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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성서학당] 사랑이 한 일: 허기와 탐식

20211125 청파교회 목요 <성서학당> : <창세기> 속 아브라함 일화 새로 보기!

 

사랑이 한 일: 허기와 탐식

 

<창세기 25장 27-28절 ; 27장 1-4절>

 

27. 두 아이가 자라, 에서는 날쌘 사냥꾼이 되어서 들에서 살고, 야곱은 성격이 차분한 사람이 되어서, 주로 집에서 살았다.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에 맛을 들이더니 에서를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

 

1. 이삭이 늙어서, 눈이 어두워 잘 볼 수 없게 된 어느 날, 맏아들 에서를 불렀다. "나의 아들아." 에서가 대답하였다.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2. 이삭이 말하였다. "얘야, 보아라, 너의 아버지가 이제는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겠구나. 

3. 그러니 이제 너는 나를 생각해서, 사냥할 때에 쓰는 기구들 곧 화살통과 활을 메고 들로 나가서, 사냥을 해다가, 

4. 내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서, 나에게 가져 오너라. 내가 그것을 먹고, 죽기 전에 너에게 마음껏 축복하겠다."

 

 

이삭과 리브가의 자녀 사랑

 

안녕하세요. 목요 <성서학당> 다섯 번째 시간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이삭과 두 아들의 이야기는 이런 질문으로 시작해 보면 좋겠습니다. “저 사람 왜 저래?”라는 질문 말입니다. 주로 이런 질문은 언제 던지나요? 누군가 비정상적인 행동일 보일 때입니다. 사실 누가 이상한 행동을 보며, 대충 수근 대거나 욕하고 돌아서면 그만인데,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보려 합니다. 우리는 이상한 행동을 한 사람, 이해할 수 없는 그 사람의 이면에 감춰진 모습을 들여다 볼 예정입니다. 그가 누군지 눈치채셨지요? 바로 ‘이삭’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미 이삭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 이삭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에서이고 둘째 아들의 이름은 야곱입니다. 첫째는 들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집보다 사냥을 좋아했으며 밖으로 다니기를 즐겨했습니다. 그와 반대로 동생 야곱은 집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집에만 머무는 조용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이렇게 다른 두 성향의 아들만큼, 두 자식을 향한 부모님의 사랑 또한 정확히 나뉘었습니다. 아버지는 형 에서를 더 사랑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동생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부모님들께서는 더 팔이 안으로 굽는 자녀가 있으시지요? 

 

그런데 여기서 좀 이상하면서도 흥미로운 대목은 아버지 이삭에서를 사랑하는 이유가 그가 사냥해 온 고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에 반해 어머니 리브가야곱을 사랑하는 이유가 뭔지 성경에 나오진 않지만, 추측해보건대 야곱은 그녀 곁에 머물면서 어머니가 어머니로써의 역할을 할 수 있게 기회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먼저 성경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두 아이가 자라, 에서는 날쌘 사냥꾼이 되어서 들에서 살고, 야곱은 성격이 차분한 사람이 되어서, 주로 집에서 살았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에 맛을 들이더니 에서를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 이삭이 늙어서, 눈이 어두워 잘 볼 수 없게 된 어느 날, 맏아들 에서를 불렀다. "나의 아들아." 에서가 대답하였다.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삭이 말하였다. "얘야, 보아라, 너의 아버지가 이제는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겠구나. 그러니 이제 너는 나를 생각해서, 사냥할 때에 쓰는 기구들 곧 화살통과 활을 메고 들로 나가서, 사냥을 해다가, 내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서, 나에게 가져 오너라. 내가 그것을 먹고, 죽기 전에 너에게 마음껏 축복하겠다." 


<창세기 25장 27-28절 ; 27장 1-4절>

 

이삭은 에서를 편애했습니다. 언제부터 그를 동생보다 더 사랑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를 사랑하는 이유가 그가 사냥해 온 고기 때문이라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삭은 맏아들 에서를 불렀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젠 너무 늙었고 언제 죽을지 모르니, 자신이 좋아하던 야생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음식을 먹은 뒤, 죽기 전에 마음껏 너를 축복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람은 죽음이 임박하면 좋았던 추억,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이 상황에서 음식을 찾는다니! 늙은 이삭의 모습이 좀 엉뚱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삭에게 치매가 온 것일까요 아니면 음식에 어떤 추억이 담겨있는 것일까요? 

 

이삭의 편애

 

음식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 잠시 이삭의 편애에 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버지 이삭은 맏아들 에서를 편애합니다. 편애하는 이유를 말하기 전에 편애하는 이삭의 모습이 과연 부모로써 합당한 모습인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이 강의를 듣는 분들 중에 부모님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혹 부모가 아니어도 우리는 모두 부모를 둔 자녀들입니다. 여러분께 진솔하게 한번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자녀를 향한 사랑이 늘 동일하십니까 아니면 그 반대이십니까? 물론 외동이면 상관없겠지만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더 관심과 애정이 가는 자녀가 있진 않습니까? 혹은 본인이 더 사랑받거나 혹은 덜 사랑받지는 않으셨습니까?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실 사랑하는 사람은 균형 잡기가 어렵습니다. 

 

아들이 두 명뿐인데도, 심지어 그 두 명이 쌍둥이인데도 이런 일이 생긴다. 아버지와 자식 사이인데도 이런 일이 생긴다. 사람에게는 균형을 잡는 재주가 없고 사랑에게는 균형에 대한 감각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균형을 잡을 줄 모르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오직 맏아들에게만 축복하려고 한다. 오직 너에게만, 동생은 말고. 그것이 그의 분명한 뜻이었다. 사랑 때문이었다. 그는 에서를 사랑했다. 그래도 그렇지, 그가 하려고 하는 것은 축복 아닌가.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128

 

사랑하는 사람은 균형 잡을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저는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그런지 이삭의 태도에 공감이 갑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적절히 배분할 재주가 없습니다. 특별히 더 마음이 가고 애정이 가는 사람이 생기지 않던가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균형 감각이 없어지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자식이 둘 밖에 없음에도 이삭은 자식 사랑에 균형을 잃었습니다. 아마 사랑이 얼마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지를 경험한 분이시라면, 이삭의 편애를 충분히 이해하실 겁니다. 

 

편애는 비정상적인 사랑의 한 방식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랑의 일반적 현상이다. 이런 사랑의 속성을 감안하면 공평하게 사랑한다는 사람의 말은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의어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왜 나를 사랑하지 않나요? 하고 항의하거나 왜 나를 누구처럼, 누구만큼, 누구보다 사랑하지 않나요? 하고 따지지 말아야 한다. 사랑을 요구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130-131

 

지난 시간 우리는 사랑의 무서움에 관해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이삭의 번제 사건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그저 사랑이 남긴 흔적만을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이야기도 사랑의 흔적 하나를 우리에게 건네줍니다. 균형 잡을 수 없는 사랑, 즉 ‘편애’라는 흔적을 우리에게 건네줬습니다. 편애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사람을 공평하게 사랑한다는 말은 어쩌면 그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일 수 있다는 게, 사랑이 가진 한계를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좀 씁쓸합니다. 

 

이삭의 축복과 야생동물 요리

 

이삭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식들에게 복을 빌어줍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여기서도 그의 편애가 드러납니다. 그는 맏아들 에서만 축복해 주려고 합니다. 이삭은 에서가 만들어준 별미를 먹고, 죽기 전에 너에게 마음껏 축복하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동생 야곱은 배제됩니다. 사실 이라고 하는 것은 수치화될 수 없는 개념입니다. 복은 양이 없습니다. 복을 빌어주는 행위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무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별미를 맛있게 먹고 난 후, 첫째 아들만 축복하겠다고 말합니다. 이삭의 편애는 무척이나 노골적입니다.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이삭은 왜 에서만 축복하려고 하는 걸까요? 그가 장자이기 때문일까요? 그렇다고 말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성경 텍스트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요. 그 근거는 바로 에서의 요리에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의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버지의 이유는 확실하다. 확실하지 않은 어머니의 이유는 확실하지 않은 채 그럴듯하지만 확실한 아버지의 이유는 확실한데도 그럴듯하지 않다. ‘아들이 사냥해온 야생동물 요리에 맛 들여서’라는 건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이유로 내세울 만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아버지는 이 그럴듯하지 않은 이유 말고 다른 이유는 내세우지 않는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온 고기에 맛을 들이더니 에서를 사랑했다. 동생은 성격이 차분해서 주로 집에서 지냈지만 형은 날쌘 사냥꾼이 되어 거의 항상 들에서 살았다. 그는 단순하고 활발하고 대범했다. 그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사냥을 좋아했고 사냥에 소질도 있었다. 그는 사냥을 해서 잡아온 고기를 요리하는 걸 좋아했고, 자기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을 좋아했다. 이삭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아들이 해준 요리를 먹는 것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133-134

 

성경 어디를 보아도 에서의 요리 외에 다른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온 야생 요리에 맛 들여서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어이없는 이유일 수 있습니다. 이삭은 그렇게 거친 음식에 중독된 사람이었을까요? 

 

특정 음식에 대한 기호

 

이제 음식 얘기를 좀 해볼까합니다. 여러분은 미식가인가요? 에서를 향한 이삭의 사랑을 이해하기위해서 우리는 이 음식 혹은 식탐에 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식사 대접을 받아보셨을 겁니다. 식사 초대라고 해도 좋겠네요. 비싼 음식,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으면 물론 기분이 좋습니다. 하지만 음식의 종류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대접하는 이의 태도 또는 정성입니다. 환대 받는 느낌을 받으면 대접하는 손길이 더 귀하게 느껴지고, 음식의 질이 그렇게 높지 못하더라도 아쉬운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존중받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보통 음식의 맛과 질보다는 음식을 대접하는 이의 마음과 정성에 끌리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삭의 경우는 정반대였습니다. 이삭은 특정 음식을 대접받았기에 그 음식을 대접한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할 수 있고 그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사랑을 유발하는 것은 음식을 통해 전달되는, 음식을 만든 사람의 정성과 마음이지 음식의 맛은 아닐 것이다. 음식에 대한 어떤 취향이나 특별한 기호가 사랑의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음식에 대한 기호는 기존의 사랑을 튼튼하게 하거나 느슨하게는 할 수 있지만 없는 사랑을 만들거나 있는 사랑을 없애지는 못한다. 음식에 대한 기호는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없고, 혹시 어떤 역할을 한다고 해도 그 영향은 아주 미미하다고 할 것이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134

 

사실 사람이 특별히 선호하는 음식을 먹거나 특별히 좋은 장소에서 먹는 음식 때문에 갑자기 없던 애정이 생기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썸타는 사이나 연인 간에는 좀 다를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음식에 대한 기호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삭에게는 통했습니다. 이삭의 특정 음식에 대한 기호가 맏아들 에서를 편애하게 만들었습니다. 

 

살아도 산 게 아닌 자

 

우리는 이삭의 식탐, 특정한 음식을 탐하는 그의 식성을 알아보기 위해 과거 여행을 떠나봐야 합니다. 바로 그의 청소년기 이야기, 이삭의 번제 사건 때를 떠올려봐야 합니다. 그는 그 시기 어딘가에서 큰 상처 혹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삭은 청소년기에 치명적인 사건을 겪었다. 그가 겪은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은 혹시 있을지 모르지만 똑같이 경험을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제단에 번제로 바치려고 했다. 이삭은 자기를 태우는 데 사용될 장작을 지고 아버지와 함께 산에 올랐다. 신의 충실한 숭배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의 지시를 거역하지 못했다. 물론 고뇌와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들에 대한 사랑과 신의 명령에 대한 복종 사이에서, 인간의 도리와 신의 뜻 사이에서 아버지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었다. 신의 충실한 신봉자인 그는 신이 명령한 일을 해야 했고 늙은 나이에 얻은 외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인 그는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그가 해야 하는 일은 그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이 지시한 산을 향해 가는 사흘 동안 그의 영혼은 칠흑처럼 어두워지고 가시나무가 할퀸 것처럼 너덜너덜해졌다. 그렇지만 결국 아버지는 오랫동안 몸에 익은 복종의 인도를 따라 움직였다. 그는 아들을 묶어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고 칼을 들었다. 다급한 신의 목소리가 아버지의 행동을 제지해서 아들의 몸이 쪼개지고 불에 태워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삭은 그때 이미 죽음을 맛보았다. 그는 살아 있지만, 죽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고 나서, 죽은 다음에, 죽었는데도 살아 있다. 그때 일이 떠오를 때마다 질문이 튀어나왔다. 신이 다급한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러,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고,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지시하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정말로 자기를 죽였을까. 칼을 내리치고 불에 태웠을까.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143-144

 

지난 시간에 함께 나눈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드러나지 않은 그 이면의 이야기를 상상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내리치려던 순간, 가까스로 개입해 이삭을 살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신 제물 덕에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삭은 그날 이후, 살아도 산 게 아닌 자가 됩니다. 이삭은 그때 이미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그는 그날 이후 계속 되뇌게 됩니다. 다급한 하나님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정말 자신을 죽였을 지를 말입니다. 

 

에서를 편애한 세 가지 이유

 

그는 자기 속에 떠오르는 질문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솟아나는 의문들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아버지의 믿음을 생각하기보다 제물로 바쳐질 번 한 자신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끔찍했습니다. 그는 답 없는 질문을 계속하며 속으로 울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먹었습니다. 내면의 허기공허를 메우기 위해 그는 계속해서 먹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이삭의 식탐, 이삭이 식탐을 갖게 된 계기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기가 맏아들 에서를 편애하게 하는 단초가 된 것입니다. 

 

그는 마음 가눌 길 없어 정처 없이 떠돌았습니다. 그러다가 광야로 쫓겨난 자신의 이복형이 떠올랐다. 그는 그렇게 그의 형 이스마엘을 만나러 광야로 향했습니다. 그는 광야를 달음질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형을 만났습니다. 몹시 지쳐 있는 그를 보며 이스마엘은 동생에게 음식을 해 줍니다. 이삭에게 이 음식은 비슷한 고통, 즉 버려짐의 고통을 겪은 형이 건네는 위로이자 안정이고 깊은 공감의 대체물이었습니다. 

 

이삭은 빈 들의 형을 만나지 않고는 왔던 곳으로 돌아 이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광야를 달음질했다. 그랬다. 빈 들을 자기 집으로 삼고 뛰어다니는, 야생의 짐승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 이복형의 장막에서 이삭은 야생 동물 요리를 처음 맛보았다. 맛을 느끼며 먹었다고 할 수 없다. 그저 허기진 배가 음식을 탐한다고 느꼈다. 걷잡을 길 없는 마음의 혼란과 죽을 것 같은 고뇌 속에서도 음식에 대해 욕망을 느끼는 자신이 민망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가 인간이고 살아 있다는 분명하고 확실한 표시였다. 그는 현재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그러나 허기가 가시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많은 음식을 뱃속에 집어넣은 다음에도 그는 먹는 걸 멈추지 않았다. 허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당황했지만 먹기를 중단할 수 없었고, 그래서 더 당황했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잘 인식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아무리 먹어도 포만감이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음식들은 다 어디로 들어간 것일까. 그를 사로잡은 것은 찌르는 것 같은 허기였고 맛을 가진 음식이 아니라 먹는 행위 자체에 대한 탐욕이었다. 모든 강물을 삼키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공허한 바다와도 같은 탐욕이 그를 슬프게 했다. 쉬지 않고 음식을 집어삼키는 그의 눈에서 찔끔찔끔 눈물이 나왔다. 맛이 있느냐고 형이 물었다. 이삭은 고기를 뜯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맛이냐?" 형이 다시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무슨 맛인지 말할 수 없었다. 맛을 느끼지 못한 채 먹었기 때문이다. 맛이 먹게 한 것이 아니라 허기가 먹게 했기 때문이다. 맛을 느끼지 못하면서 먹을 수는 있지만 맛을 느끼지 못하면서 많이 먹을 수는 없다. 그러나 드물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 맛을 느끼지 못한 채, 먹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많이 뱃속에 집어넣을 뿐인 일이, 먹는 것이 단순한 음식 섭취가 아니라 하나의 증상일 때 그렇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149-151

 

이삭과 이스마엘은 묘하게 닮았습니다. 그들은 이른 나이에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습니다. 1. 생사의 기로에 섰던 과거의 동질감이 그 두 형제를 꽁꽁 묶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복형 이스마엘은 자기 때문에 죽을 번한 형제였습니다. 이삭은 그 일로 인해 평생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삭은 2. 형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첫째 아들에게 더 마음이 갔습니다. 이스마엘과 에서가 오버랩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삭은 죽음에서 오는 동질감 그리고 형에 대한 미안함 마음에 에서를 편애하게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에서를 편애할만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자신과 동질감을 형성한 형이 야생에 살았고, 야생에 사는 형이 해준 음식으로 그는 마음의 위로를 얻었습니다. 이 3. 야생에서 받은 대접, 그 경험이 곧 야생을 제 집처럼 여기며 살던 에서에게 마음을 더 가게 했던 것입니다. 

그가 둘째아들이 아니라 첫째아들을 사랑한 것은, 첫째아들이 그의 형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에서가 형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형인 이스마엘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의 형을 떠올릴 때 떠오르는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이 그의 형인 것처럼 에서가 야곱의 형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형이 그랬던 것처럼 야곱의 형인 에서도, 자기가 한 어떤 행동이나 하지 않은 어떤 행동 때문이 아니라 최선을 넘어서는 최선, 법과 도리를 넘어서는 신의 이해할 수 없는 섭리에 의해 집안의 대를 이어가는 명분을 동생에게 넘겨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158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삭은 1. 자신처럼 죽음의 현장으로 내몰림 당한 형이 건네는 동질감과 위로 그리고 2. 일찍이 자신 때문에 광야로 내쫓김 당한 형에 대한 미안한 마음 마지막으로 3. 동질감이자 곧 죄책감을 주는 형 이스마엘이 사는 야생의 음식 그 음식을 대접받음으로 이삭은 야생 음식에 대한 집착맏아들 에서에 대한 편애를 하게 됐던 것입니다. 

 

프루스트 현상

 

우리 몸에 새겨진 감각은 참 놀랍습니다. 이성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음식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비슷한 맥락에서 감각 이야기를 잠시 나눠볼까 하는데요. 여러분께서는 어떤 음식이나 냄새 혹은 장소에 가면, 평소 잊고 있던 생각이나 감정, 추억 등이 떠오르지 않던가요? 저도 소독차 냄새나 모기향 혹은 빵 굽는 냄새 등 맡으면 갑자기 어떤 시절로 돌아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la recherche du temps perdu>에서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주인공 마르셀은 홍차에 적신 과자 마들렌의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을 회상합니다. 그래서 프루스트 현상(Proust phenomenon)이라는 것도 생겼는데, 이 현상은 과거에 맡았던 특정한 냄새의 자극이 과거를 회상하게 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어쩌면 사람의 기억은 무한하며, 몸의 감각은 우리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과거를 감각 속에 축척해놓고 계신 것입니다. 

 

에서 편애 사건 이후, 야곱이 형의 복을 가로채는 사건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사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자신이 속은 것에 분노해 동생을 죽이려는 형 에서의 이야기 또한 뒤를 잇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강의의 마지막은 김진영 철학자의 책 한 부분을 들려드리며 마무리할까 합니다. 오늘 이 <허기와 탐식> 시간을 통해, 내 안에 감춰진 다양한 감각을 발견하시길 바라고 또 그로 인해 평범한 일상이 더욱 풍성해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가에는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무엇을 느끼는가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아요. 내가 커피를 마시면서 그 맛을 어떻게 느끼는가, 이제 바로 일상이죠. 익숙한 공간에서 항상 같은 일이 반복되며 사건은 일상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감각을 관찰해 보면 굉장히 많은 일상이 사건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이를 통해 자기 발견도 하게 될 겁니다. 상당히 프루스트적인데, 내가 만지고 느끼고 냄새 맡는 것들이 무수하게 변주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무감각하게 흘려보내죠. 감각 주체로서 자기를 발견하는 것은 자신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진영, <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 읽기>, 메멘토, 2019, p.273-274

 

그럼 다음 시간에 마지막 강의 <야곱의 사다리>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살롱에서 나누는 말씀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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