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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하나님의 기준

20181111 쓰임교회 주일설교 

 

하나님의 기준 

 

<마가복음 12장 38-44절> 

 

38. 예수께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41. 예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 많이 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44.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율법학자와 심판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길 빕니다. 

 

우리는 사람이기에 누군가를 판단하는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싫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즉각적인 반응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을 모든 판단의 기준점으로 삼는 세상에는 평화가 깃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더 의미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12장 후반부의 말씀은 평소 우리가 자주 듣고 또 읽었던 말씀 중 하나입니다. 예수께서는 무리를 향해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당부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38-40)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게 나쁜 것일까요? 나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복’은 잘 갖춰진 옷으로 자신의 신분과 권위를 드러냅니다. 그런 옷을 입고 다닌다는 건 스스로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고 자신이 일반 사람들보다 더 낫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예복을 입고 장터에 나가면 그는 백성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을 테고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율법학자와 같은 사람들은 일관성 있게 행동합니다. 그들은 회당이나 잔치에 가서도 높은 자리에 앉아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당연히 이들은 대접하기보단 대접 받기를 좋아합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학자와 같은 이들은 남에게 보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회당에서 기도할 때 다른 이들보다 더 길게 기도합니다. 어떤 깊은 차원의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인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이들을 일러 엄한 심판을 받을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과부와 두 렙돈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기도 하는데, 이 이야기는 41-44절에 자세히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회당에 앉아 사람들이 어떻게 헌금함에 헌금을 하는지 지켜보았습니다. 예수는 부자들이 넉넉히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한 가난한 과부가 오더니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렙돈 혹은 렘돈(copper, coin)’은 그리스 곧 헬라 세계의 최소 동전 단위입니다. 그리고 ‘고드란트(Penny)’는 청동으로 된 로마의 최소 동전 단위입니다. 그런데 이 고드란트는 렙돈 두 배의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니까 과부가 헌금한 렙돈 두 닢이 곧 한 고드란트와 같은 금액인 것입니다. 

 

어쨌든 과부는 두 렙돈 즉 한 고드란트를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부자와 과부의 이 대조적인 모습을 보시고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43-44).” 

 

물론 본문에는 부자가 헌금한 액수가 등장하진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금액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비교되지 않을 만큼 크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께서 헌금의 액수를 설명하고자 함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기준에 따라, 자기 삶의 기준에서 그 금액의 가치를 보아야 합니다. 100 고드란트나 1000 고드란트는 분명히 많은 금액임에도 불구하고 부자의 재산 기준에서 본다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과부가 가진 재산이 2-3 고드란트라면 그 중에 한 고드란트를 헌금했다는 것은 자기 재산의 전부를 낸 것과 맞먹을 것입니다. 물론 방금 제시한 금액들은 제가 상상해본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이 헌금을 열심히 하자, 헌금의 금액을 높이자, 를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돈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사람의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때도 돈을 내고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차이가 납니다. 자기 돈을 투자하고 돈을 쓴 곳에 자신의 마음이나 의지 혹은 그 이상의 무엇이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비교하신 것은 단순히 헌금의 액수에 관해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관해 판단하거나 혹은 다른 누군가에 대해 판단할 때 그 판단의 기준이나 근거를 자신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기준과 개인이 갇힌 문맥 

 

여러분께서는 ‘기준’이 뚜렷한 사람입니까? 이 일은 좋은 일이고 저 일은 나쁜 일이다,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이 일은 잘 못 된 거고 저 일은 잘 된 일이다, 등의 기준 말입니다. 물론 사람은 기준이 없을 수 없으며 기준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두터워지기도 합니다. 삶의 경험이 축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때로 그 기준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로 막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성찰을 해야 합니다. 

 

성공회대 석좌교수였던 신영복 선생님의 책 <담론>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좀 어려운 말이긴 하지만 그는 우리가 한 사람 혹은 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맥’을 알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의 생각에 갇혀서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다른 것들을 판단합니다. 한 개인이 갇혀 있는 문맥 그리고 한 사회가 갇혀 있는 문맥을 깨닫는 것은 어쩌면 당대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 시대를 역사적으로 바라보면 그 시대가 갇혀 있던 문맥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당대 사회를 성찰한다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성찰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신영복, <담론>, 돌베게, p.153 

 

그렇죠. 사람들은 대개 자기의 생각에 갇혀, 자기를 기준으로 많은 것을 판단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사회를 잘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지나온 역사, 그 시대의 문맥을 읽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영복 선생님은 그게 너무 어려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오죽하면 한 개인이나 사회가 갇혀 있는 문맥을 깨닫는 것은 당대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고까지 말했으니 말입니다. 

 

자기 기준 내려놓기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누군가를 잘 이해하고 나 혹은 내 주위에서 발생한 어떤 사건을 잘 판단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자신의 옮음을 자꾸 내려놔야 합니다. 자신의 기준을 하나님의 빛에 계속 노출시켜야 합니다. 

 

오늘 예수께서 하신 말씀도 마찬가지죠. 당연히 가난한 과부가 한 헌금은 부자의 헌금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각 사람이 처한 상황과 그가 살아온 삶의 내력을 모른 채 내린 섣부른 판단입니다. 각 개인의 기준에서 본다면 부자의 헌금은 자신이 가진 재산의 극히 일부였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자신이 가진 재산의 거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나를 기준에 세워두고 각 사람과 상황을 보면 우리는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꾸만 나의 생각과 판단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야 합니다. 그래서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어떤 일과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 있어서 하늘이 주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평생 지켜야 할 사회적 기준 

 

그런데 이렇게 이미 당연하게 여겨 굳어버린 사회의 기준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 수용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한 것들에 무엇이 있을까요? 

 

그러한 것들에는 무엇인지 책에서 찾아보게 됐습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책 <오자히르>에 잘 정리되어 있어서 그것을 여러분들께 읽어드릴까 합니다. 

 

“전능한 자히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탄생과 함께 태어나고, 그가 아이일 동안에 평생 지켜야 할 규칙들을 세움으로써 온전한 힘을 차지하는 듯했다. 그 규칙들은 이렇다. ​ 

 

1. 나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위험하다. 그들은 다른 종족에 속하며, 우리의 땅과 우리의 여자들을 원한다. 

2. 우리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인간 종을 번식시켜야 한다. 

3. 사랑은 작아서, 그 안에는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 마음은 사랑 그 자체보다 커서 여러 사람을 위한 자리가 있다고들 하는데, 그건 헛소리다. 

4. 결혼을 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육체와 영혼을 소유할 권한을 갖게 된다. 

5. 우리는 싫어하는 일도 해야 한다. 조직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한다면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6. 우리는 우리가 같은 집단에 속한다는 걸 드러내줄 장신구를 착용해야 한다. 피어싱 역시 동족을 알아보게 해주는 징표다. 

7. 우리는 늘 유쾌해야 하고,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을 냉소해야 한다. 집단의 구성원 중 누군가가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도록 내버려두는 건 집단 전체에 위험하다. 

8.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사람들은 '예'라고 말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래야만 우리는 이호전적인 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9.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가보다 더 중요하다. 

10. 공연히 소란을 떨지 마라. 그랬다간 적들의 주목을 끌 수도 있다. 

11. 만약 다르게 행동한다면, 너는 무리에서 추방될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다른 사람들을 감염시키고, 그토록 힘들여 조직해낸 것들을 와해시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2. 우리가 기거할 동굴을 어떻게 꾸밀지 늘 고민해야 한다. 잘 모르겠다 싶으면 실내장식가라도 불러야 한다. 그는 우리가 훌륭한 취향을 가졌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13.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하루에 세 번 식사해야 한다. 반대로 현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상적인 미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배가 고프더라도 굶어야 한다. 

14. 유행에 따라 옷을 입고, 하고 싶든 아니든 섹스를 해야 한다. 국경을 빌미로 전쟁을 벌여야 하고, 어서 빨리 시간이 흘러서 은퇴하기를 바라야 한다. 정치가들을 뽑아야 하고, 물가 인상에 대해 불평해야 하고, 머리 모양을 바꿔야 하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해야 한다. 각 종교에 따라서 일요일, 토요일, 또는 금요일마다 예배에 참석해야 하고,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우리의 진리를 알고 잡신을 섬기는 다른 종족을 경멸하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 

15. 어린 사람들은 우리를 본받아야 한다. 우리가 나이가 더 많고 세상 물정을 알기 때문이다. 

16. 대학 졸업장을 따야 한다. 설령 남들의 강요에 의해 전공을 선택할 수밖에 없고, 일자리를 구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졸업장은 필요하다. 

17. 쓸모없는 것들, 하지만 알아두면 좋다고 누군가가 말한 것들, 예를 들어 대수학, 삼각법, 함무라비 법전을 공부하라. 

18. 부모님을 슬프게 해선 안 된다. 비록 네 마음에 드는 것을 모두 포기하게 될지라도. 19. 음악은 작은 소리로 듣고, 조용조용 말하고, 남들 앞에서 울지 마라. ​ 나는 전능한 자히르니, 게임의 규칙들, 평생으로 달리는 두 선로 사이의 거리, 성공의 의미, 사랑하는 방식, 보답의 중요성을 정한 자이다.” 

 

파울로 코엘료, <오자히르>, 문학동네, p.353-356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쓰임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는 가난한 과부와 부자의 헌금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기준을 내려놓고 그 사람의 입장에 서 볼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일을 연습하고 연습해서 자기를 극복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초석이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나 자신의 기준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시길 바랍니다.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거울 앞에 비춰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을 우리 가슴에 새겨달라고 요청하십시오. 주님의 은총이 반드시 우리를 사랑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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