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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하나님의 뜻을 분별 하십시오

20180414 쓰임교회 주일설교

 

하나님의 뜻을 분별 하십시오

 

<사도행전 3장 12-19절>

 

12. 베드로가 그 사람들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어찌하여 이 일을 이상하게 여깁니까? 또 어찌하여 여러분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하기나 한 것처럼, 우리를 바라봅니까? 

13.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 예수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14. 여러분은 일찍이 그를 넘겨주었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작정하였을 때에도, 여러분은 빌라도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거절하고, 살인자를 놓아달라고 청하였습니다. 

15. 그래서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16. 그런데 바로 이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고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을 낫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은 그 믿음이 이 사람을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완전히 성하게 한 것입니다. 

17. 그런데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해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1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빌어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고 미리 선포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습니다. 

19.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죄 씻음을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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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반성의 달 4월

 

주님의 평화가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4월이 되면 많은 날들이 떠오릅니다. 가장 먼저 4월 3일은 아름다운 섬 제주에서 있었던 ‘4.3사건’이 떠오릅니다. 이념의 갈등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죽음을 맞았던 사건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4월 4일입니다. 이날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 서거 50주년입니다. 그는 흑인 민권운동의 족적을 남겼던 위대한 전도자입니다. 그리고 4월 9일은 독일의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순교일입니다. 그는 나치에 저항하며 끝까지 복음을 전한 위대한 신앙인입니다. 마지막으로 4월하면 떠오르는 생생한 날은 바로 4월 16일입니다. 벌써 4주년이 되었습니다. 4월 16일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가 침몰해 304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현재진행형인 슬픔이자 억울함입니다. 

 

이렇게 나열하다보니, 4월은 ‘슬픔과 반성의 달(月)’ 같기도 합니다. 부활절 세 번째 주를 맞은 오늘, 우리는 이 네 가지의 일들을 기억하며 앞으로 믿음의 사람이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야할 지와 또 믿음의 사람이 반성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걷지 못한 자에게 행한 이적행위

 

여러분, 우리가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야할 지와 또 반성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 뜻을 분별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 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또 그 뜻을 알기 위해 묻고 생각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이 발생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걷지 못하는 자를 구걸하게 하여 생계를 꾸릴 수 있게 하려고 그자를 날마다 성전 문 곁에 두었습니다. 그래도 당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서로 돕는 법을 알고 있었나봅니다. 때마침 베드로와 요한이 솔로몬 성전을 지나게 되었고 걷지 못하는 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매일 습관적으로 하던 일로 여기며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 몇 푼을 구걸했습니다. 

 

두 사람은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걷지 못하는 자는 무언가 얻을 게 있을 줄 알고 그들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은 그를 향해 이런 말을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6).”하며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기쁨으로 찬양했습니다. 12-19절은 바로 이 일이 있은 후, 이를 이상히 여기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베드로와 요한이 한 말입니다. 

 

예수를 죽음으로 이끈 그들과 우리

 

그들은 솔로몬의 행각에서 그들 주위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어찌하여 이 일을 이상하게 여깁니까? 또 어찌하여 여러분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하기나 한 것처럼, 우리를 바라봅니까?(12)” 그러니까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자신들이 이적을 행한 것은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거나 혹은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유난히 엄격한 경건주의자들이어서 그런 일을 행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일을 한 ‘주체자’는 누구라는 말입니까? 자신들은 도구 혹은 통로였지 이 일을 가능케 한 것은 주님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그저 그분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베드로는 이 일을 가능케 한 ‘주체자’에 관해 설명합니다. “여러분은 일찍이 그를 넘겨주었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작정하였을 때에도, 여러분은 빌라도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거절하고, 살인자를 놓아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고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을 낫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은 그 믿음이 이 사람을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완전히 성하게 한 것입니다(14-16).” 

 

정확히 따지고 보자면, 예수께서 죽으셨던 때에 그 자리에 있던 이들과 그리고 현재 베드로, 요한과 함께 있는 자들은 사실 무관한자들입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훨씬 후대의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들을 향해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준 장본인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곳에 있는 자들은 억울했을지 모릅니다. 자신들은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준 책임과 무관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 사건은 예수가 사는 동안 그가 보여악의 준 사건들과 또 예수에게 발생했던 사건들이 현재의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주어 십자가에 매단 것은 예수 처형 당시 그 현장에 있던 사람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고 또 예수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당시의 사건이 지금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요? 왜냐하면 그 일들은 각 시대마다 반복되어 나타났고 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현재도 진행형입니다. 

 

‘악의 평범성’과 ‘관료주의적 인간’

 

지금으로부터 약 70여 년 전, 역사적으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히틀러에 의해 발발되고 그는 그 일의 중심에 인종청소 즉, 유대인 학살을 배치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2차 세계대전이나 유대인 학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히틀러를 도와 유대인 학살의 실무를 맡은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라는 사람과 그의 공개 재판이 1960년 이스라엘에서 있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아이히만의 사건을 다룬 책과 영화가 있었죠. 무엇인지 아십니까? 독일계 유대인 철학자이자 정치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를 주인공으로 세운 책과 영화 <한나 아렌트>입니다. 

 

그녀는 유명한 개념 하나를 만들어냈습니다.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학살을 저지를 수 있는가?” 그런데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관했던 그녀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런 끔찍한 일을 자행한 사람은 그의 타고난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의 결여’ 때문이라는 것을 보고 말입니다. 아이히만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고 아내에게는 좋은 남편, 자녀들에게는 한 없이 친절한 아버지였습니다. 

 

이 사실에 충격을 받은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었고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관료주의적 인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아이히만의 ‘죄’는 단 하나 ‘생각하지 않은 죄’라고 말했습니다. 

 

왜 ‘무지’가 죄인 걸까?

 

다시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베드로는 방금 우리가 나눈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를 17절에서 전합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해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17).” 베드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것은 무지해서 즉, 자신들이 예수의 사랑,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고 또 그렇게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고 나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기에 그렇게 행동한 것임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어서 예수의 그런 죽음은 이미 제1성서인 구약에서 예언자들을 통해 예정되었던 것이기에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 이끌어가는 역사의 실패는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여러분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죄 씻음을 받으십시오(19).”라고 말하며 무지함에 관해 회개하여 죄 씻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무지하다는 것이 왜 ‘죄’가 되는 것일까요? 저는 이 근거를 성서의 한 사건과 역사의 한 사건에서 찾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와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를 하나의 맥락으로 보고자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솔로몬 성전을 거닐 그 시대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시대에도, 그 이후의 시대에도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옆 사람이 그렇게 하기에 자신도 그렇게 하며 살았습니다. 왜 그것을 하고 그렇게 해야 하는지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처형하는 것이 좋다고 하기에 나 또한 그것에 동의한 것입니다. 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야 하는지, 예수의 죄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모두가 그렇게 하기에 자신도 그렇게 결정한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않는 사람들

 

저는 이 ‘생각하는 힘’, ‘질문하는 힘’을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과 연관 지으려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묻지 않습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미 자신의 생각, 입장이 너무 뚜렷하여 묻지 않기도 하고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너무 힘들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이건 우리는 고민해야 할 문제나 판단 앞에 하나님의 뜻을 묻기보다 자신의 생각, 느낌, 감정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저 또한 이것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군중 속에서 살면서 생각하는 힘을 많이 잃었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저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관료주의적인 삶’ 때문에 스스로 판단하고 사유하는 힘을 잃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갈 당시 현장에 있지 않은 그 이스라엘 군중들도 공범으로 보는 것은 매시대마다 그런 일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한 채 악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소중한 생명을 죽이는데 앞장섰고 앞장서고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옆 사람이 하기에 나도 따라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나와 생각이 다르고 나와 다른 삶을 살고 다른 가치관과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을 정죄하고 미워하려 합니다. 차이를 인정하며 더불어 사는 법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실제로 목숨을 잃었고 또 죽지 않은 자들은 설자리를 잃었습니다. 수많은 전쟁, 테러, 정치싸움, 이념대립, 살인, 폭력 등과 같은 눈에 보이는 범죄와 또 가까이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의 일이 끊이지 않는 건 이런 이유 때문 아닐까요? 

 

우리 마음을 매순간 하늘 뜻에 비끄러매길

 

사랑하는 쓰임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베드로의 이야기와 함께 ‘악의 평범성’이 무엇인지 살펴봤습니다. 베드로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무지’를 회개하라는 것, 한나 아렌트가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했던 것을 곱씹어보시기 바랍니다. 

 

매순간 우리의 마음을 하늘 뜻에 비끄러매야 합니다. 혹자는 날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그런 시도들이 부담이고 스트레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에 거하며 그분의 뜻을 구하는 것이, 이 땅에서 자유해 보이지만 결국은 돈과 권력의 덫에 걸려 살며 그것이 감옥인지도 모르는 이들보다 훨씬 자유로운 삶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이켜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잔잔하고 고요하게 자신의 뜻을 전해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차분히 그분 앞에 두려는 자리를 늘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장소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해 그 장소를 마음으로까지 옮겨오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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