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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성서학당] 사랑이 한 일: 소돔의 하룻밤 (1)

20211028 청파교회 목요 <성서학당> : <창세기> 속 아브라함 일가 새로 보기!

 

사랑이 한 일: 소돔의 하룻밤

 

<창세기 19장 4-8절>

 

4. 그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소돔 성 각 마을에서,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남자가 몰려와서, 그 집을 둘러쌌다. 

5. 그들은 롯에게 소리쳤다. "오늘 밤에 당신의 집에 온 그 남자들이 어디에 있소? 그들을 우리에게로 데리고 나오시오. 우리가 그 남자들과 상관 좀 해야 하겠소." 

6. 롯은 그 남자들을 만나려고 바깥으로 나가서는, 뒤로 문을 걸어 잠그고, 

7. 그들을 타일렀다. "여보게들, 제발 이러지 말게. 이건 악한 짓일세. 

8. 이것 보게, 나에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두 딸이 있네. 그 아이들을 자네들에게 줄 터이니, 그 아이들을 자네들 좋을 대로 하게. 그러나 이 남자들은 나의 집에 보호받으러 온 손님들이니까,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게."

 

 

사랑이 한 일

 

안녕하세요. 목요 <성서학당>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번이 제가 준비한 세 번째 성서학당인데요. 지난 두 번의 시간은 독일 신부이자 작가인 안셀름 그륀의 책 <사랑한다면 투쟁하라>와 <여왕과 야성녀>를 주교재로 삼아 이야기를 나눠 봤습니다. 지난 강의가 궁금한 분들은 위 링크를 클릭해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이번 가을 성서학당은 총 5-6 강의로 이뤄집니다. 이번에도 주교재가 있는데요. 소설가 이승우 선생님이 쓴 <사랑이 한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책은 작년에 출간된 나름 따끈한 책입니다. 이미 이승우 작가님에 대해 아는 분들이 계실 텐데요. 이승우 선생님은 신학을 공부한 작가입니다. 그는 서울신학대학교에서 학부를 마치고,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다니다가 중퇴한 후 글을 쓰게 됩니다. 작가님의 다른 책도 여러 권 읽어봤는데 울림이 커서 여러 사람에게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이승우 작가님은 김기석 목사님과 가까운 사이이시기도 합니다. 

 

성경은 주름진 텍스트

 

<사랑의 생애>에는 총 다섯 개의 에피소드가 담겨 있습니다. 모두 창세기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그 중에 특별히 아브라함 일가와 관련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성서학당은 아브라함과 관련된 다섯 개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진행이 될 예정입니다. 각 에피소드에는 성경 본문이 정해져 있는데요. 진행 방식은 이러합니다. 먼저 해당 본문을 함께 읽습니다. 그리고 해당 본문의 줄거리를 살펴봅니다. 그러고 나서, 성경에 감춰진 이야기, 즉 성경에서 발언권을 얻지 못해 아무 말 하지 못했던 이들의 목소리에 마이크를 달아줄 예정입니다. 

 

김기석 목사님께서는 성경을 일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매끈한 텍스트가 아니고 주름진 텍스트다라고 말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드러난 이야기보다 감춰진 이야기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주름 속에 담긴 이야기를 상상하고 또 연구해야 합니다. 바로 목사님의 이러한 말씀이 <성서학당> 준비에 큰 영감을 주었고, 이승우 작가님의 책을 교재로 삼게 만들었습니다. 

 

이승우 선생님은 성경 속 이야기의 이면을 면밀히 살폈는데요. 작가님은 예를 들어, 쫓겨난 하갈이나 번제물로 바쳐질 번한 이삭에게는 거의 발언권이 없는데, 이들이 하지 못한 이야기, 침묵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우리는 바로 <사랑이 한 일>에서 말한 이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가운데 제게 감명을 주었거나 또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대목이 있다면 심화하는 방식으로 진행해 보겠습니다. 그럼 첫 번째 이야기부터 나눠보겠습니다. 

 

아브라함 처음 이야기

 

첫 번째 이야기는 <소돔의 하룻밤>입니다. 창세기 19장 4-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낭독] 간단히 줄거리를 살펴보면요.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를 따라 아내 사라와 조카 롯과 함께 자신의 고향 땅인 우르를 떠납니다(창11:31). 그리고 하란에서 아버지를 여의고, 계속해서 사라와 롯과 함께 계속 나아갑니다. 그들은 최초로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제단을 쌓습니다. 그리고 다시 가나안을 떠나 점점 남쪽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있는 곳에 기근이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굶주림을 극복할 필요가 있었는데,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를 이집트에 누이라고 속여서 넘김으로 목숨을 건 질뿐만 아니라 많은 선물까지 받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재앙으로 바로는 진실을 알게 되고 사라는 다시 아브라함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그들은 그 길로 떠나, 전에 처음 제단을 쌓았던 곳 ‘벧엘과 아이’ 사이의 한 곳에 정착합니다. 그런데 그 땅의 크기가 아브라함 일행이 함께 살기에는 넉넉지 않아서, 롯은 요단강 지역 인근에 있는 땅 ‘소돔과 고모라’로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는 바로 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일어난 일을 다룰 예정입니다. 

 

아브라함의 딜(Deal)

 

소돔과 고모라에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롯이 살았습니다. 재밌는 사실은 처음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동산 같고 이집트 땅과 같이 비옥한 곳(창13:10)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곳은 죄악이 가득한 곳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창세기 19장에 감춰진 이야기, 그 안에 일어나는 이야기를 <사랑이 한 일>을 통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해당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따르면,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 때문에 망한 가나안의 한 성읍을 가리킵니다. 실제 위치는 사해 남동쪽 한 언덕에 위치해 있을 거라 예상합니다. 물론 정말 존재했던 공간인지 아닌지는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아무튼 이 ‘소돔과 고모라’는 흉악무도함의 공간이었습니다(창18:20).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세 명의 손님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한 눈에 알아본 걸까요? 그들이 하나님의 천사인 것을 아는 듯 세 손님을 정중히 모십니다. 그 손님들은 사라에게 아들이 생길 것을 약속하고 돌아가려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확인 차 천사들을 보냅니다. 주님께서 그 성읍을 멸하시려는 사실을 안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딜(Deal)을 합니다. 결국 끈질긴 그의 협상기술로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10명만 있어도 그 성읍을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냅니다. 오늘 살펴볼 이야기는 바로 이 다음에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줄거리

 

아브라함을 찾아 온 세 천사 가운데 두 명이 소돔에 이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성 어귀에 있다가 땅에 엎드려 그들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롯은 그들을 극진히 모신 후 자신의 집에 초대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길에서 하루만 묵고 떠날 생각이라며 그의 초대를 거절했지만, 롯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그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집에 도착해 식사를 하고 난 뒤, 잠에 들려고 할 때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마을의 남자들이 잔뜩 롯의 집을 찾아옵니다. 다양한 연령층을 이룬 한 무리의 남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롯을 향해 당신의 집을 찾아온 그 남자들이 어디에 있냐며, 우리가 그들을 ‘상관 좀 해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롯은 그들을 타이르며 이런 악한 짓을 하지 말라고 만류합니다. 

 

그러고서 하는 롯의 말이 참 독특하다 못해 좀 엽기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보낸 두 천사(남자)를 대신해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신의 두 딸을 내어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당신들 좋을 대로 해도 좋지만, 자신의 집에 보호받으러 온 손님들에게는 아무 일,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재판관 노릇을 하는 롯의 반응에 분노하며 롯에게 폭력을 가하려 할 때, 하나님의 두 천사는 롯을 집안으로 끌어들인 후 사람들의 눈을 멀게 만듭니다. 그로인해 소돔성 남자들은 출입문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이어서 이 두 천사는 자신들이 이곳에 온 목적이 이 성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기에 이곳을 심판하러 온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렇기에 롯을 향해 어서 빨리 당신의 식구들을 데리고 성 바깥으로 도피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 두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소돔을 빠져나옵니다. 그리고 소돔 성 바깥에 있는 작은 성, 즉 ‘소알’로 그의 가족들과 향합니다. 결국 다음 날,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이 소나기처럼 떨어졌고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아브라함은 그곳을 바라보며, 마치 ‘옹기 가마’에서 나는 연기 같다는 말로 소돔의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밖에 머무는 사람

 

소설 <사랑이 한 일>의 구조는 독특합니다. 그건 이승우 작가의 글쓰기 방식이 독특하기 때문인데요. 그는 한 가지 상황을 여러 번 반복해 표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두 천사가 소돔을 찾아온 이야기도 여러 번 반복됩니다. 이렇게 반복하는 이유는 이야기의 흐름 상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다 다르기 때문인데요. 저희는 그 가운데 필요한 부분만 나누겠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이 두 명의 천사, 이 두 나그네의 시각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성문 어귀에 있다가 그들을 발견한 롯은 자신의 집에 초대를 하죠. 하지만 두 사람은 거절합니다. 바로 첫 번째 우리가 살펴볼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들은 소돔에 온 목적,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목적이 무엇인지 그 역할을 분명히 합니다. 그들은 감찰하는 자들입니다. 살피는 자는 집으로 들어가선 안 되며, 담장 밖에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들은 그 도시에 대한 사람들의 한탄과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쳐서 그것이 사실인지 감찰하기위해 온 천사들이었다. 그들은 소돔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살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집안으로 들어가면 안 되었다. 집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면 집 바깥에 대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살피기 위해서는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밀착하면 시야가 좁아지고 매몰되면 아예 시야가 없어진다. 내부자는 내부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도 잘 보지 못한다. 담은 경계를 위해 만들어진다. 사람들은 움직임과 소리를 차단하고 살피는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담을 쌓는다. 담이 만들어지면 내부와 외부가 생겨난다. 담 쌓기는 거리를 없애는 기술이다. 그런 점에서 담이 둘러쳐진 집은 밀폐용기와 같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11-12

 

뭔가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 중요한 요소들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바로 ‘서 있는 위치’입니다. 사람은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보는 것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천사들은 살피는 자들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고 어떤 일 때문에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롯의 환대가 싫어서가 아닌 원래 ‘밖에 머무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사실 우리의 인식, 우리의 앎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기위해서는 그 사람이 선 자리에 함께 서봐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법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관계의 최고 형태는 ‘입장의 동일함’이라고 했습니다. 비를 맞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게 동일함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아주는 것이 입장의 동일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와 동일한 입장에 서는 게 참 쉽지가 않죠. 우리는 그 누구와도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두 천사도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기 위해서 꾸며낸 것, 위장한 것, 연출하지 않는 장면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기에 롯의 초대에 응답하면 하나님이 부탁한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게 되는 거죠. 집 안에 머물면 사람들의 실생활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천사들은 롯의 환대를 거절했던 것입니다. 

 

롯의 분별력

 

다음 이야기는 롯의 시각에서 펼쳐진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롯의 분별력이 드러납니다. 롯은 왜 날이 저무는 그 시간까지 성문 어귀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렸는지 그 기다림 속에 감춰진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하는가. 그가 살고 있는 도시가, 특히 나그네들에게 위험하기 때문이다. 소돔은 크고 화려하고 풍요롭고 자유로운 것으로 유명했고, 무자비하고 차별적이고 문란한 것으로 유명했다. (생략) 그런 사람들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것이 롯이 저녁이면 성문 어귀에 나와 앉아 있는 이유였다. (생략) 롯에게는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한 분별력이 있었다. 대부분의 도시 사람들이 잃어버린 감각이었다. (생략)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이 보고 이 나그네들을 빼앗아갈까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서두르고, 마치 이 나그네들을 자기 집에 모시는 것이 큰 영광이라도 되는 것처럼 간절하게 행동한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14-15

 

성경을 읽어보면 롯이 왜 성문 어귀에 나가있는지 설명이 없습니다. 이승우 작가는 이 롯의 행위에 입술을 달아주었습니다. 이야기 속의 롯은 몹시 다급해보입니다. 그는 좀 놀란 모양입니다. 예고 없이 사람들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알아차렸습니다. 그것은 소돔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두 나그네가 성문 어귀를 지나자마자 그는 넙죽 엎드리며 자기 집에 오라고 청했습니다. 

 

롯은 그 성읍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잃어버린 감각을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소돔에 머물렀지만, 소돔 사람들의 지나치게 화려하고 무분별한 삶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소돔에 속하지만 속하지 않은 자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롯의 분별력이 나중 소돔이 멸망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호의를 가장한 간청

 

다음 이야기는 롯의 간청과 두 나그네의 호의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롯이 두 나그네를 향해 오늘은 자신의 집에서 묵고 다음 날 아침에 떠나라고 말합니다. 이때까지의 롯은 호의와 관련된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나그네들은 길에서 묵을 생각이라며 그의 호의를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방금 말씀드렸듯이 롯은 분별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소돔의 폭력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두 나그네에게 자신의 집에 묵으라고 말하는데, 이때부터는 호의가 아니라 간청으로 바뀌게 됩니다. 책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낯선 사람들은 이 도시가 어떤 곳인지 모르기 때문에 호의를 거절한다. 그러나 롯은 이 도시가 어떤 곳인지 알기 때문에 그들을 길에서 자게 할 수 없다. (생략)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호의를 베풀려는 사람은 불가피하게 간청하는 자가 된다. 간청을 해서라도 호의를 베풀어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이 기꺼이 간청한다. (생략) 모든 호의에는 어느 정도 강요적 성격이 포함되어 있다. 베풂은 일방적이어서 협상의 여지가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베풂은 받는 자에게 타협할 권리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봉건적이다. 베풂의 정도와 시기와 수준을 놓고 협상할 기회는 제공되지 않는다. (생략) 거절하기 힘든 극진한, 과도한, 간청의 형식을 갖춘 호의는 거절하기 힘든 강요이다. 호의가 강요로 변할 때 자발성은 내면화되고 의무가 관계의 거의 유일한 소통 규칙으로 대체된다. (생략) 호의에 반응하는 것도 호의이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16-18

 

롯은 받는 사람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예의를 갖춰 초대합니다.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기까지 하죠.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간청은 주로 누가합니까? 호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주로 간청을 합니다. 나 좀 도와줄 수 있겠니? 이번 어려움이 잘 지나갈 수 있게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등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주로 간청을 하게 되죠. 그러니까 사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두 나그네인데, 그들은 도움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롯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대신 호의를 베푸는 롯이 나그네들에게 매달려 간청을 하죠. 호의를 가장한 간청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행하는 호의에는 묘한 부분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선의를 베푸는 것, 누군가의 필요를 알고 호의를 베푸는 것은 ‘강요’의 성격을 배재할 수 없습니다. 한번 자신이 받았던 호의를 떠올려보시기 보십시오. 혹은 누군가에게 선의를 베풀었다가 오히려 상대가 언짢아하는 반응에 기분이 생했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동기로부터 낯모르는 여인을 소개받았었습니다. 그때 저는 물론 혼자였지만 혼자서도 잘 지내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러저러한 이유로 지금 당장 그분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더니 오히려 그 동기가 더 불쾌해하는 겁니다. 동기가 직접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지만, 마치 ‘내가 당신 생각해서 소개해주는 건데 그렇게 거절하면 되냐, 어떤 소개든 해 줄 때 받아야 한다’는 식의 태도로 나오자 저 또한 기분이 안 좋아졌고 동기와 저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걸 경험했습니다. 서로 오해는 풀었지만 뭔가 불편한 감정이 남긴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이중적인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도움이든, 어떤 기회를 제공받는 것이든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열등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수혜자는 그 은인을 미워하게 되는 법일까요? 이동섭 작가는 고흐(Gogh)와 관련된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상대에 비해 열등하다는 뜻이고, 열등감은 은인을 향한 공격성으로 역전되는 경향이 있다. 돈을 빌려주고 욕을 먹고, 도움을 주고 비난을 받는 이유가 이와 같다.” (이동섭, <반 고흐 인생수업>, 아트북스, 2014, p.192-193) 

 

이승우 작가는 모든 호의에는 어느 정도 강요적 성격이 포함되어 있다며, ‘베풂은 봉건적’이라고 했습니다. 권력관계가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겠지요. 베푼다는 것은 일방적이기 때문에 협상의 여지가 배제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 보면요. 호의를 가장한 강요가 먹혔는지 롯은 나그네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데 성공합니다. 이 성공은 나그네들이 롯의 강요를 수용한 결과이자 다른 한편으론 (이승우 작가가 말한) 나그네들이 롯의 호의에 호의로 반응한 결과였습니다. 

 

신념의 무서움

 

이제 나그네들은 롯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나눌 네 번째 이야기는 롯과 그들을 찾아온 마을 남자들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신념이 강한 사람, 믿음이 좋은 사람을 떠올리면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본받고 싶은 마음이 드십니까 아니면 좀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이 드십니까? 

 

그날 밤, 소돔성 남자들이 롯의 집을 찾아옵니다. 그 무리에는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다양한 연령층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짜고짜 너희 집에 온 남자들이 어디에 있냐, 어서 그들을 데리고 나오라며 소리쳤습니다. 롯의 집을 방문한 이 외지인들의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누가 먼저 이 소식을 알고 사람들에게 알렸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주동자가 있었는지, 누가 먼저 알고 알렸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승우 작가는 선동자 혹은 주동자를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무서운 신념이 이미 그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미 한자리에 있고, 모두 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여럿이지만 그들은 하나입니다. 개인은 사라지고 커다란 무리만 남았습니다. 이들에게는 더 이상 젊음과 노년, 교육과 신분의 차이도 없습니다. 그들은 한 가지 목표로 뭉쳤습니다. 두 나그네를 욕보이는 것 하나만이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오랜 시간, 아무런 의심 없이 늘 해오던 행동들은 그것을 왜하는지 또 왜 하게 됐는지 물을 필요성을 못 느끼게 합니다. 왜곡된 신념의 무서움, 그 신념으로 똘똘 뭉친 집단의 무서움은 이같은 소돔의 남자들 형태로 드러나곤 합니다. 이승우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집단적으로, 관성에 따라, 오랫동안 되풀이된 행동들은 동기와 타당성을 질문받지 않는다. 질문되지 않은 것은 말해지지 않는다. 인간의 행동에 동력을 부여하는 것은 의식화된 신념이다. 도를 넘는 무시무시한 행동은 도를 넘는 무시무시한 의식화와 신념을 필요로 한다. 쉽게 사로잡힐 수 없는 무시무시한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쉽게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행동을 쉽게 한다. 이념과 종교는 종종 인간의 비정상적인 행동들에 동기를 제공하는 신념 체계로 작동한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21

 

사람이 어떤 행동을 자연스럽게 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습관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습관화되기 위한 일정양의 축적물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기위해서는 그렇게 살려는 계속된 시도와 말씀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 등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 말은 옳은 일은 한다는 전제하에 드리는 말씀인데, 중요한 사실은 반대의 경우도 이러한 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소돔 마을의 남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해오던 관습적인 행동들, 매번 해오던 것들이었기에 의심 없이 같은 행동을 되풀이했습니다. 신념이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신념에 사로잡힌 집단은 더 두려울 수밖에 없는데, 그들에게 소수의 입장, 소수의 견해는 묵살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게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이승우 작가는 말합니다. 

 

그들이 하려고 하는, 그들이 모르는 나쁜 짓은 큰 무리, 무리지어 이루어진 힘센 한 집단이 개별자로 떨어져 있는 힘없는 한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다. 다수의 무리로 이루어진 집단이 집단을 이루지 못한 개인이나 집단이라고 할 수 없는 소수를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젊은이나 늙은이나 구별되지 않는 동일성의 한 세계가 낯설고 이질적인 외부자에게, 단지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위해를 가하는 것이다. 영역 안의 다수의 구성원들이 영역 밖에서 들어온 개인이나 소수의 외지인들을 욕보이는 것이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2020, p.23

 

소돔 남자들이 두 나그네를 욕보이려고 하는 이유가 뭔지 성경에 정확히 나오진 않습니다. 다만 추측할 뿐인데, 그들이 다짜고짜 나그네들을 내놓으라고 소리쳤다는 것과 그들을 욕보이겠다고 한 것이 그 근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근거가 따로 있었을까요? 바로 이 한 가지 아니었을까요?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온 외지인, 외부인에 대한 경계 혹은 차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을 벌하시려는 이유는 바로 이 힘없는 소수를 향해 휘두르는 폭력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말은 쉽지만 가장 지키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이 나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행위 아닙니까? 직장이나 학교 혹은 교회에 새로운 사람이 온다고 해봅시다. 여러분께서는 정말 순수하게 누군가를 환영할 수 있습니까? 이 관계를 도시나 국가로 넓혀보십시오. 그리고 타종교의 관계까지 넓혀보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누군가를 향한 차별과 배제를 자주 행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소돔의 하룻밤> 강의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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