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청파 Note

[쓰임 Note]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라

20180513 쓰임교회 주일설교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라 

 

<요한1서 5장 9-13절> 

 

9. 우리가 사람의 증언도 받아들이거늘, 하나님의 증언은 더욱더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10. 하나님의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 관해서 증언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그 증언을 자기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 관해서 증언하신 그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1. 그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과, 바로 이 생명은 그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12. 그 아들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고 있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13.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인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생명을 전해준 사건들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께 가득하길 빕니다. 오늘은 부활절 마지막 주이자 어버이주일입니다. ‘부활’은 죽었던 예수가 다시 사신 ‘생명’을 드러내 보인 사건이었고 또 ‘어버이’는 자녀에게 ‘생명’을 전해준 분들을 상징하기에 오늘 말씀은 이 두 가지를 고려하여 ‘생명’에 관해 나눠볼까 합니다. 

 

예수를 통해 드러난 생명 

 

‘생명’에 관해 언급하는 성경구절은 많습니다만, 오늘은 특별히 요한1서에서 말하는 생명에 관해 살펴볼까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증언이 있는데, 그 증언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아들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이 하신 증언을 자기 속에 간직한 사람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증언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 11절부터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증언은 그분이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요한1서가 전해질 당시나 그 이전 그리고 지금까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전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생명, 영원한 생명은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해 드러납니다. 그렇기에 그의 아들 예수를 마음에 모신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생명을 간직한 사람입니다. 그럼 당연히 반대의 경우는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마음에 모시고 있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됩니다. 

 

세상의 것과 아버지의 것 

 

영원한 생명이라. 여러분, 그럼 이 ‘영원한 생명’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영원한 생명 혹은 영원한 삶은 죽음 이후 맞이하게 될 천국에서의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이 말씀의 힌트를 요한1서 2장15절 이후에서 찾게 됐습니다. 

 

2장15절을 보면 저자 요한은 세상에 있는 것과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먼저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음의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곧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 등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러한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냐면 이것들은 하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16). 그렇기에 누군가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람 속에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다고 말합니다(15). 

 

영원한 것들 쫓으라 

 

그런데 여러분, 한번 함께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몸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육체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우리는 잠을 안 자거나 먹지 않거나 일하지 않거나 걷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자 요한은 이러한 모든 것을 따르는 것이 세상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 관해 너무 고려하지 않은 발언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런 생각은 2장17절의 말씀을 통해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됩니다.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것들이 나쁘고 악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결국 사라져 없어질 것들을 쫓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그 사랑을 쫓으라는 말인 것입니다. 

 

예수가 보여준 사랑 

 

결국 오늘 본문 요한1서 5장에 언급된 ‘영원한 생명’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진 하나님의 그 사랑에 동참하라는 말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기 이전에 그 사람의 자리에 서보려는 것, 상대를 이해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신 분이 예수였습니다. 예수는 그렇기에 당시 소외되고 억압당했던 사람들의 삶에 공감했고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자 곧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보여주신 구체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속한 것’과 ‘하늘 아버지에 속한 것’을 단번에 비교해 알아채고 구분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채고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단번에 알아채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도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라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저는 육체의 욕망을 따르는 것이 곧 사라질 것을 따른다는 것을,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해 자랑하는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아는 것은 어느 정도의 시간과 경험이 쌓여야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마다 하늘 뜻을 알아차려 삶의 전환을 맞이하는 때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자신과 또 주위 사람들을 바라볼 때 인내심을 갖고 하나님의 마음을 날마다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에 입장하기 위한 노력 

 

사랑하는 쓰임교회 성도 여러분, 가톨릭 신자였던 일본 작가 엔도 슈사큐는 그의 책 <나의 하느님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것은, 소생이 아니라 하느님의 크나큰 생명 속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기에 참가한다는 것입니다.” 

 

(엔도 슈사쿠, <나의 하느님은>, 성바오로, p.179)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은 곧 예수가 보여주신 사랑의 삶에 초대받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번에 그 초대에 초대받아 입장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초대장은 벌써부터 우리 모두에게 전해졌지만 우리는 그 초대의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과 경험의 축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조급하지 않되 지나친 여유를 부리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이중생활

문학과 여행 그리고 신앙

www.youtube.com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