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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성서학당] 사랑이 한 일: 야곱의 사다리

20211202 청파교회 목요 <성서학당> : <창세기> 속 아브라함 일화 새로 보기!

 

사랑이 한 일: 야곱의 사다리

 

<창세기 28장 10-19절>

 

10.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으로 가다가, 

11.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었으므로,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거기에 누워서 자다가, 

12.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13. 주님께서 그 층계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주,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14.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동서 남북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 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너와 너의 자손 덕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16. 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혼자 생각하였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17. 그는 두려워하면서 중얼거렸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 곳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18. 야곱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베개 삼아 벤 그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베델이라고 하였다. 그 성의 본래 이름은 루스였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안녕하세요. 여섯 번째 목요 <성서학당>이자 이번 학기 마지막 <성서학당>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아브라함의 일가 가운데 마지막 순서인 야곱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함께 나눌 이야기는 이 한 단락으로 요약이 가능해 보입니다. 

 

일어났던 일, 일어나기를 바라는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야곱은 알지 못했다. 일어난 일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모든 일에는 처음 일어나는 순간이 있다는 것, 아직 일어나지 않은, 여건이 무르익어 때가 되면 마침내 일어나고야 말 아주 많은 일들이 있다는 것, 땅의 의지를 뛰어넘는 하늘의 작용이 있는 것처럼 바라지 않아도 일어나고 꿈꾸지 않아도 나타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199

 

지난 시간 우리는 <허기와 탐식> 이야기를 통해, 이삭과 그의 두 아들의 관해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맏아들 에서를 편애했지만, 아버지의 축복은 둘째 아들인 야곱이 받게 됩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래서 형에게 돌아갈 축복을 대신 받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에서는 너무 화가 나 야곱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습니다. 평소 야곱을 편애하던 어머니 리브가도 이번만큼은 그를 도와줄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둘을 떼어놓습니다. 어머니는 두 형제를 화해시킬 방법을 찾지 못해 그들을 멀리 떨어뜨려놓습니다. 야곱이 결혼 적령기가 됐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서 말입니다. 하지만 야곱이 떠나게 된 계기는 죽음의 위협으로부터의 도피였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처음으로 긴 여행을 떠납니다.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미지의 땅, 불확실한 세계를 향해 한 걸음 내딛습니다. 그는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외삼촌의 딸들 가운데 아내가 될 사람을 찾습니다. 그는 그렇게 긴 세월을 보내며, 형 에서의 분노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삭의 가족이 살던 브엘세바에서 라반이 있는 하란까지는 꽤 먼 길이었습니다. 하란은 메소포타미아에 자리 잡은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입니다. 야곱은 그렇게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걷게 됩니다. 

 

운명이라는 게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하는 길이 있습니다. 바로 야곱이 걸은 이 길, 다시 말해 우리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통해 한 단계 성장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성장 이야기는 곧 여러분의 인생 이야기이도 한 것입니다. 

 

고아의 상태로 태어난 자

 

아버지 이삭은 첫째 아들 에서를 편애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리브가는 둘째 아들 야곱을 편애했다. 참 흥미롭습니다. 리브가는 마치 남편의 편애를 보며, 또 다른 편애로 관계의 균형을 맞추려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1. 야곱이 자신에게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부여한 것과 또 전에 2. 하나님께서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창25:23)’라고 하신 말씀을 편애의 근거로 사용했습니다. 

 

그녀는 사냥을 좋아해서 밖으로만 나돌아다니는 큰아들보다 집안에 머물며 자기의 말 상대가 되어주는 작은아들을 더 사랑했다. 큰아들은 제 할일을 알아서 했기 때문에 사랑을 베풀 기회가 상대적으로 없기도 했다. 남편이 큰아들에게 더 마음을 주는 것처럼 보여 작은아들에 대한 자신의 편애가 균형을 맞추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을 임신했을 때 여호와로부터 받은 예언의 말이 그녀의 마음속에 붙박여 있기도 했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여호와는 그렇게 말했다. 자라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 말이 떠올랐다. 그 예언의 문장은 그녀로 하여금 그 예언의 실현에 가담하도록 은근히 종용했다. 혹은 자신의 편애를 정당화할 근거로 그 예언의 문장을 이용했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180

 

두 형제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균형을 잘 맞춘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관여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입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동생을 향해 품은 형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었습니다. 형제 사이에 일어난 일은 부모가 도울 수 있는 한계점을 넘어섰습니다. 결국 야곱은 부모 곁을 떠나 외삼촌의 집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으로 홀로서기를 합니다. 그것도 엄청난 고독 속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바로 그 고독을 통해 하나님과 같은 관계를 맺게 되고, 이 관계 맺음이 그의 성숙 혹은 성장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제 그는 혼자였다. 처음으로 혼자였다. 혼자인 그는 처음으로 제 의지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그를 대신해서 어떤 일을 해줄 사람도 없고, 그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지시할 사람도 없었다. 간섭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보호해줄 사람도 없었다. 보호를 간섭으로 여기는 사람은 떠나지만 간섭을 보호로 여기는 사람은 떠나지 않는다. 형과는 달리 야곱은 떠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떠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장막 안이 가장 안전했다. 형과는 달리 익숙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그에게는 없었다. 낯선 것, 생소한 것, 미지의 것, 서먹한 것을 그는 꺼렸다. 그는 친숙하고 안전한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걸 원치 않았고, 그래본 적도 없었다. 그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장막의 사람이었지 길 위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 스스로 자기를 길 위에 세울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어쩔 수 없이 장막을 떠나 길 위에 혼자 있었고,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가늠하지 못했다. 그는 오는 미래를 단순히 맞이하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가는 사람, 가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미래는 그가 가보지 않은 곳이었다. 무엇이 있을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이었다. 무엇이 있을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태를 그는 원하지 않았다. 떠나지 않을 수 있다면 떠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184-185

 

여러분은 어떤 취향의 사람이십니까? 하나만 골라보시기 바랍니다. 떠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십니까 아니면 한곳에 오래 머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십니까? 다르게도 표현 가능합니다. 여러분께서는 모험을 좋아하는 편이십니까 아니면 안정을 중요시 여기는 편이십니까? 물론 우리는 두 가지 속성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면서도 모험을 향한 갈망이 있고, 반대로 모험과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안정을 향한 갈망을 버릴 순 없습니다. 인간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다보면, 안전한 곳을 벗어나 모험의 길을 걸어야 할 때와 마주합니다.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 내몰려서 그 길을 걸을 수도 있고 또 어떤 내면의 욕구에 이끌려 자발적으로 그 길을 걸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우리 안에는 두 가지 욕구가 늘 공존하는데, 모험이 됐든 안정이 됐든 갑작스레 하나님의 그 낯선 초대장이 날아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막의 사람 야곱이 부모님 곁을 떠나는 것은 그를 성장시키실 하나님의 낯선 초대였습니다. 

 

야곱은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혼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를 위해 친절히 일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 모든 일을 선택해야했고 또 책임져야 했습니다. 그는 이승우 작가의 말대로 ‘이제 막 태어난 자였고,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된 자’였습니다. ‘고아의 상태로 급히 태어난’ 것입니다. 

 

탑 이야기(바벨탑 사건)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의 울음소리와 바람소리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어디서 무엇이 나타날지 몰라 몹시 무서웠습니다. 제가 산티아고 순례를 할 때, 몇 번 이른 새벽에 떠났던 적이 있었는데, 통이 트기 전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동행이 있긴 했지만, 어디서 산짐승이 튀어나올지 몰라 겁이 났었습니다. 또 갑자기 낯선 사람을 만주하게 될까 두렵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아주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혼자였던 야곱은 더 무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잠도 자지 않은 채 계속해서 걸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낯선 장소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물론 잠은 오지 않았습니다. 몸이 땅속으로 파고들 정도로 노곤한데도 잠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그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아주 생생한 꿈 하나를 꾸게 됐습니다. 

 

야곱은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흥미 있게 듣고 인상 깊게 기억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탑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에게 너무 강한 인상을 줘서 잊을 수 없었습니다. 너무 강렬해서 한 번만 들어도 잊히지 않을 그 이야기를 그는 여러 번 들었습니다. 야곱이 들었던 ‘탑 이야기’는 이러했습니다. 

 

그때 도시를 만든 사람들은 하늘에 닿을 탑을 쌓자고 합의했다. “탑을 쌓아 하늘까지 올라가자.”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떨치자.” “우리는 흩어지지 말고 한데 모여 살자.” 그들은 하늘을 탐냈다. 하늘의 작용 아래 있어야 하는 땅의 사람인 그들은 하늘에 올라가 그 작용을 취하고자 했다 (...) 탑은 어떤 나무보다 성장 속도가 빨랐다. 어떤 나무보다 곧게 뻗어올라갔다. 하늘에 도달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 그러나 하늘은 손에 닿지 않았다 (...) 하늘은 달아났다. 그들이 올라온 만큼 올라갔다. 그들이 높아진 만큼 높아졌다. 그것이 하늘의 부동성이었다. 그것이 사람들이 움직여서 이룬 높이와는 다른 하늘의 부동의 높이였다. 사람들이 움직여서 높아져도 하늘은 움직이지 않고 높은 채로 있었다. 


(...) 다른 의견이 생겼으므로 다른 말을 할 이유가 생겼다. 목소리들이 많아졌다. 여러 말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하던 대로 계속 탑을 쌓아 기어이 하늘에 이르자고 말하는 사람이 여전히 있었으나, 그러나 그 말은 이제 유일한 말이 아니었다.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아 이름을 떨치고 흩어지지 말자고 말하는 사람이 아직 있었으나 그 말은 이제 다른 수많은 말들 가운데 하나였다. 각자 자기 말을 했다. 각자 자기 말만 했다. 다른 사람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각자 자기 말만 마구잡이로 했다. 말들은 뒤섞였고 혼잡해졌고 서로는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공사는 중단되었고, 탑에서 땅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땅 위로 흩어졌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191-194

 

이 ‘탑 이야기’는 우리가 ‘바벨탑 사건’으로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바벨의 이야기는 성경에 드러난 인간의 여러 욕망 가운데 가장 높은 욕망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갖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 욕망들은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나면, 남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늘에 닿는 것입니다. 하늘에 닿는다는 것은 달리 말해 무엇을 뜻하나요?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신의 영역까지 가닿으려는 욕망이 바로 하늘에 닿는 것입니다. 

 

결국 이 바벨 사건 마지막은 어떻게 됐나요?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창1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아는 바는 탑을 짓는 사람들이 모두 공통의 언어를 썼다는 것이고, 언어의 동일성은 그들을 하나로 뭉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그들이 하는 일을 더 이상 묵인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사에 개입하셔서 그들의 언어를 뒤섞어 놓았습니다. 물론 ‘언어를 뒤섞어 놓았다’는 말이 한국어, 영어, 일본어 등 각 나라말을 사용했다고도 볼 수도 있지만 조금 다르게 볼 수도 있습니다. 

 

이승우 작가는 시간이 흐르고 또 노동의 피로가 더해지면서 점점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보았습니다. 불평불만의 목소리가 많아진 것입니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고, 각자 자기 말만 했습니다. 오늘 나눌 이야기가 바벨탑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참 유의미한 것 같습니다. 각자 자기 말만 하는 세상이 바로 언어가 달라진 세상이고, 각자 자기 말만 하는 세상이 곧 우리가 흩어진 세상인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곁에 있는 이들과 같은 언어를 쓰고 계신지요? 

 

야곱을 부르는 목소리

 

그런데 야곱이 꿈에서 본 환상은 정반대의 환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늘로 올라가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오히려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보았다.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보았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사람들을, 그들은 그 탑을 사다리처럼 타고 하늘에서 땅을 향해 내려왔다. 아주 오래전에 그가 들은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은 탑을 타고 올라갔다. 아니, 올라가기 위해 탑을 만들었다. 탑을 만들면서 올라갔다. 그러나 그는 올라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려오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이 내디딘 한 걸음이 한 층이었다. 그들은 한 층을 한 계단처럼 걸어서 내려왔다. 그 완전한 수직의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탑은 사다리가 되어 있었다. 그 탑사다리는 별빛으로 빛났다. 별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니 그럴 수밖에. 그들이 움직이면 주변에 흰빛이 뿌려지는 것 같았다. 야곱은 그들이 천사들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전에 천사를 본 적이 없는데도 그들이 천사라는 사실이 곧바로 깨달아졌다. 그 깨달음은 그의 내부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그에게 찾아온 것 같았다. 누군가 그의 손에 쥐여준 것 같았다. 어떤 천사들은 아래로 계속 내려오고 어떤 천사들은 방향을 바꿔 위로 올라갔다. 야곱은 내려오는 어떤 천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 천사가 자기에게 오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향해 손을 들었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197-198

 

야곱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에서 층계를 보았습니다. 층계, 곧 사다리는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이어져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층계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꿈은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분명했습니다. 야곱은 이런 경험을 처음 해보았습니다. 이 경험은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하거나 상상해본 적 없는 그런 경험이었습니다. 

 

일어났던 일, 일어나기를 바라는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야곱은 알지 못했다. 일어난 일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모든 일에는 처음 일어나는 순간이 있다는 것, 아직 일어나지 않은, 여건이 무르익어 때가 되면 마침내 일어나고야 말 아주 많은 일들이 있다는 것, 땅의 의지를 뛰어넘는 하늘의 작용이 있는 것처럼 바라지 않아도 일어나고 꿈꾸지 않아도 나타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199

 

이 이야기 기억하시지요? 오늘 강의 서두에 말씀드린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처음 보는 광경에 넋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자신을 부르는 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그 목소리가 어디로부터 들려오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그의 위에 있었고, 그의 앞에 있었으며, 그의 뒤에도 있었습니다. 그의 존재는 세상에 편만했습니다. 야곱은 이 일 또한 처음 겪습니다. 꿈에서도 바란 적 없는 일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자기를 부른 목소리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세상 천지에 가득한 그의 존재에 압도당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제단 앞에서 하던 것처럼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순간 내면의 모순을 느꼈습니다. “만나기를 바란 적 없는 것이 확실한데도, 만나기를 간절하게 원해왔던 것처럼 여겨지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꼭 만나야만 하는 존재라면, 이 시간만큼 좋은 때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순간

 

거의 최초로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존재, 고아이고 나그네가 된 시간에, 크게 두렵고 깊이 외로운 그의 밤 광야의 자리로 그분은 찾아왔다. 찾지 않았는데 찾아왔다. 마치 그가 가장 두렵고 가장 외로워지는 처지에 놓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202

 

하갈 이야기 때도 이야기 나눴지만, 하나님께서는 주로 절망의 순간, 인간의 의지가 완전히 꺾인 가장 밑바닥 상태의 순간에 찾아오신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좀 기분 좋을 때 찾아와주시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인간에게는 여러 감정이 있습니다. 모든 감정은 소중하지만, 여러 감정 중에 어떤 감정을 가장 소중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슬픔입니다. 왜 슬픔일까요? 우리는 주로 슬플 때 새로운 것이 유입되는 걸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쁘거나 화날 때는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박노해 시인은 이런 시를 썼습니다. 

 

내가 먼저 눈물 흘리고 상처받지 않고서 
무엇으로 내 안의 숨은 사랑이 살아오르고 
그대 슬픔과 고통에 가닿을 수 있겠는가 


박노해

 

그렇죠. 내가 먼저 눈물 흘리고 상처받아봐야 누군가의 슬픔과 고통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야곱이 홀로 떨어진 순간, 마치 그가 가장 두렵고 가장 외로워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알았습니다. 자신에게 이전과는 다른 시간이 펼쳐지고 있음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13. "나는 주,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14.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 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너와 너의 자손 덕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창세기 28장 13-15절>

 

처음에 야곱은 자기가 들은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가 들은 말들이 메아리가 되어 마음에서 울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시겠다는 약속, 자신을 지키시겠다는 약속이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걸 느끼게 됩니다. 그 말씀은 자기 안에 뜨거운 불이 되어 그의 가슴에서 타올랐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울음을 터뜨렸다는 사실 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 안에서 그렇게 큰 울음이 나왔다는 사실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 자기보다 잘 아는 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들은 말은, 그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 순간 그의 영혼이 듣고 싶어 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혼자였고 외로웠고 두려웠다. 너와 함께하겠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겠다. 그 말은 광활한 세상 한복판에 벌거숭이로 던져진, 고아나 마찬가지인 그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으나 그 말을 들을 때까지 그는 그 필요를 의식하지 못했고, 의식했다고 하더라도 차마 요청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라면 아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203

 

야곱은 그동안 하나님과 친밀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이삭이나 할아버지 아브라함만큼 하나님과 친밀감이 없었습니다. 아니, 거의 없었다고 해도 무방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 겁니다. 그것도 먼저 말입니다. 그리고 찾아오신 하나님은 야곱이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그를 축복하시며 미래를 약속하십니다. 

 

그는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1. 자기가 아버지의 아들이고 할아버지의 손자라는 것을 그리고 2. 자신이 여호와의 약속의 혈통이라는 것을 그리고 3. 할아버지가 받고 아버지기 이어받은 그 약속이 자신에게도 이어져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는 결국 혼자가 되어서야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그 지역이 ‘루스’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 경험 이후 그곳을 ‘여호와의 집’이라는 의미의 ‘베델’로 부르게 됩니다. 

 

마지막 인사

 

자, 이렇게 <가을 성서학당> 총 여섯 강을 마쳤습니다. 이번 <성서학당>은 이승우 작가님의 책, <사랑이 한 일>을 중심으로 이야기 나눠봤는데요. 우리는 이 여섯 번의 시간을 통해, 기존에 알던 성경 이야기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봤었습니다. 이 시간들이 어떠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스스로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강의준비를 했는데요. 여러분의 신앙 여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좀 쉬었다가 다음 강의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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