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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아침을 기다리며

20180506 쓰임교회 주일설교 

 

아침을 기다리며 

 

<시편 30편 4-12절> 

 

4. 주님을 믿는 성도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여라. 

5. 주님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영원하니,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도, 새벽이 오면 기쁨이 넘친다. 

6. 내가 편히 지낼 때에는 “이제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겠지” 하였지만, 

7. 아, 태산보다 더 든든하게 은총으로 나를 지켜 주시던 주님께서 나를 외면하시자마자 나는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8.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었고, 주님께 은혜를 간구하였습니다. 

9. 내가 죽은들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내가 죽어 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한 줌의 티끌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한 줌이 흙이 주님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잇습니까? 

10. 주님,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 주십시오.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주님께서 나를 돕는 분이 되어 주십시오. 

11. 주님께서는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나에게서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을 갈아입히셨기에 

12. 내 영혼이 잠잠할 수 없어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영원토록 주님께 감사를 드리렵니다. 

 

 

시편 묵상 

 

평화의 주님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의 시편 묵상집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의 한 대목을 읽어드릴까 합니다. 최근 가볍지 않은 일이 제 삶에 발생했고 이 일을 두고 가만히 지켜보면서 과연 이를 통해 주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지 묵상하게 됐습니다. 그 기도시간의 연장으로 존경하는 김목사님의 책의 한 대목을 준비해 봤습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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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몸이 불편할 때도 있고, 마음이 불편할 때도 있다. 몸과 마음이 불편해지면 만사가 귀찮아진다. 고통이 지속되면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이게 어쩔 수 없는 사람의 한계인가 보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처럼 개운한 몸을 가져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것은 욕심일 뿐이다. 몸이 개운하지 않으면 마음도 덩달아 어두워진다. 그럴 때면 세상을 너그럽게 보지 못한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그러니까 마음이 어두운 사람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생의 위기를 경험한다. 그 위기가 근본적일 때 우리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런 체험 앞에서 사람은 땅이 꺼지는 한숨을 내쉰다. 눈앞이 캄캄하고, 살아갈 희망조차 스러져갈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는다. ‘아이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런 탄식에는 땅에는 공평함이 없어도 하늘은 공평해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소망이 담겨 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땅을 딛고 살고는 있지만, 실상 우리 삶의 토대는 하늘 곧 하나님이심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노염과 울음의 현실 시편 30편의 시는 죽음의 문턱에서 구원받은 사람의 감사 찬양이다. 그는 생명을 위협하는 병에 걸렸다가 고침을 받았다. 그는 산 자의 땅에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사소한 물건을 잃어버렸다가 되찾았어도 기쁜데, 생명을 되찾은 감격이 얼마나 크겠는가. 사람은 대게 자기가 일상적으로 누리고 사는 것들에 대해서 고마운 생각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늘 그곳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숨을 쉬면서 공기에 대해 감사하지 않고, 수도꼭지를 돌리면 쏟아지는 물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에 섰던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당연하지 않다. 모든 게 은총이고 선물이다. 시인의 고백은 그래서 더욱 절실하다. 

 

내가 편히 지낼 때에는 “이제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겠지”하였지만, 

아, 태산보다 더 든든하게 은총으로 나를 지켜주시던 주님께서 나를 외면하시자마자 

나는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6-7절). 

 

가만히 우리 삶을 돌아보자. 우리는 저마다 제 잘난 맛에 살지만 사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너’없이는 있을 수 없다. 하늘과 땅과 대기와 이웃들이 없는 ‘나’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생명은 서로를 기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댐의 궁극적인 근거가 되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시인은 하나님을 ‘태산보다 더 든든하게 은총으로 나를 지켜 주시던 주님’이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을 그렇게 인식한 것은 하나님의 외면하심을 겪은 후의 일이다. 그는 언제까지라도 평안하리라 생각하던 자기 삶이 토대로부터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였을 때, 비로소 자기의 평안한 삶이 하나님의 돌보심 때문임을 알았다. 

 

오늘의 현실을 돌아볼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계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함께 기대고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서로를 마치 원수인 양 대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착잡하다. 해마다 추곡수매가에 실의에 빠진 농민들의 시위는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핵 폐기장 건설을 둘러싼 시민들과 경찰의 충돌을 보면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다. 이주 노동자 추방 정책 때문에 하늘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가난한 나라 출신의 젊은이들을 보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지금 우리는 신뢰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근본적인 위기다. 구석구석에 울음이 깃든 땅에 살기에 우리 삶에는 평안함이 없다. 

 

▌희망은 하나님께 있다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모두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다. 이 물음은 우리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고치는 것처럼, 극지를 탐험하는 탐험가들이 때때로 멈추어 서서 지리측정시스템(GPS)을 통해 자기 위치를 확인하곤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 앞에서 우리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엘살바도르의 순교자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초월이란 사방이 막혀 있을 때 하늘을 보는 것’이라 했다. 신뢰상실과 사회적 갈등이 노골적인 폭력으로 드러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소란을 그치고 조용히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것만이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이다. 서로가 마음을 열고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심정으로 대화를 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오늘의 시인처럼 고백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진노는 잠깐이요, 

의 은총은 영원하니,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도, 새벽이 오면 기쁨이 넘친다(5절). 

 

우리가 어둠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믿기 때문이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사랑과 진실이 그지없으신 하나님’(시편86:15)이 우리 희망의 근거이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오실 메시야가 하실 일을 이렇게 노래한다. 

 

그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어둠 속에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누가복음 1:78-79). 

 

지금은 어둠이 지극한 것처럼 보여도 새벽이 밝아올 것이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아침을 내다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시간으로서의 아침은 우리가 애쓰지 않아도 밝아오지만, 역사로서의 아침은 우리의 노력을 요구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새 날을 기다릴 수는 없다. <지리산생명평화결사> 조직되었을 때, 그 결사에 동참하는 이들은 생활 속에서 일곱 가지를 실천했다고 다짐했다. 이것을 분열과 갈등의 땅에서 심는 하늘의 씨앗이라고 생각하여 소개한다. 

 

첫째,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겠습니다. 

둘째, 모든 생명을 우애로 감싸겠습니다. 

셋째, 대화와 경청의 자세를 갖겠습니다. 

넷째, 나눔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청빈하게 살겠습니다. 

다섯째, 모든 생명의 터전을 보존하겠습니다. 

여섯째,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고 실현하기 위한 길에 앞서겠습니다. 

일곱째, 끊임없이 깨어 공부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노력 없이 역사의 아침은 오지 않는다. ‘평화에 이르는 길은 없습니다. 평화가 곧 길입니다(There is no way to peace. Peace is the way).’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죽음의 위기를 벗어난 시인은 이제 자기가 살아 있는 한 하나님의 구원과 진리를 세상에 널리 알리며 살겠다고 다짐한다.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인생행로를 편안하게 해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험한 일이 다가와도 포기하지 않고 걸을 수 있는 힘과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자기의 능력과 의지에 기대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순간마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총에 기대 살아가는 사람이다. 

 

정현종은 그의 시 <사람은 언제 아름다운가>에서 “자기를 벗어날 때처럼/사람이 아름다운 때는 없다”고 노래한다. 자기로부터 벗어난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할 수 있다. 자기의 질긴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한 사람은 햇빛과 바람, 건강과 음식, 이웃과 친구에 대해 감사할 수 없다. 자기로부터 벗어난 사람이라야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고, 역사의 아침을 앞당길 수 있다. 예수님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가 자기를 철저히 비워 하나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역사의 아침을 기다린다. 지금 우리는 혼란 가운데 있지만 어둠을 향해 ‘빛이 생겨라’ 하심으로 빛을 만드신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모실 때 우리는 돋는 해 아침 빛 같은 주님의 은총을 맛보게 될 것이다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꿔 주시고,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으로 갈아입히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 믿음이 우리를 살게 한다. 불신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도 이 믿음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희망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는다. 인도에는 “어둠을 욕하기보다는 촛불 한 자루를 켜는 게 더 낫다”는 격언이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소박한 실천이다. 

 

지금 갈등 속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도 아파하실 것이다. 그 아픔을 덜어드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사랑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모든 생명을 우애로 감싸 안으려는 마음이 점점 커질 때 역사의 아침은 다가올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애쓸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신다.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 말이다. 이런 도우심을 알아차리는 사람들은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으로 갈아 입혀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모두 아침을 기다리며, 아침을 살아가는 생명의 사람들이 되기를…. 

 

김기석,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 꽃자리, p.191-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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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이중생활

문학과 여행 그리고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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