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청파 Note

[청파 Note / 성서학당] 사랑이 한 일: 소돔의 하룻밤 (2)

20211104 청파교회 목요 <성서학당> : <창세기> 속 아브라함 일가 새로 보기!

 

사랑이 한 일: 소돔의 하룻밤

 

<창세기 19장 4-8절>

 

4. 그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소돔 성 각 마을에서,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남자가 몰려와서, 그 집을 둘러쌌다. 

5. 그들은 롯에게 소리쳤다. "오늘 밤에 당신의 집에 온 그 남자들이 어디에 있소? 그들을 우리에게로 데리고 나오시오. 우리가 그 남자들과 상관 좀 해야 하겠소." 

6. 롯은 그 남자들을 만나려고 바깥으로 나가서는, 뒤로 문을 걸어 잠그고, 

7. 그들을 타일렀다. "여보게들, 제발 이러지 말게. 이건 악한 짓일세. 

8. 이것 보게, 나에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두 딸이 있네. 그 아이들을 자네들에게 줄 터이니, 그 아이들을 자네들 좋을 대로 하게. 그러나 이 남자들은 나의 집에 보호받으러 온 손님들이니까,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게."

 

 

기에 가하는 폭력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소돔의 하룻밤>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소돔의 남자들은 외부인, 이 외지인들을 어떻게 대하려고 합니까? 창세기 19장 5절을 보면, 우리가 그 남자들과 상관 좀 해야겠다고 말합니다. ‘상관하다’는 말은 성적으로 폭행을 가하겠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모욕을 주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가장 쉽고 또 자주 행해지는 게 말로 모욕을 주는 것입니다. 넌 그것밖에 못하냐, 왜 그 모양이냐, 왜 그렇게 생겼냐, 어디다가 써먹나 등과 같은 말이죠. 그런데 말 이외에 사람의 신체에 가하는 모욕 가운데 큰 모욕은 뺨을 때려서 주는 모욕감입니다. 사실 살아가면서 뺨을 맞아볼 일이 얼마나 있겠습니까마는 아마 크고 작은 경험들이 있으실 겁니다. 다른 신체 부위보다 이상하게 뺨을 맞으면 큰 모멸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모멸감을 안겨주는 폭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기 혹은 유사 성기에 가해지는 폭력입니다. 이승우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신체의 어느 부위에 대한 폭력보다 혐오스럽고 모멸스러운 것이 뺨에 대한 것이다. 뺨을 때리는 것보다 훨씬 큰 혐오의 표현이면서 가장 큰 모멸감을 안겨주는 것이 성기(와 유사 성기)에 가해지는 폭력이다. 이 폭력이 집단에 의해 개인에게 행해질 때 혐오와 모멸감의 수치는 배가된다. 성기를 향한 이 집단 폭력은 무의식적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오로지 폭력의 내재적 효과만을 향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24

 

창세기 3장을 보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벗은 몸이라는 알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 서로의 몸을 가립니다. 그래서 에덴 이후를 상상한 그림들을 보면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거나 성기를 가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수치심이 뭔지 아는 자들입니다. 수치심은 자신의 성기가 드러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죠. 

 

바로 생명 잉태와 쾌락이 응축되어 있는 이 성기는 보호받아 마땅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성기를 잘 감추고 다닙니다. 그런데 오늘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소돔의 남자들은 이 나그네들의 성기에 폭력을 가함으로 모멸감을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뺨’보다 더 모멸감을 느끼는 이 ‘성기’에 폭력을 가하는 것도 모자라 집단이 개인에게 그 행위를 가하려고 합니다. 혐오감과 수치심은 배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돔의 남자들이 이 나그네들에게 행하려는 행위가 얼마나 악한 짓인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롯의 재판관 행세

 

롯은 소돔성 남자들을 말립니다. 그는 이건 악한 짓이며 그 행위를 멈춰야 마땅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소돔성 남자들은 어떻게 반응했나요? 본인도 나그네살이를 하는 주제에, 우리에게 재판관 행세를 하려 한다며 롯에게 먼저 달려듭니다. 

 

참 흥미로운 반응입니다. 롯은 소돔 땅에서 이십 년 이상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보고 나그네살이라니? 롯을 향한 이들의 비난은 어찌된 일일까요? 이승우 작가는 말합니다.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땅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그 도시에 스며들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도시 사람들이 그를 스며들지 못하게 했다. 그가 그 도시 사람들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도시 사람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 일 없을 때는 영역 안의 일원처럼 대했지만 무슨 일이 있을 때는 영역 밖의 외부인으로 간주했다. (생략) 롯도 큰 부자였다. 땅을 살 경제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사지 못한 이유는 경제력이 아니라 자격이 없어서였다. 그가 땅을 갖도록 그 땅의 사람들이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허용하지 않은 것은 그를 계속해서 나그네로 놓아두기 위해서였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31-32

 

롯은 소돔성에 오래 살았지만 여전히 이방인이었습니다. 소돔 출신이 아니었던 롯은 아무리 그곳에 오래 살고 또 경제력이 있어도 그저 나그네에 불과했습니다. 소돔 사람들의 텃세와 그들의 외지인 혐오는 이미 여기에서도 충분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평소 그런 대우를 받았던 롯이었기에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지키려던 롯의 행동은 소돔 남자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나그네로 사는 것

 

여러분! 나그네의 삶은 어떤 삶일까요? 하나님께서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인 ‘과부, 고아, 나그네’ 가운데 이 나그네는 어떤 존재를 말하는 걸까요? 이승우 작가는 말합니다. 

 

나그네로 사는 것은 길 위에서 사는 것과 같다. 그런데 길은 머물러 사는 곳이 아니고 (어딘가로) 가는 곳이다. 고정된 장소가 아니고 유동하는 흐름이다.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는 트인 공간이다. 길 위의 사람은 어딘가로 가는 중에 있는 사람이다. 길 위에서 사는 것은 어딘가로 가는 중의 상태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다. 도착은 한없이 연기되고 머묽은 영원히 유보된다. 어딘가로 가는 중의 상태를 유지한 채 사는 것만 허용된다. 이십몇 년 동안 소돔에서의 롯의 삶이라는 것이 그러했다. 롯은 그 도시에 매혹되어 이십 년 넘게 그곳에 살았지만 아직 그곳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32

 

구약, 신약을 한마디의 말로 정의하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구약은 ‘떠나라’이고, 신약은 ‘따르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착하지 말고 어딘가를 향해 계속 나아갈 것을 요청합니다. 신약은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합니다. 생명과 평화의 주님을 따르라고 요청하지요. 그러니까 구약의 메시지는 다른 말로 ‘나그네와 같은 삶으로의 초대’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나그네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저는 여전히 나그네의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는데요. 타협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재까지 이렇게 정리를 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나그네의 삶은 정착하지 않고 물리적인 공간을 넘나드는 삶이겠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경우에는 우리의 정신이 나그네의 정신과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지금 사는 집, 동네, 직장, 교회를 떠나라고 하시면 떠나야 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를 나그네로 여기는 것, 낯선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기위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사용하는 방법은 독서와 여행, 낯선 이들과의 만남, 열린 대화 등입니다. 

 

나그네는 길의 사람입니다. 길은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기 위한 장소입니다. 머물러 사는 곳이 아니지요. 어느 곳에, 언제 도착할지, 언제 안정을 누릴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인생이 나그네의 인생입니다. 방금 함께 읽은 문장의 마지막 이 말이 참 여운을 남깁니다. ‘롯은 그 도시에 매혹되어 이십 년 넘게 살았지만 아직 그곳에 도착하지 못했다.’ 

 

롯의 이상한 제안

 

그렇게 나그네로 취급받던 롯은 아주 이상한 제안 하나를 합니다. 다음에 나눌 이야기는 나그네들을 내놓으라는 소돔성 남자들의 말에 자신의 두 딸을 내놓겠다는 바로 그 내용입니다. 이 나그네들은 나의 집에 보호받으러 온 손님들이니까 그들에게는 아무 짓도 저지르지 말고, 대신 자신의 딸을 당신들 원하는 대로 하라고 제안합니다. 

 

독자들 입장에서는 정말 황당할 수밖에 없는 제안입니다. 이승우 작가는 롯의 마음에 입술을 달아줍니다. 절대적인 명령을 받은 롯과 그로인해 포기해야 할 것들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롯은 손님들은 보호하고 딸들은 보호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아니, 손님들을 보호하기 위해 딸들의 보호를 내팽개친다. 보호 상태에 있던 딸들을 비보호 상태로 바꾼다. 가장이자 아버지인 그의 이런 태도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는 손님들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이 명령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어서 다른 모든 것을 조건화하고 상대화한다. 이 명령의 이행을 위해서는 포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없다. 딸들이라고 제외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손님은 신과 같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35

 

나그네들을 대신해 딸들을 내놓는 롯의 태도를 이해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 철학자(사르트르)가 말한 이야기는 우리 삶을 함축해 놓기에 충분합니다. 우리 ‘인생은 B와 D사이의 C다’라고 한 말 말입니다. B는 Birth, 즉 태어남이고 D는 Death, 즉 죽음이고 C는 Choice, 즉 선택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된 선택을 통해 인생을 삽니다. 우리가 선택하기도 하고, 선택되기도 하는 게 인생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선택이라는 것은 늘 포기를 동반합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면 선택하지 않은 쪽은 포기되기 마련입니다. 롯은 절대 명령 앞에 선 자였습니다. 그 명령은 손님들, 외지인들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기에 명령이 이행되는 과정에서 나그네들이 딸들보다 우위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롯은 손님을 지키기 위해서 딸들을 포기했습니다. 손님을 지키는 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소돔성 남자들의 관심

 

그런데 더 이상한 점은 소돔성 남자들의 반응입니다. 롯은 마치 광기에 사로잡혀 있어 보이는 그리고 도저히 무슨 일을 저지를지 예측할 수 없는 이 폭도나 다름없는 남자들에게 자신의 딸을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이 제안은 소돔의 남자들이 솔깃해할 만한 것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게 성적 쾌락이라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극도의 흥분 상태에 있던 이들이 분별력 있는 처신을 보입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 남자들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무차별적이고 무분별한 이들의 극도의 흥분 상태를 감안하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분별 있는 처신이다. 마음대로 하라고 내주겠다는 롯의 딸들에게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는 이들은 자기 딸을 보호하지 않겠다는 롯만큼, 아니 그보다 더 이상하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36

 

소돔성 남자들은 롯의 딸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정확히 그것이 아님을 밝히며, 오히려 재판관 행세를 하는 롯에게 폭력을 가하려 합니다. 이들은 왜 롯의 두 딸을 거부하고 계속 나그네들을 찾았을까요? 정말 이들이 원한 건 동성 간의 성행위였을까요? 이승우 작가는 말합니다. 

 

남자를 가까이 한 적 없는, 장성한 처녀들을 거부하는 그들의 태도는 그들의 진짜 관심이 성적인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성행위나 성폭력은 수단일 뿐 목표가 아님을 시사한다. 그들은 나그네들을 내놓으라고 말하면서 그들과 성행위를 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이들이 하려고 한 것은 외지인에 대한 (성행위를 통한, 그것도 집단적으로, 강제적으로, 동성을 향해 자행하는) 모욕과 처벌이지 성행위 자체는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36-37

 

만일 소돔성 남자들의 목표가 성행위에 있었다면, 롯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그들의 진짜 유일한 관심은 성적인 것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럼 정말 소돔성 남자들은 남자들과의 관계에서만 쾌락을 느꼈던 것일까요?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순 없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이방인, 외지인에게 가할 모욕과 처벌이지 성적인 결합 자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소돔의 남자들이 모욕하고 처벌하려는 대상은 오늘밤 이 도시에 들어온 낯선 이방인들이지 이 도시에 살고 있던 익숙한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현상에 대해 소돔의 남자들이 여자들과의 성적 결합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고 남자들과의 관계에서만 쾌락을 느끼는 풍조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롯의 딸들이 낯선 이들이 아니고 익숙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보다 부자연스럽다. 인류는 동성 간의 성행위가 더 보편적이고 더 일반적인 사회를 가져본 적이 없다. 만연해 있었다고 해도 더 보편적이고 더 일반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무리들이 정말로 원한 것이 외지인들에 대한 모욕과 처벌이라고 한다면, 이 장면을 근거로 그곳에 그런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고 단정하는 것도 신중하지 않은 일일 수 있다. 그들이 행한, 멸망에 이를 정도의 악한 짓이 동성 간의 성행위였다고 규정해버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37-38

 

그렇죠. 두 나그네와 상관하겠다는 소돔성 남자들의 반응을 보며, 소돔의 남자들이 여성들과의 관계보다 남성들과의 관계에서만 쾌락을 느끼는 풍조를 지녔다는 건 뭔가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승우 작가는 인류가 동성 간의 성행위를 더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여겼던 사회는 없었다고 말합니다. 있을 순 있어도 보편적이거나 일반적인 경우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뭘까요? 우리는 이들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외지인 혐오

 

그렇다면 정답은 한 가지입니다. 눈치를 채신 분도 계실 텐데요. 소돔성 남자들이 갖고 있는 죄악은 무비판적인 외지인에 대한 혐오입니다. 이승우 작가는 말합니다. 

 

롯은 그 흥분한 무리들이 그의 집안에 있는 낯선 남자들과 집단적으로 성행위를 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손님인, 외지에서 온 나그네들을 모욕하고, 모욕하여 길들이겠다고 주장하는 것임을 알았다. 비상식적이고 제어하기 힘든 성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비이성적이고 무비판적인 외지인 혐오에 붙들려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38

 

소돔성 남자들은 동성 간의 비상식적인 성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니라 외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타, 혐오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존재들을 조금도 품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뭐랄까요. 계속 이런 의문을 가진 분들이 계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왜 굳이 나그네들과 상관해야겠다고 말했던 걸까요? 폭력이면 폭력이지 왜 동일한 성을 가진 사람 간에 성행위를 하겠다고 한 걸까요? 

 

서두에 뺨을 맞는 것이 정말 모욕적인 처사인데, 그보다 더 모욕적인 것이 성기에 가하는 폭력이라고 했습니다. 집단이 가하면 훨씬 심한 모욕을 느끼게 되고요. 그런데 고대 세계에는 포로나 원수 혹은 적들을 복종시키는 전통적인 방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남성을 여성처럼 대하는 것이라는데요. 잭 로저스 교수는 그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웨스트조지아 주립대학의 심리학 교수 대니얼 헬미니액(Daniel Helminiak)의 지적에 따르면, 고대 세계에서 동성애 강간은 승자가 포로로 잡은 원수들과 적들의 복종을 강조하는 전통적 방법이었다. 그 문화에서 남성에게 가장 부끄러운 경험은 여성처럼 취급 받는 것이었고, 남성을 강간하는 것이 가장 난폭한 그런 처우였다. 


잭 로저스, <예수, 성경, 동성애>, 한국기독교연구소, 2015, p.143-144

 

고대 사회는 아주 극단적인 남성우월사회였습니다. 그렇기에 남성이 여성처럼 대우를 받는 게 엄청난 두려움이자 모욕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소돔성의 남자들은 나그네들의 성기에 폭력을 가하거나 또는 남성이 여성과 성관계를 맺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대하면서 모욕을 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이 소돔의 이야기를 보며, 소돔의 멸망 이유가 소돔성 남자들의 동성애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몹시 부자연스러운 해석처럼 여겨집니다. 

 

심판을 면하게 된 ‘소알’

 

어쨌든 소돔성 남자들은 롯의 만류를 재판관처럼 행세한다고 여겼고, 이로 인해 흥분한 나머지 롯의 집 대문을 부수려고 했습니다. 그때 집 안에 있던 두 나그네는 잽싸게 손을 내밀어 롯을 안으로 끌어들인 후, 사람들의 눈을 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롯의 집 대문을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의 이야기에는 좀 속도를 붙여보겠습니다) 이후 하나님의 천사들은 롯에게 식구가 더 있냐고 물으며 그들을 데리고 성 밖으로 도망가라고 말합니다. 이 성 안의 사람들 때문에 울부짖는 소리가 주님에게까지 이르렀고, 주님께서는 바로 이 소돔을 멸하기 위해 자신들을 보낸 거라고 밝힙니다. 롯은 사위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동틀 무렵이 되었고 천사들은 롯을 재촉하며 부인과 두 딸을 데리고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라고 명했습니다. 

 

소돔에 미련이 남았는지 계속 꾸물거리는 롯을 천사들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성 밖으로 끌어내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친절히 저기 보이는 한 산으로 도피하라고 명하지만, 롯은 산에 도착하기 전 죽을까 두려워 다른 길을 알려달라고 청합니다. 그러고 나서 본인 스스로 저기 보이는 ‘작은 성’으로 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했습니다. 두 천사는 롯의 청을 들어주었고 ‘소알’이라고 불리는 작은 성으로 아내, 두 딸과 함께 도피하게 됩니다. 

 

그 후,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이 소나기처럼 쏟아졌고, 롯에 의해 그 ‘작은 성’ 사람들은 심판을 면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나눌 이야기는 바로 이 ‘작은 성’ 소알에 관한 것입니다.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 ‘작은 성’ 소알은 함께 심판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천사의 말로 미루어 보건대 롯이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소알’은 소돔과 함께 멸망했을 것입니다. 창세기 19장 21절에서 천사는 “좋소. 내가 그 청을 들어주겠소. 저 성은 멸하지 않겠소.”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성 사람들이 소돔만큼 악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롯의 개입으로 멸망의 순간에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롯은 소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 성을 구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평소 소알에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추측할 수 있는 단서 또한 성경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흥미로운 사실은 ‘구원’은 가끔 이런 식으로, 예측할 수 없고 대비할 수 없는 우연한 변수에 의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이야기가 우리의 인생관 혹은 신앙관까지 결정해 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때로 힘겹고 어려운 일을 당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겪는 사람들을 가까이서 봅니다. 또 좋은 사람인데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경우를 보기도 하고, 반대로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인데 별일 없이 잘 사는 경우를 목격하곤 합니다. ‘소알’에 일어난 일을 이런 경우에 적용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승우 작가는 말합니다.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그리고 오늘 살아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말입니다. 

 

그들이 소돔 사람들보다, 어떤 면에서든 나았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파괴되지 않은 성이 파괴된 성보다 더 정의로웠을 거라고 단정할 수 없다.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보다 더 착할 거라고 판단할 수 없다. 오늘 살고 있는 사람이 어제 죽은 사람보다 살 가치가 더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54

 

정말 그렇죠. 소알 사람들소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걸 발견하긴 어렵습니다. 그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정의롭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들의 구원은 롯의 배려나 어떤 관심에서 비롯되었기 보다는 그저 그곳이 더 나아보였던 롯의 개인적인 선택에 의해서 이뤄졌던 것입니다. 

 

우리 이라는 게 이렇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종종 범하는 실수 중에 이런 게 있죠. 우리 교회의 한 장로님이 독일에서 어떤 한인 교회에 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그 교회를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의 설교 때문에 그러셨다는 데요. 그 교회 목사님이 운전을 하던 중에 큰 사고가 났는데, 큰 차에 타고 있던 자신은 살았고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은 그만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시며, 내가 산 것은 주님의 은혜다, 내가 큰 차를 타서 죽지 않은 것은 모두 주님의 은혜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그 설교를 들은 후 장로님은 더 이상 그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당연히 어떻습니까? 당연히 그 목사님을 욕하게 되죠. 그런데 신앙인들 가운데 정말 많은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이런 식의 사고를 한다는 것입니다. 악인이 의인보다 잘 사는 경우는 허다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한 게 얼마나 된다고, 내가 저 사람보다 지은 죄가 얼마나 크다고 나는 늘 어렵고 저 사람은 잘 사는지 억울할 때가 많습니다. 반대로 나는 평안한데 어떤 사람들의 삶은 늘 고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 5:4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전도서 기자도 비슷한 말을 하지요. “모두가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깨끗한 사람이나 더러운 사람이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나 드리지 않는 사람이나, 다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 죄인보다 나을 것이 없고, 맹세한 사람이라고 해서 맹세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다(전 9:2).”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사는 것입니다. 또 지나친 자괴감에 빠져 자신을 죄인 취급할 필요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두 주 동안,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지혜를 배웁니다. 다음 시간에는 <하갈의 노래>에 관해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살롱(salon)에서 나누는 성경 이야기

www.youtube.com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