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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성서학당] 사랑이 한 일: 하갈의 노래

20211111 청파교회 목요 <성서학당> : <창세기> 속 아브라함 일화 새로 보기 (3) 

 

사랑이 한 일: 하갈의 노래

 

<창세기 21장 14-17절>

 

14. 다음날 아침에 일찍, 아브라함은 먹거리 얼마와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에게 주었다. 그는 먹거리와 마실 물을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서, 그를 아이와 함께 내보냈다. 하갈은 길을 나서서, 브엘세바 빈 들에서 정처없이 헤매고 다녔다. 

15. 가죽부대에 담아 온 물이 다 떨어지니, 하갈은 아이를 덤불 아래에 뉘어 놓고서 

16. "아이가 죽어 가는 꼴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하면서, 화살 한 바탕 거리만큼 떨어져서, 주저앉았다. 그 여인은 아이 쪽을 바라보고 앉아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17. 하나님이 그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들으셨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을 부르며 말하였다.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이가 저기에 누워서 우는 저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하갈의 노래

 

안녕하세요. 세 번째 목요 <성서학당>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지난 두 시간 <소돔의 하룻밤>에 이어서 <하갈의 노래>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1-2강을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3강도 이승우 작가의 책 <사랑이 한 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큰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내 사라가 임신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태는 계속해서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불임은 아브라함에게도 대를 잇지 못하는 큰 걱정거리였지만, 당사자인 사라에게 비할 바는 못 되었습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사정을 안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낙심 가운데 있는 사라를 통해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방문했을 때 곧 사라에게 아들이 생길 거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창18:10). 그 소식은 믿을 수 없는 예언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예언과도 같은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나눌 이야기의 시작점입니다. 

 

하지만 사라의 출산 이야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살펴봐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아직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창세기 16장기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하갈의 도주 사건 (1) 

 

예나 지금이나 대를 잇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고대 사회는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많은 사람의 아버지)이 아직 아브람(존귀한 아버지)이었던 시절,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자신을 대신해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집안의 대를 이어가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녀의 진짜 속마음이 어떤지 드러나진 않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라의 속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점점 나이가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하갈은 이집트 출신의 여종이었습니다(창16:1). 아브라함은 사라의 말을 따라 하갈과 동침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갈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태도의 변화에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변화는 하갈인데, 우리는 사라의 보이지 않는 속마음부터 살피려 합니다. 창세기 16장 4절은 하갈은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서, 자기의 여주인을 깔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매우 속상한 마음에 아브라함에게 이 사실을 전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녀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여보, 당신의 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소? 당신이 좋을 대로 그에게 하길 바라오(6).” 이후 사라는 아브라함의 허락대로 하갈을 학대하기에 이르고, 하갈은 여주인의 괴롭힘에 못 이겨 도망치게 됩니다. 이 사건이 하갈의 첫 번째 도주 사건, 가출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심해 볼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임신한 하갈이 정말 사라를 깔보았는지, 사라는 정말 하갈이 자신을 깔보았다고 느꼈는지를 말입니다. 책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아이를 낳으라고 남편의 방으로 밀어넣어놓고, 막상 아이가 생기자 마치 하지 말라고 지시한 일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언짢아하는 부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아이가 생긴 후에 그녀가 부인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였다는 건 터무니없는 주장이고 누명이었다. 맹세코 그녀는 그런 적이 없었다. 자기 아이를 가진 기쁨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혹시라도 마음 상해할까봐 부인 앞에서는 말로는 물론 표정으로도 기쁨을 표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꼭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제 몸으로 아이를 낳지 못한 채 늙어버린 여자의 딱한 처지를 생각해서 항상 조심했다. 그녀의 그런 조심성이 어떻게 깔보거나 멸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까. 남편의 아이를 배니까 천하를 가진 것 같은가보구나. 이제 이 집이 네 것이고 내 남편이 네 것이고 내 것이 다 네 것으로 보이는가보구나. 부인은 그녀를 볼 때마다 그런 말로 힐난했다. 하루라도 보지 않은 날이 없었으므로 그 날 선 말들을 하루라도 듣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녀는 그런 적이 없고 그럴 마음도 없다고 수도 없이 대답했지만 그 말들은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이 아예 없는 이의 귀에 가닿지 않았다. 아이를 가진 자는 아이를 가지는 것이 자기 능력과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속으로 기뻐할망정 자랑하거나 우쭐대지 않지만, 아이를 가지지 못한 자는 아이를 가지지 못한 것이 자기 능력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속으로만 아니라 겉으로도 질투와 시기심을 숨기지 못했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79-80

 

이승우 작가는 사라의 딱한 처지를 헤아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갈의 상황에 입술도 달아주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지금 이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사라와 하갈이 대치하고 있습니다. 사라는 보고 싶은 대로 보았고, 하갈은 사라가 보고 싶은 대로 보여-지게 됩니다. 그렇게 보고자 하면,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인간입니다. 비참함을 느낀 사라는 자신의 왜곡된 시선을 통해 하갈을 봅니다. 사라는 하갈의 처신과 상관없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으로부터 자신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 성경에 쓰여 있진 않지만 충분히 상상해볼 법한 이야기를 계속 다뤄볼 예정입니다. 

 

성경 이야기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하갈이 아들을 낳은 후의 이야기입니다. 하갈은 아브라함과 동침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을 낳습니다. 아들의 이름은 이스마엘이었고,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들었다(창16:11)’입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86세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창16:16). 

 

강의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천사들이 아브라함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불임 가운데 있는 사라에게 곧 아들이 태어날 거라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 소식이 창세기 21장에 와서 성취됩니다. 마침내 사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이에게 ‘이삭’이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이름의 뜻은 ‘웃음’이었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보았을 때 나이가 백 세였습니다(창21:5). 

 

그런데 이삭이 젖을 떼는 날,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성경은 그날의 사건과 이후의 이야기를 아주 간략히 전하는데요. 성경 속 이야기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보니, 이집트 여인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보내십시오.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아들도 자기 아들이므로, 이 일로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들과 그 어머니인 여종의 일로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이삭에게서 태어나는 사람이 너의 씨가 될 것이니, 사라가 너에게 말한 대로 다 들어 주어라. 그러나 여종에게서 난 아들도 너의 씨니, 그 아들은 그 아들대로, 내가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 다음날 아침에 일찍, 아브라함은 먹거리 얼마와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에게 주었다. 그는 먹거리와 마실 물을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서, 그를 아이와 함께 내보냈다. 하갈은 길을 나서서, 브엘세바 빈 들에서 정처없이 헤매고 다녔다. 가죽부대에 담아 온 물이 다 떨어지니, 하갈은 아이를 덤불 아래에 뉘어 놓고서 "아이가 죽어 가는 꼴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하면서, 화살 한 바탕 거리만큼 떨어져서, 주저앉았다. 그 여인은 아이 쪽을 바라보고 앉아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하나님이 그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들으셨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을 부르며 말하였다.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이가 저기에 누워서 우는 저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아이를 안아 일으키고, 달래어라.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니, 하갈이 샘을 발견하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담아다가 아이에게 먹였다.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 아이와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셨다. 그는 광야에 살면서, 활을 쏘는 사람이 되었다. 


<창세기> 21장 9-20절

 

어느 날, 사라가 보니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놀리고 있는 겁니다. 마음이 꼬일 데로 꼬인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다시 한 번 이 상황을 알립니다. 고자질이라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그녀는 모든 상황을 이스마엘이 이삭을 업신여기는 상황으로 보았습니다. 그녀는 하갈과 이스마엘이 못마땅했습니다. 사라는 이삭이 태어났음에도 여전히 하갈과 그녀의 아들이 미웠습니다. 아브라함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삭도, 이스마엘도 모두 자신의 자녀였기 때문입니다. 

 

고민에 빠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삭과 이스마엘 모두를 크게 사용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2-13). 결국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해 하갈과 이스마엘을 빈들로 내보냅니다. 아무 준비 없이 그리고 정처 없이 집에서 쫓겨난 하갈은 아브라함에 관한 원망과 그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에 대한 분노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절망에 빠진 순간, 하나님이 찾아오셨고, 하나님의 손길로 그녀와 이스마엘은 구원받습니다. 바로 우리는 이 짧은 본문을 여러 방면에서 접근해 보고 또 숨겨진 이야기에 가지를 달아볼 예정입니다. 

 

어느 날과는 다르게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어느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하갈은 여느 때와 같이 자신이 할 일을 하기위해 장막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르게 아브라함이 그녀의 장막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입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아침 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그녀를 향해 아들을 깨워서 데리고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아들을 데리고 나왔을 때, 아브라함의 어깨에는 커다란 빵 한 덩어리와 물이 가득담긴 가죽부대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선 그는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하갈은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평소 사람들의 신뢰를 받던 그였기에, 그녀는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은 아들의 손을 잡고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한참을 걷던 이스마엘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아브라함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어디 가요? 그러나 그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언뜻 보면 화가 난 것 같지만, 애써 곤혼스러움을 숨기고 있는 얼굴이라는 것을 아들은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걸었습니다. 하갈의 내면에는 질문들이 솟아났지만 아브라함의 침묵 앞에 그녀 또한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습니다. 그러고는 몸을 낮춰 아들과 눈을 맞췄습니다. 그러고는 말했습니다. 그분이 너를 사랑하는 걸 알고 있지? 아들은 아버지의 새삼스러운 질문에 어리둥절해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어서 말했습니다. 주님이 너를 사랑하시는 걸 잊지 마라. 어디에나 계시는 그분이 어디서나 너를 돌볼 것이다. 그는 이 말을 마치고 아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했습니다. 

 

가장 인간적인 반응

 

여러분께서는 이 상황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드시나요? 독백에 가까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과 노여움 가운데 어떤 감정이 먼저 드시나요? 우리의 생각은 우리가 서 있는 위치나 또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에 영향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말을 들어주라는 하나님의 말씀(창21:12)에 의지해 그대로 행했습니다. 그도 사실 따지고 보면 어느 쪽도 선택하기 어려운, 몹시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거의 많은 부분을 하갈보다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처지에 자신을 대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갈의 처지를 잘 헤아리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한 일>에서는 이야기 속에서 발언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 하갈과 같은 이에게 입술을 달아 줍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이 아들에게 하는 이야기를 묵묵히 듣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였습니다. 하나뿐인 이 아들의 처지가 어떻게 될지 눈에 선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종이기 이전에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써만 아들을 대했고, 아버지로써 그에게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습니다. 하갈도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으로 행해지는 이 무책임적이고 어찌 보면 폭력적이기까지 한 상황 앞에 이성이 작동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그녀는, 그분이 너를 사랑하는 걸 알고 있지? 가 아니라 아버지가 너를 사랑하는 걸 알고 있지? 라고 말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이 너를 사랑하는 걸 잊지 마라, 가 아니라 아버지가 너를 사랑하는 걸 잊지 마라, 라고 했어야 한다고. 물론 그녀는 그것이 아들을 축복하는 아버지의 관용적인 표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아들이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이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주님'이 아니라 아버지여야 한다는 믿음을 그녀는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내보일 수 없고 있으면서 없는 것처럼 감출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61

 

우리는 신이 아니죠.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가장 인간적인 모습은 가장 인간적인 반응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갈은 하나님의 마음을 듣기 전에 아버지로써의 아브라함의 마음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아브라함을 향한 하갈의 마음이 불손해보이십니까? 사실 이 마음이 가장 솔직한 하갈의 마음이자 엄마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 창세기 이야기를 큰 뜻을 품은 아브라함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하갈처럼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인간의 순수한 사랑 방식에 하나님의 사랑 방식이 충분히 녹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도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전형적인 아버지상에 가까운 사랑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지만 표현이 서툰 그런 사랑방식 말입니다. 그러나 하갈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앞세우기 이전에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기를 바랐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종종 하나님의 뜻을 앞세운 말을 듣거나 또 할 때가 있습니다. 다 하나님의 뜻이겠죠.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세요. 뭔가 다른 뜻이 있지 않을까요 등.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습니까? 은혜로운 말로 포장은 되어 있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거친 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상황마다 하나님을 앞세운 말들로 인해 더 큰 분노상처를 받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을 앞세운 말들은 가급적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건 믿음 좋은 일과 상관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참아왔던 분노

 

마침내 그녀의 속마음이 튀어나왔습니다. 하갈의 울분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울분은 그동안 참아왔던 응축된 분노였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말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저주와 같았다. 당신이 섬기 신이 당신에게 내가 겪은 것과 같은 일을 겪게 하도록 빌겠다. 당신이 섬기는 신이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지 못하게 막아달라고 밤낮으로 간청하겠다. 그 말을 할 때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 누군가 들어앉아 목소리를 내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 그녀는 자기가 한 말을 다른 사람이 한 말처럼 들었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68

 

하갈은 종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녀는 이집트라는 이방 나라 출신으로 아브라함과 사라를 섬기는 여종이었습니다. 종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랬기에 그녀는 느끼고 생각할 뿐, 내면의 것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승우 작가는 종의 마음에 입술을 달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한 일>에서는 실제로 그녀의 입을 열어주었습니다. 그 입에서 나온 소리는 어떤 소리였나요? 절망에서 우러나온 비명과도 같았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감정을 잘 다루십니까? 기쁠 때는 충분히 기뻐하고, 슬플 때는 슬퍼하며, 화가 날 때는 충분히 화를 내곤하십니까? 그러기 쉽지 않죠. 기쁨이야 충분히 드러낼 수 있겠습니다만, 슬픔과 분노는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진 않지만, 우리 몸 어딘가에 켜켜이 쌓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철학자 김진영 선생님은 욕망이라는 것도 억압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억압된 욕망은 어딘가로 흘러가 반드시 다른 형태로 표출되기 때문입니다.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감정은 좋은 감정대로 충분히 느끼되, 주로 잘 표현되지 못하는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순간, 자기도 모른 채 감정이 터져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그런 주인공이 되어 누군가에게 당혹감을 줄 때도 있고, 반대로 안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화를 내는 것을 보고 당황하기도 합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에게 참아왔던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억압된 감정이 인내심의 경계를 넘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아마 그 분노는 아브라함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분노였을지도 모릅니다. 하갈은 이 일을 두고 마치 자기 내부에 다른 이가 말하는 것과 같은 경험을 했다고 말했습니다(소설). 

 

하나님이 낯설어질 때

 

아브라함은 아들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딴 길로 가지 말고 곧장 나아갈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미련에 붙잡히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돌아섰습니다. 아들과 단둘이 남은 하갈은 그렇게 미지의 세계로 나아갔습니다. 그녀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걸었습니다. 걷는다는 의식도 하지 못한 채 앞을 향해 걸었습니다. 

 

하늘도 대지도 고요했습니다. 내리쪼이는 햇살은 뜨겁고 땅에서 반사된 햇살은 따가웠습니다. 다리는 흐느적거렸고 목은 타들어갔습니다. 이번에는 참아왔던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녀는 마음으로 외쳤습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아브라함을, 아니 하나님을 원망하고 원망했습니다. 지상의 신음을 가장 크게 듣는 다는 분이 어째서 이토록 무섭게 침묵하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을 만들고 세상을 이끌어가는 유일하신 분, 당신은 모르는가? 보지 않는 것이 없는 분, 땅의 신음을 가장 크게 듣는다고 말하신 분이 당신 아닌가? 세상 모든 사람이 모른다 해도 당신은 모를 수 없다. 모를 수 없는 분이 어떻게 모른 체하는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가? 그녀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69

 

평소 알던 사람이 갑자기 낯설어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특별한 계기들을 통해서 그러는데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 우리가 알고 있던 하나님, 믿었던 하나님이 낯설어질 때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평생가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다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은 성경과 또 나와 누군가가 보고 느낀 소소한 경험들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낯설게 느껴질 때가 언제인가요? 주로 우리는 언제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지나요? 주로 이런 경우 아닌가요? 보편적으로는 내가 원하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나 혹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을 때나 또는 하나님이 나에게 큰 관심이 없고 침묵하는 것 같으실 때 그분이 멀고 낯설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갈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했습니다. 물론 철학자 보부아르는 ‘침묵도 목소리’라고 말했지만, 하갈은 귀 기울이시고 세밀하게 반응하시는 그분께서 침묵하시는 모습을 보며 엄청난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치 일본 작가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을 떠올리게 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면 엄청난 고문을 당할지도 모르는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음과 배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이들 앞에서 침묵하십니다. 하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살피시는 분이 살핌을 거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는가. 신은 왜 이러시는가. 그때 그분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다고, 어떻게든 사막을 걸어 멀리 달아났어야 했다고,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갔어야 했다. 고, 그분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아들과 함께 쫓겨나 뜨거운 햇살 아래 지쳐 쓰러진 그녀는 후회했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88

 

하갈은 사라로부터 도망친 첫 번째 사건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후회했습니다. 그때 자신을 찾아온 하나님을 믿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입니다. 그때 자신을 찾아온 하나님의 말을 믿지 않았으면, 이 같은 절망감을 다시 느끼지 않았을 텐데, 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우리도 종종 이 같은 경험을 하곤 합니다. 당시에는 자신이 바라던 어떤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 같고 또 어떤 동네로 이사 가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같았고 또 어떤 이와 만나 관계를 맺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일들 속에 하나님이 계셨던가 또는 이 일들을 정말 하나님께서 정말 바라셨던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전에 믿던 것이 부정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갈도 그랬습니다. 처음 자신에게 다가온 그 하나님이 이토록 원망스러울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처음 광야로 도망쳤을 때, 왜 자신을 찾아와 만나주셔서 그날을 원망했습니다.  

 

이렇게 광야로 내몰아 죽이려고, 아들과 함께 죽이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한 것인가. 그때 주었던 뜨거운 약속들은 무엇인가. 헛된 희망에 기대 노예로 숨죽이며 살게 해놓고, 결국 이렇게 뜨거운 태양 아래서, 아들과 함께 죽게 하는가. 그녀의 가슴속에는 말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분이 나타나 말을 시킨다면 쏟아낼 말들, 오직 그분에게만 터뜨릴 말의 더미들이 가득했다. 이건 옳지 않아요. 온종일 되된 그 말은 곧 그분을 향한 항의의 말이기도 했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73-74

 

그녀의 가슴에는 하나님께 쏟아낼 말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갈은 그렇게 이스마엘과 함께 점점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 

 

절망의 순간에 찾아오신 하나님

 

아들은 뜨거운 햇볕 아래 바짝 마른 양가죽처럼 되어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눈은 아까부터 감겨 있었다. 갈증을 호소하는 듯 달싹거리는 마른 입술과 가끔씩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옅은 신음만이 그의 생명이 아직 붙어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직 죽지 않았다는 그 표시는 그러나 곧 죽을 거라는, 부정할 수 없는 표시이기도 했다. 내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녀는 누구에게 말한다는 의식 없이 말했다. 누군가 들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나온 그녀의 말은 거의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그녀가 죽어가는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죽어가는 아들을 보지 않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녀는 죽어가는 아들을 눈에 담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다. 의식이 흐려지고 잠이 쏟아지려고 했다. 그녀는 잠에 빠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뿐, 눈은 저절로 감겼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90-91

 

그때였습니다. 모든 희망의 끈을 놓으려는 순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놀란 듯 그 음성은 잠들어가는 그녀를 불러 깨웠습니다. 

 

그 순간 몹시 다급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하갈아. 그녀보다 더 놀란 것 같은 목소리가 말했다. 왜 그러고 있느냐? 이 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어서 일어나서 아이를 안아라. 그녀는 탈진해서 눈도 뜨지 못한 채, 나더러 어쩌라고요. 죽어가는 내 아들 입에 물이나 축여주세요. 하고 중얼거렸다. 그녀는 자기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몰랐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네 아이는 죽지 않을 것이다. 어서 일어나서 물을 마시게 해라. 목소리가 재촉했다. 거부할 수 없이 부드럽고 압도적인 목소리, 그분의 음성이라는 사실이 그제야 깨달아졌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92

 

성경에는 우리 삶의 다양한 면모가 그려져 있습니다. 고난, 욕망, 전쟁, 시기, 구원 등 성경에는 우리 삶의 다양한 이야기가 함축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인물들은 위기를 겪지 않는 인물이 없고, 실수를 하지 않는 인물들도 없습니다. 하갈 이야기도 이 맥락을 따라 갑니다. 절망의 순간, 가장 밑바닥의 순간에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애써 부정하고 싶은 일이지만, 하나님은 주로 이 같이 인간의 의지가 완전히 꺾여 있는 상황 가운데 찾아오십니다. 

 

좀 엉뚱한 상상이지만, 하갈 이야기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방식과 유사한 느낌을 줍니다. 여러분께서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자신이 수영을 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누가 물에 빠졌으면 바로 들어가 구하면 될까요? 그러면 절대 안 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엄청난 두려움과 절박함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누가 옆에 다가오면 살고자 하는 그 의지 때문에 자신을 구하러 온 사람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두 사람 모두 물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렇기에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는 그 사람의 이 충분히 빠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저는 20대 때 교회 수련회에서 직접 이 상황을 목격해 봤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하갈은 힘이 모두 빠진 순간,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 결정적인 순간에 만난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물을 발견하게 되고, 두 모자는 목숨을 건지게 되지요. 이후 그들은 광야에서 살게 되는데, 이스마엘은 이다음 성장하여 활을 쏘는 사람이 됩니다. 

 

여기까지가 성서학당 세 번째 시간 <하갈의 노래>를 통해 나눌 이야기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 책 제목이기도 한 <사랑이 한 일>에 관해 나눠보겠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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