그냥 모른 채 내버려두어야 할 그런 양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곳으로 끌고 와야 하는 양들입니다. 왜냐하면 그 양들도 선한 목자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은 어떤 이유에선가 우리에게 속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 양들과 선한 목자에게 속한 양들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 양들도 곧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의 양떼가 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16). 모두 선한 목자에게 사랑 받는 동일한 양인 것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교회 밖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정의해주기도 합니다. 사실 교회 안팎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에 있어 모두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이미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시선으로 교회 밖 사람들을 볼 때 필요한 것은 ‘안타까움’ 입니다. 우리는 내면의 빛,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알아채지 못해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밖 사람들이 교회 안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다거나 더 성실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태초부터 각 사람에게 심어준 사랑의 뿌리를 교회 밖에서는 알아채는 게 너무 어렵습니다. 세상에서는 넘어지고 일어서서 다시 향해야 할 ‘기준’, 벗어났을 때 다시 돌아와야 할 그 ‘기준’을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 이야기도 신뢰를 많이 잃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의 사람들도 자신이 믿고 싶은 방식으로 예수를 믿고 또 그분을 따르고 싶은 방식으로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 좋을 대로의 신앙’에 빠진 성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기에 지금은 교회 안팎의 사람들을 나누는 기준이 점점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돌아봐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그분께 깊이 뿌리 내린 예수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 예수가 한 여러 말 중에 특히 관심을 가져야 할 말들이 있습니다. 17-18절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예수께서는 선한 목자에 관한 말씀을 하시다, 자신의 양들을 위한 선택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선택이자 어려운 선택이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선택이라고 했습니다(15).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사랑한다는 게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하고 좋은 것을 상대에게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가장 큰 사랑은 자신의 ‘목숨’을 주는 것이 분명할 겁니다.  

 

이 말씀은 예수의 확신 가운데 이어집니다. 그는 이런 말씀을 하시죠.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으려고 내 목숨을 기꺼이 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는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17-18)” 예수께서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 사랑에 엄청난 신뢰를 보냅니다. 그리고 이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의 목숨을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더구나 자신이 목숨을 버리고자 하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선택’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목숨은 자신이 선택적으로 버릴 수도 있고 또 선택적으로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방금도 말씀 드렸듯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신뢰(17)와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18)이 그의 중심에 깊이 뿌리내려 있기에, 늘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기에 그는 자신의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속한 양들을 위해 목숨을 잃어도 그 사랑은 사랑을 덧입은 양들을 통해 지속될 것임을 또 누군가를 위해 내어준 사랑의 정신이 계속해서 이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삶에서 선택이 중요한 이유

 

여러분, 우리가 스스로 ‘선택’ 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그런 ‘선택’은 어떤 사람만이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작가 유시민은 그의 책 <어떻게 살 것인가>에 ‘행복’에 관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가지려면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자녀가 스스로 이것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시행착오를 경험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자식은 부모의 꿈이나 희망을 실현하는 수단이 아니다. 자신의 소망을 자녀에게 투사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가 옳다고 믿거나 좋다고 생각하는 삶의 방식을 강제해서도 안 된다. 자녀들은 부모가 그렇게 할 경우 그것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의 중요한 문제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을 누리는 능력을 기를 수 없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의길, p.213)

 

마지막 대목이 가슴에 남습니다. 삶의 중요한 문제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을 누리는 능력을 기를 수 없다는 말말입니다. 왜 스스로 선택해보지 않은 사람은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될까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가장 큰 이유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선택해 보지 않고 누군가 정해준 것들을 선택한 사람은 스스로 자기 삶을 개척해 나갈 힘이 부족해집니다. 그러다 결정적인 순간 자신의 선택을 대신 해 준 사람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죠. 알 수 있는 기쁨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실패하고 실수하더라도 선택해봐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말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뭐든 ‘내 생각, 내 판단, 내 마음 가는대로 선택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는 선택일까?’라는 생각 말입니다. 물론 이것을 아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성경의 여러 인물도 실수와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우리는 실수와 실패 없이 하나님의 선택을 단번에 알아챌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그런 실수와 실패를 줄일 수 있을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모든 ‘선택’ 속에 하나님을 모셔야 합니다. 강압적으로가 아닌 부드럽게 스며들 듯 모셔야 합니다. 그분이 이 ‘선택’ 속에 함께 하실 것을 믿으며 이 ‘선택’을 통해 알려주실 삶의 비밀을 기대하면 됩니다. 그런 시간들이 축척돼야 우리는 실수를 줄이며 살 수 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삶

 

사랑하는 쓰임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인 ‘목숨’을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내어주었습니다. 비록 그는 죽음을 맞았지만 사랑을 위한 그의 죽음은 죽음 이후 더욱 생동감 있게 살아서 지금까지 인간의 삶을 격동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너와 나를 가르지 않고 하나님이 그러하셨듯이 모든 생명을 똑같이 사랑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더욱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베푸신 현재의 삶을 살며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전하며 매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 시도들이 매번 실패하는 것 같고 또 아무 성과가 없어 보일지라도 결국엔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마무리해 가실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서 사랑의 일을 선택해 나가면 됩니다. 때론 고독하고 때론 벅차오를 그 시간들을 기대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갑시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

문학과 여행 그리고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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