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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벌거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삶

20151011 쓰임교회 주일 설교

 

벌거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삶

 

<히브리서 4장 12-16절>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13. 하나님 앞에는 아무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14.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지킵시다.

15.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가장 큰 위로

 

쓰임교회 오신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한 가지 질문을 드려볼까 합니다. 여러분들은 언제 가장 큰 위로를 받았다 느끼시는지요? 아마 다양한 상황에 따라 다양한 위로를 받으셨을 겁니다. 위로가 필요한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우리가 마음의 어려움을 겪었을 때 주어지는 가장 큰 위로는 아마도 ‘누군가가 내 마음을 잘 알고 있구나.’라는 생각과 ‘내가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낄 때입니다. 오늘 말씀의 시작은 바로 여기부터입니다. 

 

히브리서에 관해

 

오늘 본문말씀이 포함된 히브리서는 우리가 ‘믿음’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책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에 관해 아주 상세히 설명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바울이다, 바나바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다 등등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었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모두가 근거 없는 추측일 뿐, 우리로써는 알 수 없는 초대교회의 어떤 지도자가 기록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만 가능합니다. 

 

이 서신은 AD80-9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보는데, 당시 기독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위기를 맞았던 시기였습니다. 히브리서의 곳곳을 살펴보면 당시 성도들은 구원의 메시지를 들으려 하지 않고 게으르게 되었으며(2:1; 5:11; 6:11-12), 예배 참석을 등한시 하였고(10:25), 믿음을 포기하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3:6.14; 4:14; 10:35; 12:12-13). 그래서 본 서신의 저자는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위기를 극복하고 믿음을 강하게 하길 바라는 마음에 본 서신을 기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눈앞에 모두 벌거숭이

 

그 가운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권위와 또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설명해 놓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보아도 무관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특성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다고 합니다. 답답한 세상의 모양새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이 절실히 필요할 때도 많지만, 우리는 가끔 작고 사소한 일상의 삶 속에서도 날카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어 나오는 오늘 말씀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우리의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가 드러나는’ 크고 작은 경험들을 해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마치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벌거벗은 것 같이 말입니다. 

 

13절은 기록하기를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런 분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낱낱이 말하지 않아도 미리 다 아실 거라 생각해 그러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감출 것 없이 넉넉한 품으로 계시는 하나님께 모든 걸 보여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 감정까지도 말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는 분, 예수

 

오늘 말씀을 시작할 때 드린 이야기와도 연관되지만, 14절 이후의 말씀에 더 귀기울여보시면 좋겠습니다. 앞서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아시고 또 모든 피조물은 그의 눈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이 여기서 끝났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 뭔가 부담스러운 존재로만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14절의 말씀처럼 우리에게는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와 같은 몸으로 이 땅에 사셨던 분입니다. 그 말은 무엇을 나타냅니까? 우리와 같이 몸의 한계와 유혹을 받으셨고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아셨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분이 아니십니다(15). 그러하기에 우리는 16절의 말씀처럼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은혜의 보좌가 무엇이겠습니까? 성전, 곧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모든 일상의 지점들을 나타낸다고 보면 좋습니다. 

 

바로 제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잘 아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참 든든하지만 때로는 피하고 숨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인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셨기에 우리의 실수와 부족함, 연약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이해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이고 우리의 마음이 힘과 위로를 경험하는 지점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대표적인 차이가 있다면 바로 성육신(成肉身)의 상징, 하나님이 인카네이션(incarnation) 하셨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아주 평범한 일상과 동 떨어진 말씀과 설교들은 재고(再考)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더 깊은 묵상이 필요하다고 느껴집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벌거벗어도 창피할 것이 없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분 중에 나는 그래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더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어도 우리는 창피할 게 없습니다. 부끄러울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 청파받으신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몸을 지니시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위에서 우리처럼 흙을 밟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 내 속에 있는 모든 즐거움과 슬픔까지 다 보여드려도 전혀 문제될 게 없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욱 그러하기를 기다리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가 오더니 날이 정말 추워졌습니다. 삶이 고단하고 힘겨울 때 일수록 우리를 따뜻한 품으로 품어주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앞에 더 가깝고 친근하게 다가가는 여러분들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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