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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책] 삶이 내게 말을 걸어 올 때

 

 

책의 처음은 이러하다. 한밤중에 깨어나 ‘지금 내 삶이 정말 내가 원하던 것일까?’ 물으며 잠을 설쳐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 그래서 이 책을 다시 펼쳤다. 다시 읽으며 내 마음을 스친 글귀를 남겨보려 한다. 

 

1. 인생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라

 

나는 내 마음에 귀 기울이기보다 영웅들의 인생을 흉내 내는 ‘고상한’ 길을 찾았던 것이다. P15

 

“당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기 전에, 인생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에 귀 기울여라.”

“당신이 어떤 진리와 가치관에 따라 살 것인지를 결정하기 전에, 당신이 어떤 진리를 구현하고 어떤 가치를 대표해야 할지 인생이 들려주는 목소리를 들어 보아라.” P15-16

 

진정한 우리의 자아가 추구하는 것이 완전함이라면, 마음에도 없는 소명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폭력이다. 아무리 숭고한 비전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내부에서 길러진 것이 아니라 밖에서부터 부여된 강제의 것이라면 그것은 심각한 폭력이다. p18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듣는 데서 출발한다. 우리는 인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그 참모습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참모습이 내가 원하는 인생의 모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인생은 내 의도가 아무리 진지하다 할지라도 결코 참된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p18

 

자기 자신의 말을 적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우리는 자기 내부의 소리만 빼고 그 밖의 곳에서 들려오는 말에는 열심히 귀를 기울인다. p20

 

‘완전함’을 추구하는 데서 종종 무시하게 되는 것이 있다. 자신 있고 자랑스러운 면뿐만 아니라 싫어하는 것, 또는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것까지 포용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p21

 

우리 인생은 간디의 자서전 부제를 빌어 말하자면, ‘진리의 실험’이다. 실험에는 나쁜 결과도 성공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p22

 

우리 인생의 의미를 헤아리도록 도와주는 것은 언제나 침묵이다. 또한 말로는 결코 건드릴 수조차 없는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것도 역시 침묵이다. p23

 

2. 이제 나 자신이 되다

 

소명이란 성취해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주어지는 선물이다. 소명의 발견이란 얻기 힘든 상을 바라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참자아의 보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p30

 

소명은 나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되라고 ‘저쪽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소명은 본래 타고난 그 사람이 되어, 태어날 때 신이 주신 본연의 자아를 완성하라는 ‘여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나온다. p30

 

소명에 대한 가장 깊은 질문은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가 아니다. 더욱 본질적이며 어려운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내가 타고난 본성은 무엇인가?’이다. p37-38

 

늘 그래왔듯이 오늘날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데 우리 어른들은 자기 인생의 어두운 부분을 꼭 감추어둔 채 그들을 모질게 대한다. 젊은 시절, 내게 자신의 어두운 경험을 얘기해 준 어른은 드물었고 대부분은 성공만 거듭해 온 것처럼 행동했다. p42

 

내가 그동안 피하려고만 했던 어둠으로 한 걸음 다가선 것이었다. 그 어둠이란 내 모습을 원하는 대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었다. p56

 

자기를 돌보는 것이 결코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나의 유일한 재능, 이 땅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재능을 잘 관리하는 책무일 뿐이다. 아무 때라도 우리는 참 자아에 귀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보살핌을 줄 수 있다.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많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p59

 

로자 파크스는 아주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내가 사십 년 넘게 스스로를 가두었던 감옥에 비하면, 벽돌과 철망으로 만들어진 당신네 감옥이 뭐가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나는 이제 막 인종차별이라는 제도를 거부함으로써 그 감옥에서 빠져나온 걸요.” p65

 

세상은 지금도 우리를 자유롭게 할 진리를 기다린다. 나의 진리, 당신의 진리, 그 진리는 우리 각자가 이 땅에 처음 올 때 씨 뿌려진 것이다. 그 진리를 잘 경작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인류의 진정한 소명이라고 나는 믿는다. p67

 

3, 길이 닫힐 때

 

나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징후는 소위 탈진이라는 상태이다. 대게는 너무 많은 것을 주려는 데서 나오는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내 경험상 탈진은 내가 갖지 않은 것을 주려고 할 때 나오는 결과이다. 탈진은 분명 공허함이지만 내가 가진 것을 주는데서 나오는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주려고 해도 아무 것도 없음이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p89-90 

 

내가 알고 있는 신은 우리가 이상적인 자아에 도달하고자 어떤 추상적 기준을 따를 것을 요구하는 존재가 아니다. 신은 단지 우리가 창조된 본성, 즉 우리의 능력과 한계를 그대로 존중하기를 요구한다. 우리가 그렇지 않은 삶을 살려 할 때 현실의 힘이 우리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신이 우리를 인도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바로 우리 등 뒤에서 길이 닫히는 것이다. p91

 

내가 아는 신은 도덕보다는 현실의 근원, 즉 ‘되어야 하는’ 어떤 모습이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의 근원이다. p92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모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신은 도덕규범이 아닌 본질적인 ‘존재(isness)’와 자아에 가까운 분이었던 것이다. 내가 믿는 바대로 우리가 신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면 우리가 누구냐는 질문에 우리 역시 똑같은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입니다.” p93-94

 

인생을 충만하게 살고 싶다면 반대의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하며, 한계와 능력 사이의 창조적 긴장 속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본성을 왜곡시키지 않도록 한계를 인정해야 하며 타고난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재능을 믿어야 한다. p99

 

4. 모든 길은 아래로 향한다

 

가장 어려운 일은 남의 고통을 ‘고치겠다고’ 덤벼들지 않는 일, 그냥 그 사람의 신비와 고통의 가장자리에서 공손하게 가만히 서 있는 일이다. 그렇게 서 있다 보면 자신이 쓸모없고 무력하다는 느낌이 든다. 바로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 이런 느낌을 갖고 있는 것이다. p115

 

고통 받는 사람을 향한 신의 사랑은 우리를 ‘고치는’ 게 아니라 함께 고통 받음으로써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고독의 가장자리에서 존경과 믿음을 갖고 서 있음으로써 우리는 신의 사랑을 묵상할 수 있다. p117 

 

참 자아는 신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할 때 우리 안에 심어 놓은 바로 그 자아이다. 그 자아는 우리에게 더도 덜도 원하는 것이 없다. 우리가 타고난 그대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참 자아는 참된 친구이다. 그 우정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일뿐이다. p123-124

 

나는 소중한 것은 모두 그러하듯 신 또한 저 하늘 위 어딘가에 있는 존재라고 상상했었다. 나는 신학대학에서 신을 ‘존재의 토양’이라고 한 틸리치(Tillich)의 표현을 처음 들었다. 그 말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그 말의 참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신에게 이르는 길이 올라가는 게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것임을 이해하기 전까지 나는 땅 아래, 지하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p126

 

이제 나는 나 자신이 약함과 강함, 약점과 재능, 어둠과 빛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라는 걸 안다. 이제 나는 완전해진다는 것이 그 중 어느 하나도 거절하지 않고 포용하는 것임을 안다. p128

 

약점과 치부, 어둠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면 그런 것 때문에 내가 흔들리는 일이 줄어든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원하는 것은 내 자아의 일부로 알아 달라는 것뿐이니까 말이다. (중략) 내가 우울증이라는 어두운 숲속에서 발견했던 것 중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내 일부가 계속 우울한 상태로 남아 있고 싶어 한다는 점이었다. 이 죽음과 같은 삶만을 계속 고집한다면 인생을 살아내기가 한결 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p129 

 

5.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다

 

훌륭한 리더십은 자기 내부의 어둠을 꿰뚫고 지나가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지점에까지 도달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그들은 이미 어둠을 경험했고 길을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들을 ‘완전함’으로 이끌 수 있다. p144

 

자기 영혼을 다루는 것보다는 물질과 제도를 다루고, 타인을 조종하는 외부 세계의 일이 훨씬 더 쉽다. 우리는 외부 세계가 마치 무한히 복잡하고 힘든 것처럼 얘기하길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내적 여행의 미로에 비하면 가벼운 스텝 댄스에 불과하다. p146

 

6.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비유는 농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공업에서 나온다.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는 우리 인생을 ‘기른다(grow).’가 아니라 ‘만든다(make).’고 믿는다. 일상의 대화에서 ‘만든다.’는 말을 어떻게 쓰는지 한 번 들어 보라. 시간을 만들고(make time), 친구를 만들고(make friends), 의미를 만들고(make meaning), 돈(make money), 생활(make a living), 사랑(make love)에 있어서도 우리는 모두 ‘만든다(make)’는 표현을 쓴다. p172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만 태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변화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p174

 

역설 속에서 상반되는 둘은 각각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 둘은 현실의 심장부에서 신비스러운 결합체로 하나가 된다. 나아가, 그 둘은 같이 있어야 건강하다. 우리 몸에 들숨과 날숨이 모두 있어야 하듯 말이다. 하지만 역설의 복잡함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손쉬운 사고방식을 선호하는 문화에서 상반되는 둘을 동시에 간직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어둠 없는 빛을 원하며 가을과 겨울의 고난 없이 봄, 여름의 영광을 원한다. 그런 파우스트적인 거래는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지 못한다. p178

 

나에게 겨울은 최고의 선물을 간직한 계절이다. 그건 바로 하늘은 맑고 햇빛은 찬란하며 나무들은 벌거벗었고 첫눈은 아직 오기 전 그때이다. 바로 완전한 투명함이다. 겨울에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여름의 푸르름이 시야를 가로막던 것과 달리, 한 그루씩 또는 한꺼번에 나무들의 또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그들이 뿌리내린 땅을 볼 수 있다. p181

 

지나친 손익 계산과 생산성, 시간과 활동의 능률성, 수단과 목적의 합리적인 관계, 적당한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이르는 ‘최단코스(beeline)’를 만들어내는 것에 집착하면, 우리가 하는 일이 결실을 맺기도 힘들고, 우리 인생에서 봄의 충만함을 누리기란 힘들 것이다. p188

 

공동체가 그냥 풍요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가 곧 풍요이다. 우리가 자연의 세계로부터 이 공식을 배울 수 있다면 인간 세상도 변화할 것이다. p193

 

 

이작가야의 이중생활

안녕하세요! 책과 여행을 사랑하는 이작가야입니다. 책과 여행에 관한 소식을 전합니다. 본업과 무관한 일을 꿈꾸다가 채널을 '이중생활'로 짓게 되었어요. 언제나, 누구든 이곳에 편하게 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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