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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물러서게 하시는 하나님

20180429 쓰임교회 주일설교

 

물러서게 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38장 14-23절>

 

14. 시드기야 왕은 사람을 보내어서, 예언자 예레미야를 주님의 성전 셋째 문어귀로 데려왔다. 그리고 왕은 예레미야에게 말하였다. "내가 그대에게 한 가지를 묻겠으니, 아무것도 나에게 숨기지 마시오." 

15. 그러자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대답하였다. "제가 만일 숨김없이 말씀드린다면, 임금님께서는 저를 죽이실 것입니다. 또 제가 임금님께 말씀을 드려도, 임금님께서는 저의 말을 들어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16.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은밀히 맹세하였다. "우리에게 목숨을 주신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오. 나는 그대를 죽이지도 않고, 그대의 목숨을 노리는 저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지도 않겠소." 

17. 그러자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말하였다. "주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임금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바빌로니아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여야 한다. 그러면 너는 너의 목숨을 구하고, 이 도성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와 너의 집안이 모두 살아남게 될 것이다. 

18. 그러나 네가 바빌로니아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이 도성이 바빌로니아 군대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그들은 이 도성에 불을 지를 것이고, 너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19. 그런데도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바빌로니아 군대에게 투항한 유다 사람들이 두렵소. 바빌로니아 군대가 나를 그들의 손에 넘겨주면, 그들이 나를 학대할지도 모르지 않소?" 

20. 예레미야가 말하였다. "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제가 임금님께 전하여 드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래야 임금님께서 형통하시고, 임금님의 목숨도 구하실 것입니다. 

21. 그러나 임금님께서 항복하기를 거부하시면, 주님께서 저에게 보여 주신 일들이 그대로 일어날 것입니다. 

22. 보십시오, 유다의 왕궁에 남아 있는 여인들이 모두 바빌로니아 왕의 고관들에게로 끌려가면서 이렇게 탄식할 것입니다. '믿던 도끼에 발 찍혔다. 친구들이 너를 속이고 멋대로 하다가, 네가 진창에 빠지니, 너를 버리고 떠났다.' 

23. 임금님의 모든 아내와 자녀들도 바빌로니아 군대에 끌려갈 것이고, 임금님께서도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바빌로니아 왕의 손에 붙잡히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도성도 불에 타버릴 것입니다.

 

[Lumix gx9 / 20mm]

남북정상회담 가운데 은총을

 

평화의 주님이 이곳에 오신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지난 주 금요일 오전, 판문점에서 세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기사로 찾아보니 남북정상회담은 2000년 김대중 대통령 때 한 번, 2007년 노무현 대통령 때 한 번, 이렇게 두 차례가 있었던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1년 만에 이루어지는 회담이기에 그만큼 반갑고 또 기대가 큰 것이 사실입니다. 부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이번 회담과 세계 유일 분단국가인 이 나라, 이 민족 위에 가득하길 기도해봅니다. 

 

답답했던 말씀 묵상

 

원래 쓰임교회는 설교 때마다 교회력에 관한 말씀을 준비하는데, 오늘은 특별히 지난 달 가버나움 속회원분들이 하셨던 이야기가 맴 돌아 그 본문을 가지고 준비하게 됐습니다. 혹시 그 본문이 어딘지 생각나십니까? 예레미야 38장입니다. 그 때 저희가 나눈 질문은 이런 것이었죠. 왜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에게 항복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했는지 또 당시 남유다의 왕이었던 시드기야 왕은 왜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바빌로니아에게 항복하지 않았는지 질문을 나눴었습니다. 저는 이 질문들을 더 고민해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말씀을 묵상하며 좀 답답하긴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주님의 뜻이 나중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또 항복한다는 것은 무엇을 나타내기 위함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답답함이 있었지만 그래도 본문과 씨름을 시작해 보았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역사

 

오늘 본문의 전반적인 상황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민족은 두 개의 나라로 나뉘었습니다. 솔로몬 왕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으로 있을 때에 북쪽의 부족들이 왕에게 강제 노동과 세금 감액 등을 요구하며 백성인 자신들을 잘 돌봐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이 요구가 들어지지 않자 이들은 여로보암을 데려다가 자신들의 왕으로 삼게 됩니다. 이 일을 계기로 북쪽은 여로보암 왕이 중심이 된 ‘이스라엘 왕국’이 생겼고 남쪽은 르호보암 왕이 중심이 된 ‘유다 왕국’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주 칭하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라는 말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다 기원전 722년 북쪽 이스라엘은 호세아 왕 때,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북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남유다만이 남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후 남유다는 이민족의 침입을 자주 받습니다. 남유다는 지리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기에 늘 주변국인 바빌로니아나 앗시리아, 이집트 등에게 위협을 받거나 속국의 상태일 때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영향과 더불어 많은 왕들은 우상 숭배와 개인 욕심 때문에 짧은 재위 기간을 보내게 됩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드기야 왕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뜻

 

시드기야가 남유다 왕으로 재임하기 훨씬 이전부터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1장을 보면, 그는 일찍부터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치열한 시간을 보내다 시드기야가 왕으로 있는 현재의 시간에 당도했습니다. 당시 남유다는 이집트의 속국으로 이집트의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잠시 이집트의 군대가 철수했을 때에 강대국들이 늘 그러하듯 바빌로니아는 세력 확장을 위해 남유다를 침범하려고 했습니다. 그 시기에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 때문에 감옥에 갇히는 등 위태로운 시간을 보내다 시드기야 왕을 만나게 됩니다. 바빌로니아의 침입이 코앞까지 다가왔고 이런 긴박한 시기에 주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가운데 예레미야는 평소 우리가 예상하는 말씀을 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로 이러한 상황에 어떤 말씀을 기대합니까? 적들의 침입이 다가와도 주님의 말씀을 굳건히 붙들고 절대 굴복하지 말라는 말씀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주님의 뜻이라고 말하며, 바빌로니아의 침략에 항복할 것을 명합니다. 사실 이 부분이 우리를 고민에 빠뜨립니다. 마치 만왕의 왕이라고 하시는 주님께서 권능을 잃어버린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공격하거나 도망가는 것도 싸움의 일부

 

왜 예레미야는 주님의 뜻이라며 바빌로니아에게 항복하라고 했을까요? 물론 오늘 본문에는 이 항복의 결과가 왕과 그의 가족 그리고 백성들이 무사하기 위한 것(도성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라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러한 방식은 ‘평소 주님께서 일하는 방식은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습니다. 바빌로니아와 싸우려는 시드기야 왕과 바빌로니아에 항복하라는 예언자 예레미야! 이 둘의 입장에는 어떤 것이 감춰져 있을까요? 

 

저는 작년 다녀온 산티아고 순례길을 준비하며 그 길을 다녀온 사람들의 글 몇 개를 찾아 읽었습니다. 그 중에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가 쓴 <순례자>도 있었습니다. 읽어보신 분도 계시겠지만, <순례자>에는 산티아고 순례를 떠난 한 남성이 800Km가 되는 그 길 위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과 나누는 소박한 대화 그리고 영적 탐색 등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읽었던 한 대목이 오늘 본문을 묵상하는데 계속 떠올랐습니다. 여러분과도 나누면 좋을 것 같아 읽어드리고자 합니다. 

 

“위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선한 싸움을 이끄는 동안 

이 말을 결코 잊어버리지 마세요. 

또한, 공격을 하거나 도망을 가는 것도 

싸움의 일부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다만 싸움에 속하지 않는 것은, 

두려움에 마비된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문학동네, p.176) 

 

이 이야기가 여러분께는 어떻게 다가오십니까? 저는 이 부분을 읽다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 잡혔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싸움’에는 반드시 공격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싸움을 피해 도망가는 것은 무조건 패배로만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공격을 하거나 도망을 가는 것 모두 싸움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싸움에 속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선택해본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

 

그런데 저는 소설이 전하는 이 말이 더 깊은 차원의 무언가를 건드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영적인 싸움’이라는 표현을 자주 듣고 또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상에서 주님과 동행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이기에 ‘영적인 싸움’은 곧 삶 전반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을 대변합니다. 굳이 ‘영적싸움’과 ‘그 외의 싸움’으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삶을 ‘축제’와 ‘싸움’ 혹은 ‘축제’와 ‘전투’ 이 두 가지로 양분하여 정의해 볼 수 있습니다. ‘축제’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 다뤄보도록 하고 ‘싸움’ 혹은 ‘전투’로서의 삶을 한번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우리가 삶을 돌아봤을 때, 무언가 느껴지고 깨달음이 올 때가 언제입니까? ‘아, 그랬지’, ‘그랬었구나.’하는 생각이 들 때 말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고 났을 때입니다.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일들은 뒤돌아봤을 때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걸 선택한다는 게 쉽다는 말은 아닙니다. 선택은 늘 어려운 법입니다. 우리는 한 번의 인생만 살 수 있기에 어떤 것을 택했을 때 택하지 않은 것의 결과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예상은 가능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예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철학자 사르트르가 한말은 인간의 삶을 함축하는 말로 보아도 괜찮은 것입니다. ‘인생은 B와 D사이의 C다’라는 말말입니다. 인생은 Birth(탄생)와 Death(죽음) 사이의 끊임없는 Choice(선택)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무언가를 선택했던 기억을 한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어떤 선택은 굉장히 만족스러웠고 어떤 선택은 후회스러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선택해 본 사람은 무엇을 경험합니까? 앎입니다. 아는 것이지요. 알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삶을 잘 사는 것인지 혹은 어떤 선택이 주님께서 원하는 선택인지 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든 걸 알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바로 깨닫기 어렵습니다. 반드시 시간과 경험의 축적이 필요합니다. 실패를 통해서도 배우는 것입니다. 이 ‘앎’은 선택을 해 본 자, 주님과 함께 어떤 선택을 하고자 애썼던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인 것입니다. 

 

저는 <순례자>에서 말한 ‘싸움’을 이 ‘선택’의 차원에서 해석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싸움’을 두고 강력하게 맞서거나(공격) 또는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도망갔을 때(회피)는 반드시 기억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선택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 행위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공격하는 것뿐만 아니라 도망을 가는 것도 싸움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두려움에 마비된 채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는 자기 스스로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그래서 누군가 대신 해준 선택은 늘 찜찜함이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다른 길이 마련되어 있음을 알리는 항복

 

이야기가 너무 멀리까지 온 건 아닌 가 모르겠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본다면, 예레미야가 시드기야 왕에게 주님의 뜻이라며 항복하라고 했던 것을 저는 이 관점에서 해석해보려는 것입니다. 반드시 공격해야만 혹은 꼭 맞서야만 승리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지혜를 필요로 합니다. 어쩌면 예레미야는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힘에 의지하는 강대국들의 멸망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때에 따라 도망을 가는 것, 일시적으로 항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선택이 다른 길이 마련돼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항복은 타협이 아니라 지혜로운 전략이라고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요? 

 

결국 시드기야 왕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바빌로니아에 맞서다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물론 그가 바빌로니아를 맞선 것이 자신의 나라를 너무 사랑하여 혹은 주님을 향한 믿음이나 용기, 지조가 넘쳐서가 그랬던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본문 19절을 보면, 그는 자신의 체면을 매우 중요시 여기며 자신의 백성들에게 버려질까 두려움에 떨고 있는 걸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감과 물러섬 

 

사랑하는 쓰임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서 일하는 방식을 다 알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일하는 방식은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중심이 주님의 중심과 맞닿아 있다면 또 우리의 내면이 주님의 사랑으로 든든히 채워져 있다면 우리는 주님이 하시는 일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선 때론 나를 강하게 밀어붙이시기도 하고 때론 나를 물러서게도 하실 것입니다. 

 

반드시 나아갈 필요도 없고 반드시 물러설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마비된 채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할 때입니다. 물론 해야 할 선택이 있을 때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건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의 도움을 기다리느라 혹은 기도의 시간을 갖느라 의도적으로 ‘멈춤’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다만 우리는 나아감과 물러섬 모두에 주님의 뜻이 있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시드기야 왕을 향해 바빌로니아에게 항복해야 한다고 전한 것은 어쩌면 요즘 말로 주님께서 그리시는 ‘큰 그림’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선택 속에 주님을 모시되, 물러서고 후퇴하는 일 가운데에도 주님의 뜻이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하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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