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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성서학당] 사랑이 한 일: 사랑이 한 일

20211118 청파교회 목요 <성서학당> : <창세기> 속 아브라함 일화 새로 보기!

 

사랑이 한 일: 사랑이 한 일

 

<창세기 22장 1-3절>

 

1.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니, 아브라함은 "예,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3.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었다. 그는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도 길을 떠날 준비를 시켰다. 번제에 쓸 장작을 다 쪼개어 가지고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그 곳으로 길을 떠났다.

 

 

말씀 새로 보기

 

안녕하세요. 네 번째 목요 <성서학당>을 시작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소돔의 이야기하갈의 이야기를 통해, 성경에 감춰진 이야기, 성경에서 발언권을 얻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봤습니다. 오늘은 그 다음 이야기로 아브라함과 이삭의 번제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성경에 흥미를 못 붙이는 이유는 스토리가 번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들은 분들은 1을 말하면 10까지 상상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말씀에 흥미를 잃게 됩니다. 뭐든 익숙해지면 지루해지기 마련입니다.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서로가 흥미를 잃는 이유는 내가 상대에 대해 전부 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갑자기 상대가 낯설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냐면 내 생각에서 벗어날 때입니다. 내가 예상한 반응이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생각지 못한 모습 혹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일 때 우리를 상대를 낯설어 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이야기에 상상력을 더하다 보면, 평범한 인물들이 비범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익숙하던 인물이 낯설어지는 걸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성서학당>의 목표 중 하나는 성경에 생명을 불어넣어 흥미를 갖는 일입니다.  

 

사랑의 진정성

 

오늘 이야기는 이런 질문으로 시작하면 좋을 듯합니다. 이삭 번제 사건은 정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거행된 일이었나, 라는 것 말입니다. 롯이 두 딸을 내어준 사건 만큼이나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려는 사건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께서는 정말 이삭 번제 사건이 은혜롭게 다가오십니까? 오늘 이야기에서 중요한 화두는 바로 ‘사랑’ 바로 이 ‘사랑의 무서움’입니다. 

 

잠시 상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여러분께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혹시 떠오르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그러면 이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대상을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라는 것 말입니다.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가, 라는 것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뿐인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고 넓기에 그분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걸까요? 반대로 아들을 죽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하나님의 명령을 외면하면 또 되는 걸까요? 사랑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건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무엇이나 누구를 바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랑하지 않는 것을 누군가에게 주는 행위는 바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치는 모습을 취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바치는 것이 아니다. 버리는 것이라고 늘 쉽지 않지만 바치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자기를 주는 상징적 표현이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주는 상징적 표현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자기에게 속해 있으나 자기보다 소중한, 소중하게 여기는 무엇이나 누구를 주는 것이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속해 있는 것 가운데 자기보다 소중하지 않은,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무엇이나 누구를 주는 것은 자기를 주는 행위일 수 없다. 자기에게 속해 있으면서 자기보다 소중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그가 사랑하는 무엇이나 누구이다. 사랑하는 무엇이나 누구만이, 오직 사랑만이 바쳐질 수 있다. 바치기가 어려운 것은 그 때문이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99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택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을 얻은 일도 결국 하나님께서 베푸신 일임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사랑을 정의하는 개념은 무수히 많지만, 사랑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가시화된 행동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바로 그 행동이 이삭을 바치는 행위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기위해 자신의 사랑을 바쳐야했습니다. 사실 사람은 큰 관심이 없는 물건은 버리기 쉽습니다. 관심 없는 사람과는 헤어져도 별 아쉬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대상, 애착 가득한 대상과의 강제적인 이별은 엄청난 고통을 안겨 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하기위해 자신이 가장 아끼는 대상을 바쳐야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대상에게 사랑하는 대상을 바침으로 자기 사랑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복잡하게 얽힌 사랑

 

바로 이삭은 자신에게 일어난 이 충격적인 사건을 곱씹다가 사랑의 복잡성을 깨닫습니다. <사랑이 한 일>에서 이 부분을 잘 풀어 설명해 주는데요.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이삭의 속마음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분은 자신에게 속한 것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라고 여겼던 거예요. 아버지에게 속한 것 가운데 아버지보다 더 소중한 것이 나였던 것처럼요. 그러니까 나는 그분에게 속한 것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것이 되는 셈이지요. 신이 바치라고 요구하면서 바치라는 요구를 받고 있었다고 한 것은 그런 뜻으로 한 말이에요. 바쳐야 할 의무를 지고 있는 분은 바로 바치라고 말한 그분이었다는 사실이 어떻게 깨달아졌을까요? 그분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웠다는 사실이 어떻게 깨달아졌을까요? 맞아요. 신이 원한 것은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이었어요. 아버지에게 불가능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요. 불가능한 것이 없는 그분에게도 그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거예요. 그분은 지나친 사랑 때문에 불가능해진,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린 그것을 하라는 요구를 스스로에게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불가능한 과제 앞에서 고뇌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던 분이 아버지만은 아니었던 거예요. 그분이야말로 쩔쩔매고 있었던 거예요.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105-106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을 어떻게 산 제물로 바칠 수 있었는지 그 마음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우리가 이삭의 마음에 접속하려는 것처럼, 아버지의 마음에 접속합니다. 그러다가 그는 하나님과 아버지의 관계, 즉 두 존재 사이의 사랑의 무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아버지는 하나님께 그분을 향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을 들어드려야 했다는 걸 깨닫습니다. 결국 이삭은 이 번제 사건을 통해, 하나님과 아버지 그리고 자신이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사랑의 무거움, 사랑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힘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산에 오르던 중 이삭은 아버지께 묻습니다.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가 "아버지!" 하고 부르자, 아브라함이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삭이 물었다.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


창세기 22장 7-8절

 

이삭은 불과 장작은 있는데 번제물이 없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독백에 가까운 말로 대답합니다. “그분이 요구하셨으니 그분이 마련하실 것이다.” 아직 어린 이삭이었지만 어느 때보다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번제로 바칠 제물을 손수 마련하실 거라는 아브라함의 이 말은 곧 바치라고 요구하신 분이 바칠 것을 준비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다시 말해, 명령을 하는 자가 명령을 수행하는 자가 된다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물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번제물을 마련하실 거라는 이 말을 정말 믿었는지 확신할 순 없습니다. 사실 그렇게 믿고 싶었다고 보는 게 가장 적절해 보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지만, 그분께서 이 명령을 곧 거두시거나 혹은 바칠 번제물을 손수 마련해 주시길 바랐을 것입니다. 

 

사랑: 비순수의 형식

 

여러분! 제가 오늘 이야기 서두에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계시냐고 여쭈어봤었습니다. 혹시 그 시절에 누군가를 사랑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신다면, 한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사랑 때문에, 어떤 열정 때문에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행동들을 했던 적은 없었는지를 말입니다. 혹시 자녀 때문에 감내해야 했던 말 못할 사정들은 없으셨는지도 한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위대하지만, 굉장히 무섭기도 한 것입니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자신이 불가능한 것을 행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아버지와 하나님 사이에서 사랑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게 됩니다. 

 

일어나기 힘든 어떤 대단한 일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다. 사랑은 불가능한 것을 하라고 요구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바치라는 요구를 받았다. 아들을 사랑해서 일어난 일이다. 신은 아버지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아버지를 사랑해서 일어난 일이다. (생략) 나는 아버지 앞에 놓인 거대한, 불가항력의 두 개의 바위를 본다. 사랑 때문에 할 수 없는 그 일을 그는 또 사랑 때문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진 사람이었다. 그가 해야 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일을 하지 않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해야 하는 일은 아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바치는 것이 불가능했고, 바치지 않는 것도 불가능했다. 사랑은 그를 불가능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107-109

 

사랑은 잠자던 영혼을 깨웁니다. 사랑은 나도 몰랐던 내 안의 또 다른 자신을 끌어냅니다. 하지 못했던 것, 할 수 없었던 것을 하게 만드는 힘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이삭의 번제 이야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인간의 사랑방식을 닮았습니다. 사랑은 위대하지만 순수하지만은 않습니다. 처음 누군가를 사랑하면 주기만 해도 만족감을 느낍니다. 사랑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상식을 벗어난 행동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거나 혹은 특별한 계기로 불안감이 엄습할 때, 우리는 상대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집니다. 연인부부 사이에도 그렇고 부모와 자녀 관계에 있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무조건 주기만 하는 사랑, 헌신하기만 하는 사랑은 정말 어렵습니다.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한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했습니다. 자신(아브라함)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삭)을 바침으로 자신(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길 바랐습니다. 

 

신은 사랑의 고백을 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이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사랑하는 이의 사랑을 확인하려는 마음보다 더 간절하고 절실한 것은 없다. 시험이라는 비순수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사랑보다 더 순수하고 큰 사랑은 없다. 비순수를 통해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종류의 순수가 있다. 사랑이야말로 그러하다. 심지어 순수한 사랑일수록 그 표현이 더 순수하지 않아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순수하지 않은 것들이 순수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동원된다. 모든 비순수의 형식이 항상 내용의 순수함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순수의 형식이 항상 내용의 비순수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순수한 사랑의 표현은 뜻밖에 순수하지 않은 사랑의 증거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114

 

말이 어렵지만 쉽게 말해 이런 뜻입니다. 사랑은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는 의미에서 사랑은 위대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표현되기 위해서는 순수하지 않은 형식을 취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 나 사랑해?”와 같은 방식 말입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나에게 보여줘”처럼 사랑은 비순수함의 방식 통해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게 사랑하는 이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이 마음을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불가능하게 만든 사랑

 

그렇기에 아브라함과 이삭의 제단 사건은 이렇게도 표현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더 시험 당하신 사건’이라고 말입니다. 

 

시험이 진행되는 동안 시험 출제자는 시험당하는 자가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까봐 조마조마하고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시험하는 자가 시험당하는 자보다 덜 고통스럽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정말로 시험당하는 자는 누구일까. 바치라고 요구하는 방법으로 기꺼이 바치기를 하고 있는 이 신은 시험을 함으로써 시험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욱 곤란하게도 이 시험은 자신의 실력과 의지로는 통과할 수 없다. 신의 시험 통과 여부는 철저하게 인간인 아버지의 시험 통과 여부에 달려 있다. 신은 인간인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전능한 신은 사랑 때문에 완벽한 무능력자가 된다. 절대 자유를 가진 신은 사랑 때문에 절대적으로 부자유한 자가 된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115-116

 

전능한 신은 사랑 앞에 무능력한 신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믿음 테스트는 곧 하나님 자신을 테스트하게 만들었습니다. 시험 출제자인 하나님은 시험당하는 아브라함이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까봐 계속 조마조마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 보여드릴 사랑이 자신의 아들을 바치는 것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사로잡혔습니다. 아마도 이런 가혹한 요구를 하신 하나님이 정말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이삭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자신의 일을 곱씹다가 새로운 눈을 뜨게 됩니다. 그는 아버지가 걸을 길을 따라 걷다 묵상의 길이 열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에 접속됐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에는 두 개의 길이 놓여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랑 때문에 이삭을 바칠 수 없는 마음이었습니다(이삭).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랑 때문에 이삭을 바쳐야 하는 마음이었습니다(하나님). 즉 그는 아버지로서의 아브라함과 아들로서의 아브라함의 기로에 놓인 것이었습니다. 이삭을 사랑했기에 그는 바치는 것이 불가능했고,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바치지 않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이승우 작가는 말합니다. “사랑은 아브라함을 불가능한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말입니다. 

 

말하지 않고 하는 말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이 일을 두고 모든 일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이 말을 내뱉었다면 이삭은 아버지를 향한 분노와 더 나아가 하갈의 이야기처럼 하나님을 향해 분노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침묵했습니다. 번제물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실 거라는 말만 남기고 말입니다. 사랑은 정말 오묘합니다. 사랑은 말로 표현 가능하지만 말에 다 담기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엇보다 잘 말해져야 합니다. 예컨대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해져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라고 아버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거나 없었던 일이 있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말하지 않는 것이 더 크게 말하는 방법이 되는 말이 있다. 사랑의 말이 그렇다. 무엇보다 사랑은 잘 말해져야 한다. 예컨대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해져야 한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사랑 때문에 시작되었고 사랑 때문에 이루어졌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112

 

이 대목을 읽다가 문득 사랑 고백이 떠올랐습니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혹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기에는 너무 그 마음이 커버렸습니다. 그래서 고백을 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혹은 어느 한 쪽이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합니다. 마음의 잘 전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언어화되는 순간 뭔가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 느껴졌습니다. 그 순간 고백자는 깨닫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언어에 완벽히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일단 말이 발설되고 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실망스런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잘 말해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해져야 함을 느낍니다. 

 

동유럽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그의 책에서 이 같은 상황을 잘 묘사합니다. 

 

두 연인은 이미 그들이 서로 끌리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으며, 에로틱한 긴장이 감돌고 있으며, 상황 그 자체는 의미를 '수태'할 것처럼, 말을 향해 자신을 재촉하는 것처럼,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명명할 말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단 말이 발음되고 나면, 그것은 결코 완전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으며, 필연적으로 실망스런 결과를 낳으며, 매혹은 상실되며, 의미의 모든 탄생은 유산이다. ​ 


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2005, p.102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말인데요.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너무 완벽한 사랑 고백을 많이 봐왔기에, 우리도 그런 기적 같은 상황을 늘 기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 고백뿐만 아니라 사과나 감사처럼 진심을 담아 어떤 마음을 전하려고 해도 그 마음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셨을 겁니다. 그래서 지젝은 일단 말이 발설되고 나면, 그 의미의 탄생은 유산이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정현주 작가가 말하듯, 사랑이란 고백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밥 먹었어요?’, ‘차 한 잔 할래요?’와 같은 간단한 말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정현주, <그래도, 사랑>, 중앙북스, 2013, p.32). 이처럼 진심우회하거나 뭔가를 경유해야 잘 전달되는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보면,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직접적인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던 게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이 ‘의미의 유산’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들을 향한 그의 사랑은 말하지 않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해져야 했습니다. 

 

사랑: 시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

 

결국 아브라함과 이삭의 번제 이야기는 세 존재가 얽혀있는 매우 복잡한 이야기입니다. 큰 틀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고 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증명하기위해 아들 이삭을 바쳐야 했으며, 아들 이삭은 하나님과 아버지의 사랑 관계를 위해 제물로 바쳐져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시험에 통과해야 하는 것처럼 나 역시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아버지가 아버지인 신을 위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것처럼 나 역시 그래야 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바쳐야 했고 아들인 나는 바쳐져야 했다.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마라.” 그 결정적인 순간에 신은 다급하게 아버지를 말리고 나를 말렸다. 그분은 아버지의 손을 붙잡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했다. 신은 가까스로 안도했다. 인간만큼 축소된 신은 우리들이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에,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그를 시험에서 통과시켜주었기 때문에 안도했다. 그 자리에 시험하는 이는 없었다. 사랑은 시험하는 것이 아니고 시험을 뛰어넘는 것도 아니고 시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117-118

 

바로 여기에 이 책 표지에도 등장한 핵심 문장이 나옵니다. “사랑은 시험하는 것이 아니고 시험을 뛰어넘는 것도 아니고 시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여러분은 사랑을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랑은 거창한 개념이 아닙니다. 사랑은 아이들의 요구하듯 비순수적이고 열정적이며 때론 어설프고 광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치열하고 간절하며 절박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네, 이번 <가을 성서학당>을 들으시며 좀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물론 쉽게 설명하지 못한 제 한계 때문이긴 합니다만, 성경의 이면을 살피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강의까지 함께 잘 마무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는 이삭과 에서의 이야기, <허기와 탐식>에 관해 나눠보겠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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