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청파 Note

[쓰임 Note] 주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20180527 쓰임교회 주일설교


주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시편 29편>

 

1. 하나님을 모시는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권능을 주님께 돌려드리고 또 돌려드려라. 

2. 그 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을 주님께 돌려드려라. 거룩한 옷을 입고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려라.

3. 주님의 목소리가 물 위로 울려 퍼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로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큰 물을 치신다. 

4. 주님의 목소리는 힘이 있고, 주님의 목소리는 위엄이 넘친다. 

5. 주님께서 목소리로 백향목을 쩌개고, 

6. 레바논의 백향목을 쩌개신다. 레바논 산맥을 송아지처럼 뛰놀게 하시고, 시룐 산을 들송아지처럼 날뛰게 하신다. 

7. 주님의 목소리에 불꽃이 튀긴다. 

8. 주님의 목소리가 광야를 흔드시고, 

9. 주님께서 가데스 광야를 뒤흔드신다. 주님의 목소리가, 암사슴을 놀래켜 낙태하게 하고, 우거진 숲조차 벌거숭이로 만드시니, 그분의 성전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같이, "영광!" 하고 외치는구나. 

10. 주님께서 범람하는 홍수를 정복하신다. 주님께서 영원토록 왕으로 다스리신다. 

11.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내리신다.

 

[Lumix gx9 / 20mm]

기쁨으로 이끄는 것이면


주님의 평화가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시편 말씀을 나눠 볼까 합니다. 시편은 ‘시 모음집’ 혹은 ‘시 묶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는 다윗과 솔로몬, 익명의 저자들을 포함해 여러 편의 시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그중 한 편의 시를 갖고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여러분께 들려주면 좋을 시 한 편이 있어 읽어 드릴까 합니다. 마리 하우(Marie Howe)라는 미국 여성이 쓴 <나의 죽은 친구들>이라는 시입니다. 


지치고 어떻게 해야 할지 해답을
알 수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떠난 친구들에게 의견을 묻는다. 그러면 종종 답이 나오고 분명해진다. 
이 직업을 선택해야 할까? 그 도시로 옮겨 가야 할까? 늦은 나이에 아기를 가져야 할까? 
그들은 일제히 서서 머리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다. 그들의 대답은 언제나 이것이다. 
무엇이든 기쁨으로 이끄는 것이면 그렇게 하라고. 더 많은 삶과 더 적은 근심으로 이끄는 것이면 

 

마리 하우, <나의 죽은 친구들>, 류시화 옮김

 

짧지만 힘이 있는 시입니다. 1950년생인 마리 하우는 사랑하던 남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담은 첫 시집 <산 자의 일>(What the Living Do)을 출간해 시인이 됩니다. 그녀는 우리가 어떤 고민에 빠져 있을 때 혹은 선택의 기로 앞에 놓여 있을 때, 나를 ‘기쁨’으로 이끌고 더 ‘적은 근심’으로 이끄는 것이면 그것을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같은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희생보다 기쁨을 먼저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평소 우리는 주님께서 희생을 더 원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기쁜 일을 쫓을수록, 기쁨을 잘 느끼는 사람일수록 이웃을 향한 희생을 조건 없이 해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이웃을 향해 헌신하라고 하신 것은 기쁘게 사는 사람들이 해야 할 당연한 의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쁨의 영이신 성령께서 여러분과 늘 함께 계시길 빕니다. 


위엄 있는 주님의 목소리

 

시편 29편은 다윗이 쓴 여러 편의 시 중 하나입니다. 다윗은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던 인물이기도 하지만 실수가 없던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오늘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주님의 목소리’를 힘차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고백을 다시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시 서두를 보면 그는 주님의 영광을 높이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권능을 주님께 돌려드리고 또 돌려드려라. 그 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을 주님께 돌려드려라. 거룩한 옷을 입고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려라.” (1-2)

 

그는 하나님의 영광에 깊이 감동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님의 목소리’에 대한 그의 고백이 이어집니다. 이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목소리는 힘이 있고, 주님의 목소리는 위엄이 넘친다. 주님께서 목소리로 백향목을 쩌개고, 레바논의 백향목을 쩌개신다. 레바논 산맥을 송아지처럼 뛰놀게 하시고, 시룐 산을 들송아지처럼 날뛰게 하신다. 주님의 목소리에 불꽃이 튀긴다. 주님의 목소리가 광야를 흔드시고, 주님께서 가데스 광야를 뒤흔드신다. 주님의 목소리가, 암사슴을 놀래켜 낙태하게 하고, 우거진 숲조차 벌거숭이로 만드시니, 그분의 성전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같이, “영광!”하고 외치는 구나.” (4-9) 

 

다윗의 표현을 들은 느낌이 어떠하십니까? 엄청난 위엄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주님의 목소리’는 산과 광야와 숲을 자유자재로 갖고 노십니다. 그분을 상대할 존재는 이 세상에 없어 보입니다. 


나지막한 주님의 음성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정말 자신의 귀로 ‘주님의 목소리’를 들은 것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다윗이 ‘주님의 목소리’를 내면 깊은 곳에서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의 가슴 깊은 곳에 주님의 마음이 강렬하게 가닿았다고 생각됩니다. 


평소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할 때는 언제입니까? 반드시 사람이 가진 언어를 통해 들었을 때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주로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어떤 때는 작은 손짓으로, 어떤 때는 책으로, 또는 어떤 도움의 손길을 통해서 찾아오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과 고난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정말 다양하며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입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좀 더 유심히 살펴야 할 부분은 여기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다윗의 고백은 ‘샘물’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그가 어떠한 이유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하나님의 영’이 다윗 위에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어떻게 하나님과 이런 일치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일까요? 


함께 읽은 시편 29편 소제목은 ‘폭풍 속 주님의 음성’입니다. 그는 폭풍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폭풍으로 인해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살아오며 그간의 삶이 너무 험난하고 힘들어 앞으로의 삶은 그저 별 탈 없이 지나가길 바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전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이런 생각도 해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계속 안정적일 수 없다는 것과 그리고 무탈하기만 한 삶에는 반드시 무기력한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현재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즘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으로 다가옵니까? 평소 여러분은 여러분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느끼십니까? 시편 속 다윗은 살아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숨만 쉬는 존재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 가득 찬 하나님의 선물을 보았고 또 그분의 뜻을 몸으로 살아냈습니다. 


낯선 시도가 필요한 법이다

 

그럼 우리는 다윗 같은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말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또 하나님이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우리는 어떤 시도를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아는 한 선생님은 시골에 살며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참조: 한상봉, <너에게 가고 싶다>, p.51)


낯익은 것들을 낯선 눈으로 보기 위해서는 때때로 일상을 벗어나 있을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기 위함인데, 도시에 살 때는 특별하지 않던 사소한 사물마저 시골에 살다 보면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게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쓰임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끈끈해지기 위해서는 때론 고요와 침묵을 필요로 하지만 한편으로는 낯선 시도 또한 필요한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번 만나는 사람들 뿐 아니라 낯선 사람들도 만나고 낯선 장소나 공간에 가보기도 하며 낯선 시도와 모험도 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상과 잠시라도 거리를 두어야 하는 이유는 이해의 폭을 넓히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또 하나님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지혜도 제공해 줄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첫 번째 주입니다. 거룩한 영이신 성령과 함께 낯선 곳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 살아있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우리 모두가 되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www.youtube.com

 

728x90
728x90

'@ 청파 Not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쓰임 Note]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0) 2018.06.03
20180603 쓰임교회 주보  (0) 2018.06.03
20180527 쓰임교회 주보  (0) 2018.05.26
[쓰임 Note] 떠난 분에 이어 오신 분  (0) 2018.05.20
20180520 쓰임교회 주보  (0) 2018.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