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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작가야의 일상 에세이

[책] 성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성서를 읽는 행위는 중요하다. 하지만 성서를 어떤 눈으로 읽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즘이다. 성서에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언급하는 성서접근방식은 ‘나’라는 개인이 느끼고 생각하고 감동한 부분이기에 주관적인 견해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최대한 앞으로의 그리스도인들이 성서를 대할 때 이 견해를 함께 공유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그 방식은 공유하고 싶은 글귀를 적고 그것에 관해 내 생각을 덧붙이는 것으로 하겠다. 

 

먼저 참고서적은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나온 존 도미닉 크로산의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이다. 이 책에서 중요한 화두는 ‘주장과 전복’이다. 그리고 이것의 구체적인 표현은 ‘하나님의 급진성 대 문명의 정상성’이다. 이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

 

오직 요한복음에만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라는 표현이 나온다. 예수는 채찍으로 환금상들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양과 소 같은 짐승들을 쫓아냈다. 이것은 종교적-정치적 시위 행동이거나 비폭력적 저항이었지, 사람들을 향해 채찍을 휘두른 폭력행위가 아니었다. (p17)

 

▍ 비폭력성과 폭력성의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이 한편으로는 비폭력적 분배 정의의 하나님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적인 보복적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풀어서 말할 수 있다. 이런 두 가지 초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이런 두 가지 비전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p30)

 

▍성서의 가난과 불평등

 

문제는 항상 분배 정의와 회복적 공의의 문제이다. 그렇게 때문에 성경 전통은 극한적인 가난을 때로는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예를 들어, 출애굽 기간 동안), 극한적인 불평등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p32)

 

▍13개의 사도 바울 서신

 

신약성경의 스물일곱 권의 책들 중에서, 열세 권은 사도 바울이 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그 열세 개의 편지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우선, 일곱 개의 편지들은 확실히 바울이 쓴 편지들로서, 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와 후서, 빌립보(필립비), 빌레몬(필레몬), 로마서 등이다. 그리고 세 개의 편지들은 아마 바울이 쓴 편지들이 아닐 것인데, 데살로니가후서, 골로새서(골로사이), 에베소서(에페소) 등이다. 마지막 세 개의 편지들은 확실히 바울이 쓴 편지들이 아닌데, 디모데(디모테오)전서와 후서, 디도서이다. (p40)

 

▍주장과 전복 사례 

 

1. 이사야와 미가

 

예언자 이사야와 미가는 하나님의 비전을 다음과 같이 말하다.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2:4=미가 4:3)” 반면에 예언자 요엘은 정반대되는 비전을 주장한다.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어라(4:10)” (p46)

 

2. 산상설교 (역사적) 예수와 계시록 (묵시적) 예수

 

산상설교의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며 박해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선호했던 반면에, 계시록의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들을 살해하고 박해자들을 도륙하는 것을 선호했다. (p46)

 

3. 빌레몬서(확실히 바울이 쓴 편지)와 골로새서(바울이 쓴 편지가 아닐 것)

 

‘빌레몬서’를 보면 주인이 노예를 소유할 수 없다는 바울의 주장이 나타난다. 역사적 바울의 급진적인 비전이다. 바울은 매우 분명한 표현으로 그리스도인 주인은 그리스도인 노예를 소유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누구든지 평등하며 또한 불평등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자유인이 노예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로마의 핵심적 가치는 그리스도인의 세례를 통해 파기되었다는 것이 바울의 확신이었다. (p42-43) 그러나 ‘골로새서’를 보면 그리스도인 주인이 그리스도인 노예를 소유하는 것을 당연시(골 3:22-41) (p43)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결국 바울이 죽은 이후에, 다른 사람이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한 가짜 바울의 편지들, 특히 안티 바울 입장의 편지들은 슬며시 역사적 바울의 급진적 비전과 모습되는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급진성에 대한 바울의 비전을 로마제국의 문명의 정상성이 접수해버린 것이다. (p43-44)

 

▍성서 속의 투쟁

 

성경 속의 투쟁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간의 약함 사이의 투쟁이 아니라, 한편에서는 이 땅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고 비폭력적으로 분배하려는 하나님의 급진적인 꿈과, 다른 한편에서는 문명이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꿈, 즉 내가 나의 것을 간직할 뿐 아니라 너의 것을 취득하고, 더욱 많은 것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문명의 정상적인 꿈 사이의 투쟁이다. (p50) 지금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비폭력적인 공평, 분배’와 ‘너의 것을 취득하고 소유’하려는 투쟁의 연장선이지만, 성서 속에서도 각 본문들 간에 이러한 투쟁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서를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적 가치를 발견하고 붙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에서 그것을 ‘하나님의 급진성’이라고 말한다. 비폭력적이고 공평한 정의 말이다. 

 

▍‘창세기’와 ‘길가메쉬, 엔키두 서사시’

 

창세기(선악과나무 열매를 먹고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된 사건)와 길가메쉬와 엔키두의 서사시(맑은 연못에서 몸을 씻어 불명을 얻지 못한 사건)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들은 인간의 불멸성이라는 초월적 망상에 대한 은유적인 경고였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죽음이 인간의 공통된 운명이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비유들이었다. (p79)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인간이 한번 영생을 얻었다가 인간의 실수로 인해 재빨리 비극적으로 영생을 잃어버린 이야기로 간주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두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인간이 불멸성을 잠시 얻었다가 곧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인간이 결코 불멸성을 얻을 수 없었다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만일 한 인간이든 동물이든 이런 방식으로든 저런 방식으로든 그 불멸성을 빼앗아가는 초월적인 속임수가 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영생을 오랫동안 간직하지 못했다는 말은 결코 영생을 얻지 못했다는 뜻이다. (p79-80)

 

아담과 하와가 먹은 것은 단지 지식의 나무가 아니라 정확히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 즉 윤리적 인식의 나무, 또는 도덕적 성실성의 나무, 또는 간단히 말해서, 양심의 나무(the tree of conscience)였다는 점을 나는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창세기의 결론은 우리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 구별되는 것은 불가능한 불멸성이 아니라, 도덕적인 존재-책임성-에 있다는 점이다. (p81-83)

 

그래서 인간은 불멸성이라는 망상 속에서가 아니라 양심의 도전 속에서 살도록 선택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현실은 형벌이 아니며, 인간의 행동이 초래한 귀결(human consequence)은 하나님의 처벌(divine punishment)이 아니다. (p82) 생명체의 종자들 가운데, 자동적인 본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양심에 의해서만 그 자신과 그의 세계를 파멸로부터 보호하는 종자는 하나뿐이다. (p84)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기로 선택했는데-그렇다, 매우 의도적으로 선택했는데, 그것은 양심의 나무이다. (p85)

 

▍하나님의 대항 문화적 도전: 형이 동생을 섬기는 것

 

당시 가부장적인 세계에서 남자가 상속권을 갖고, 장남이 항상 상속자가 되는 방식에 대해, 성경의 하나님이 대항문화적으로(countercultural) 도전하시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형 이스마엘(16:11) 대신에 동생 이삭을 선택하시며(17;19), 형 에서(25:25) 대신에 동생 야곱을 선택하신다(25:26). 하나님이 사회를 뒤집어엎는 결정은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25:23)라는 결정이다. (p90) 

 

▍성경의 폭력

 

인간 문명이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인간 본성에서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p96)

 

우리 인간들은 타고난 살인자들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전투 이후에 외상 후 스트레스를 겪겠는가?) 확대되는 폭력은 우리의 인과응보이지, 우리의 본성이 아니며, 불가피한 결정이 아니며,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다. (p96)

 

우리 인간은 점차 더욱 악하게 된 것도 아니며 죄가 더욱 많게 된 것도 아니다. 단지 의도된 폭력으로서의 죄를 포함해서 우리가 행하고 싶은 일에 더욱 유능해지고 효율적이 되고 있는 것이다. (p98)

 

▍창세기 2-3장 ‘아담과 하와’ / 창세기 4장 ‘가인과 아벨’

 

창세기 2-3장의 메시지는 인류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보복적 정의와 보편적 처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불멸성에 대한 망상을 버리고 그 대신에 양심의 책임성을 받아들인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다시 창세기 4장은 더욱 분명하게 하나님이 카인을 처벌한 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더럽혀진 땅이 카인을 거절한 이야기와 문명이 선택한 폭력의 확대에 관한 이야기이다. (p104)

 

▍창세기 1장

 

창세기 1장의 최종적 메시지를 형상(Image), 지배(Rule), 안식일(Sabbath)에 관한 것으로 생각해보자. (p111)

 

▍ 안식일

 

안식일의 목적, 이유, 의도는 매주 모두에게-집안 식구들, 자녀들, 노예들, 가축들, 이민자들-똑같은 휴식을 주는 것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안식이 아니라, 안식 자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p113)

 

희년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은 안식일과 안식년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뜻이며, 따라서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p116)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실험 프로젝트로서 “선택” 되었는데, 그 이유는 만일에 한 민족조차 분재 정의를 구현할 수 없다면, 모든 민족들이 그럴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p121)

 

▍노아의 홍수 이야기

 

성경 전통이 메소포타미아의 모체로부터 홍수 이야기를 수용하고, 그 홍수 이야기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자신의 하나님에 맞도록 각색한 것이라는 점에서 최선을 다 한 것이다. (p125)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이야기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의 통일 왕국은 기원전 931년에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분열하는데, 문제가 된 것은 과중한 세금이다. 북 이스라엘 왕국이 기원전 722-721년에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되자, 피난민들은 엘로힘 문서 전승과 신명기 문서 전승처럼 자신들의 고유한 전승을 갖고 비교적 안전하고 고립된 남부로 도망쳤다. (p129)

 

▍신명기 전승에서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계약이 철저히 상벌규정 위주로 되어버렸는가?

 

 

이 장에 제기했던 첫 번째 질문, 즉 “신명기 전승에서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계약이 철저히 상벌규정 위주로 되어버렸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위에서 본 것과 같은 아시리아 방식의 종주-봉신 조약들이 역사보다는 상벌규정을 크게 강조하고, 또한 상벌규정 안에서도 충성에 대한 축복보다 불충성에 대한 저주를 크게 강조한 것들이 당시 신명기적인 계약 이해의 은유, 모델, 모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p134) 신명기가 쓰여 질 당시의 문화를 지배하고 있던 아시리아 방식 즉, ‘종주-봉신 조약’이 신명기에도 스며들었던 것이다. 역사를 중시하고, 충성에 대한 축복을 중요하게 여겼던 과거의 하나님의 관계는 사라지고, 상벌규정과 불충성에 대한 저주의 하나님이 발생한 것이다. 

 

▍하나님의 처벌이라는 망상

 

오늘날에도 여전히 종교 안팎에서, 인간의 행동에 따른 귀결, 임의적인 사고, 자연 재해라는 분명한 증거보다도 그것들을 하나님의 처벌로 간주하는 망상들이 훨씬 우세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단순히 신학을 왜곡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격 자체를 터무니없는 틀 속에 잡아넣는다. (p141)

 

▍신학이 지닌 두 방향의 운명

 

          역사  ⇐  법  ⇒  상벌규정

                      ↓        ↓ 

  제사(P)문서 전승    신명기(D) 전승

 

신학이 두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은, 둘 가운데 절대적으로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서로 다른 강조점을 지닌 것이라는 점을 다시 반복해서 강조하고 싶다. (p143). 

 

▍인간 존재

 

여기서(창 1:26-28) 인간 존재는 바깥에서 주어지는 명령이나 지시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내적인 운명과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깨닫는 존재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우리의 운명과 정체성대로 살아내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하나님의 처벌이라기보다는 인간적 귀결이 아닌가? (p159)

 

▍시편과 신명기 신학

 

시편들에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계속 언급하는 것은, 만일 이스라엘이 계약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변치 않고 영원히 의무를 지키실 것을 바라는 희망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신명기 신학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계약은 조건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신명기 5:9b-10). 이처럼 무서운 두려움이 생겨난 것은 특히 다윗 왕조에 관한 계약과 관련해서였다. (p160)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먼저 생각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처벌이 아니라 인간 행동의 귀결에 대해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생각해야 하며,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라 너무 늦기 전에 주어진 시간 안에서 인간이 변화할 가능성을 생각해야만 한다. (p161)

 

▍아시리아의 전통의 영향

 

우리는 ‘신명기 전통’의 계약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역사보다는 상벌규정을 훨씬 강조하고 또한 상벌규정 안에서도 축복보다는 저주를 훨씬 강조하는 ‘아시리아의 전통’이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이해, 즉 내부적인 인간 행동의 귀결보다는 외부적인 하나님의 처벌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을 상상하는 성경적 이해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p162)

 

▍성서의 정직성

 

우리는 단지 성경 안에 이처럼 긍정과 부정, 확장과 수축, 환상과 부정이라는 변증법을 모두 간직한 성경의 정직성을 이해해야 한다. (p167)

 

▍인간적 귀결: 이스라엘의 패배는 지리적 위치의 패배

 

만일에 이스라엘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데 삶 전부를 바쳤다면, 그 역사에서 달라졌을 것이라곤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죽게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지리적 위치에 있는 민족이 군사적으로 패배한 것이 하나님의 처벌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과 신 모두에 대한 범죄행위이다. 이런 사실은 질병과 가뭄, 기근과 심지어 지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p168)

 

 

외적의 침입, 내부적인 기근을 비롯해서 온갖 재난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도대체 어떻게(how) 살아내지 못했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도대체 어느 곳에서(where) 살았는가에 따른 인간적 귀결이었다. (p168)

 

다니엘서

 

다니엘서이 쓰여진 배경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 "다니엘서는 그 주인공들이 마치 기원전 500년대에 바빌로니아 제국으로부터 메대-페르시아 제국으로 패권이 넘어가던 시대에 살았던 인물로 허구적으로 또한 상상에 의해 설정되었지만, 실제로는 역사적으로 기원전 160년대, 시리아제국 시대에 쓰여진 작품이다. 시리아제국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남쪽의 이집트에 의해 항상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서쪽에서 새롭게 등장한 로마의 위협도 받고 있었다. 그는 최소한 남쪽 변방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 더욱 긴밀하게 예속시키려 했다." (177)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에 충성하려는 신앙 때문에 자신에게 저항한다는 것을 깨달은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고 종교적 박해를 시작했다." (177)

 

"다니엘서의 편집층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기록된 언어가 서로 다르다는 점, 즉 아람어로 기록된 부분(2:4-7:28)과 히브리어로 기록된 나머지 부분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장르가 변한다는 점, 즉 1-6장의 이야기들에서 7-12장의 환상들로 장르가 변한다는 점이다." (178) 

 

지정학적 위치의 이스라엘

 

"우리는 이미 약소민족 이스라엘이 지정학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어서, 처음에는 북쪽의 아나톨리아와 남쪽의 이집트, 또는 북쪽의 메소포타미아와 남쪽의 이집트 사이에서 각축장이 되었고, 그 후에는 서쪽의 그리스와 동쪽의 페르시아, 또는 서쪽의 로마와 동쪽의 파르티아(기원전 247-기원후 224년 사이에 오늘날 이란 동북부 지역에서 일어난 제국) 사이에서 각축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시 막강한 제국들에 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184) 한 마디로 지정학적 이스라엘은 각국의 세력 확장의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 나라의 개념

 

크로산은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종교-정치적, 윤리적이며 사회경제적인 비전에서 바라보았다. "제발, 하나님의 평화가 이 세상 이외에 다른 어느 곳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또한 하나님 나라나 하나님의 평화가 인류 문명의 정상성에 대한 급진적 도전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인 듯이 상상하여, 그 종교-정치적이며 윤리적이며 사회경제적인 비전을 전복시키지 말아주기 바란다." (188) 

 

로마 제국주의에 대한 고민

 

"1세기 초반, 로마가 지배하던 이스라엘에서 살았던 어떤 유대인 교사나 사상가, 현자나 예언자 가운데 어떻게 로마의 제국주의에 대응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았던 사람은 자신들의 역사, 전통, 계약, 심지어 자신들의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대응방식은 은둔이나 참여, 수용이나 저항, 폭력이나 비폭력일 수 있었다." (214) 

 

예수와 세례자 요한

 

예수는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크로산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수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웠으며, 결국에는 자신의 스승에게 벌어진 일 때문에 자신의 관점을 바꾸었다고 확신한다. 나중에 예수가 세례자 요한과 일치하지 않게 되었을 때조차도 예수는 여전히 그를 무시하지 않기 위해 매우 조심했다." (215) 

 

요한은 미래를, 예수는 현재를 전했다. "결국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처럼 금식하는 것은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마음으로 하며, 또한 예수처럼 잔치를 벌이는 것은 현재를 축하하는 마음으로 한다(참조, 마가 2:18-20)." (217) 

 

세례자 요한은 인간이 준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세례자 요한은 '언제 올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매우 설득력 있는 대답을 제시했으며, 거부할 수 없는 프로그램을 실천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임박했으며, 그 나라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오직 인간의 준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19) 

 

이미 현존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 "세례자 요한은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세계 대청소가 임박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예수는 처음에는 이에 동의했지만, 최종적으로-오직 최종적으로만-아니라고 말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와 있다(현존한다)고 말했다." (224)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 나라가 내면적이며 사적이며 영적인 실재라는 뜻으로 '너희 내면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외부적이며 공동체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생략) 또한 놀라운 팔복의 말씀들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이미 현존하고 있는 것에 관한 진술들이다(마태 5:3-12=누가 6:20-23)." (225)

 

당시 예수의 주장은 급진적이었으며 그가 주장한 현존하는 나라는 하나님과 인간의 쌍방협력을 필요로 했다. "예수의 주장은 당시 유대인들의 종말론적 기대 안에서 패러다임의 변화, 전통에서 벗어남, 파열적인 쇄신을 보여준 것이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로부터 이미 현존하는 나라로 패러다임이 바뀐 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일방적 개입에서부터 하나님과 인간의 쌍방적인 협력으로 바뀐 것을 필요로 했다(계약은 항상 쌍방적인 과정이었다는 것을 상기하기 바란다)." (227) 

 

크로산이 인간의 참여를 이렇게까지 표현했다.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참여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 변혁된 세상에 결코 나타나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을 거라는 뜻인가요?' 예수는 '그렇다!'고 말한다. (생략)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 없이는 일하시지 않으며,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일할 수 없다(1999년 캘리포니아 주 올 세인츠 성공회 교회에서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가 한 설교).'" (227) 

 

요한의 죽음을 두고 예수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예수의 생각은 요한의 죽음사건으로 하나님이 개입에서 협력의 존재로 바뀌었을 것이다. "예수는 아마도 하나님이 개입하시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개입하지 않으시며, 조만간도 아니며, 영원히 개입하시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오직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과 협력만 있었으며, 앞으로도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과 협력과 참여만 있을 것이다. 나는 안티파스가 세례자 요한을 처형한 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이해를-개입하시는 나라로부터 협력하는 나라로-바꾸어놓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스스로 그 나라를 떠안거나 그 안으로 들어갈 때만 도래한다." (228) "예수의 근본적인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의 완결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시작에 관한 것이었다." (230) 

 

하나님의 성격: 집주인, 비폭력 저항

 

"예수가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본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근본적 확신, 즉 하나님은 세상 안의 보편적인 가족들의 집주인(세대주)이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에게는 악에 대해 비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이 인간적 태도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성격이며,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성격이기 때문에 인간의 태도여야만 한다." (232) 

 

예수와 바라바의 차이

 

"바라바의 추종자들은 바라바와 함께 체포되었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의 추종자들은 예수와 함께 체포되지 않았다. 예수와 바라바 사이의 궁극적인 차이점은 비폭력 저항과 폭력적 반란 사이의 차이점이다." (234) 

 

요한의 이야기, 성경의 '주장과 부정'

 

"하나님 나라가 마가복음에서는 바빌로니아 포로생활에서 귀환했던 것과 비슷한 비폭력적 해방으로 곧 올 것이라는 역사적 요한의 주장이, 큐-복음에서는 요한의 입술 위에 올려진(즉 요한이 직접 말한 것으로 만든) 하나님의 폭력에 의해 전복되었다. (생략) 주장과 부정 모두를 담고 있는 성경 전통의 정직성과 통전성을 이해하는 문제가 관련되어 있다." (235) 

 

마가복음과 Q복음서

 

“마가가 예수의 언어폭력을 삭제한 것이 아니라, Q복음이 예수의 언어폭력을 창작한 것이다.” (240) 

 

“나는 예수에 관한 Q복음의 전승이 주로 남부 갈릴리 지역 호숫가의 유대인들의 영토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 지역은 본래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지역이었다(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에 대한 언급을 보라). 그러나 예수에 관한 마가복음의 전승은 주로 갈릴리 호수의 먼 북쪽과 동쪽의 이방인들의 영토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 지역은 원래 헤롯 빌립이 다스리던 지역이었다(마가 8:27에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들”에 대한 언급을 보라.).

 

하나님 나라 운동과 예수전승은 주로 이방인들이 살던 지역에서 보다는 주로 유대인들이 살던 지역에서 훨씬 더 심한 반대를 받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마가복음보다는 Q복음이 훨씬 더 심한 대응폭력을 예수가 말한 것으로 돌렸다. 이것은 Q복음의 크리스천 유대인들이 마가복음의 크리스천 유대인들보다 더 험악한 사람들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Q복음의 크리스천 유대인들에 대한 반대가 훨씬 심했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그들의” 예수 역시 마찬가지로 훨씬 험하게 대응했던 것이다.” (241-242) 

 

<북쪽과 동쪽 이방인들의 영토>

마가복음 전승

헤롯 빌립

 

<남부 갈릴리 지역 호숫가 유대인>

Q복음 전승

헤롯 안티파스 

 

요한계시록 저자의 엄청난 실수

 

“네로 황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주적인 로마제국을 파멸시킬 것이며, 그 신격화된 로마 황제와 로마의 모든 제국을 파괴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이 일을 위해서 사용할 폭력은 로마제국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어떤 폭력보다도 훨씬 더 능가하는 폭력이다. 매우 끔찍하고, 또 끔찍하며, 또 끔직한 역설적 방식으로, 요한계시록은 돌아오는 네로 황제와 그의 파르티아 군사력을, 돌아오는 그리스도와 그의 천군천사로 대체시켰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최악의 명예훼손이며, 예수에 대한 최악의 중상모략이다. 이것은 또 성령에 대한 최악의 죄이기도 하다.” (253-254)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여기서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거의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즉 비폭력적인 역사적 예수의 주장(assertion)을 비폭력적인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와 계시로 받아들이고 따르라.” (255)

 

“요약하자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에 대한 정답은 이것이다. 성경을 단지 하나의 책으로 읽어 그 의미가 그 결말에 나온다고 예상하지 말고, 성경을 하나의 이미지로 바라보고 그 클라이맥스는 그 중앙에 있다고 예상하라. 성경의 말을 읽지만, 성경을 시각적으로 그림을 그려라.” (335)

 

옥타비아누스 -> 카이사르 -> 아우구스투스

 

“삼단논법이 정해졌다. 즉 오직 신들만이 승리를 가져다주지만, 아우구스투스도 승리를 가져다주었기에, 아우구스투스는 신이다. 문제는 하나의 신인가, 아니면 최고신인가? 최고신은 하나님에 해당한다. 그뿐 아니라,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되고 다시 아우구스투스가 되어 로마를 죄로부터 구원한 구세주였다.” (261-262)

 

예수와 하나님

 

“로마는 공식적으로, 공개적으로, 또한 법적으로 예수를 처형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으키셨다. 그러므로 예수는 로마에게는 죽었지만, 하나님께는 살아 있었다.” (282)

 

그리스도인(크리스천)의 죽음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로마에 의해(by) 처형당하고 죽은 것처럼, 크리스천들은 세례를 받아서 로마에 대해(to) 죽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크리스천들은 구체적으로 로마의 네 가지 중요한 가치들, 즉 가부장제, 노예제, 위계질서, 승리-특히 다른 세 개의 가치가 의존해 있는 폭력적 승리-에 대해 죽은 것이다.” (283) 

 

가부장제: “더 이상 남자와 여자가 없다”

 

“바울은, 세례를 받은 다음에는 여자와 남자, 아내들과 남편들이 가족, 공동체, 사도직에서 평등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금욕, 섹스, 결혼, 동정,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관련된 몇 가지 질문들에 대해 대답한다. 그의 모든 대답들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여자와 남자, 남편과 아내에 대해 의도적으로 공평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284) 

 

노예나 자유인은 차이가 없다. 

 

“따라서 ‘더 이상 노예나 자유인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갈3:28).’는 세례예식의 결단은 과장법도 아니며 위선도 아니며, 행동의 프로그램이며 기준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소유할 수 없다는 뜻이다.” (293)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유일신론을 떠나든, 그리스-로마의 다신론을 떠나든 간에, 그리스도인 공동체 속으로 들어오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선언하는 말씀이다. 누구든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사람은 없다.” (294)

 

바울과 예수는 그리스도인(크리스천)들이 폭력을 행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바울은 크리스천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들이 살인을 자행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로마가 크리스천들에 대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들이 로마에 맞서서 대응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런 점에서 예수뿐 아니라 바울도 악에 대해 크리스천들이 비폭력적으로 대응하도록 가르친 것은 로마의 핵심적 가치, 즉 폭력적 승리를 통한 평화라는 핵심적 가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298) 

 

바울이 쓰지 않은 여섯 개의 편지 의도

(데살로니가후서, 골로새서, 에베소서 /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바울이 쓰지 않은 여섯 개의 편지들은 단순히 바울 이후의 가짜 바울의 편지들이 아니라 실제로 안티 바울(anti-Pauline) 편지들이다. 이 안티 바울 편지들은 바울이 쓴 진정한 편지들이 주장한 것을 전복시키는 편지들이다.” (303)

 

“바울이 쓴 일곱 개의 진정한 편지들(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고린도전후서, 로마서)은 급진적인(radical) 바울을 보여준다. 아마도 바울이 쓰지 않았을 세 개의 편지들(데살로니가후서, 골로새서, 에베소서)은 첫 번째 탈급진화 과정을 거친 보수적인(conservative) 바울을 보여준다. 그리고 분명히 바울이 쓰지 않은 세 개의 편지들(디모데전후서, 디도서)은 마지막 탈급진화 과정을 거친 반동적인(reactionary) 바울을 보여준다.” (303-304)

 

바울의 독신생활, 금욕주의 주장은 로마의 가부장제도에 대한 모욕이었다. 

 

“바울은 결코 결혼을 금지하지 않았으며 모두가 독신생활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없지만, 모두가 독신생활을 한다면 매우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나는 모든 사람이 다 나처럼 살기를 바랍니다(고전7:7).’라고 말했다. (중략)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독신생활의 금욕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로마의 가부장제도에 대한 모욕이었을 것이며, 또한 로마가 정상이라고 간주하는 것에 대해 신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충돌하는 전혀 다른 세계를 증언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316) 

 

성경의 모체(matrix): 차용(adoption)과 각색(adaption)

 

“문서의 모체(matrix)를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즉 어떤 말이나 글은 반드시 우선적으로 그 당시의 시대와 장소 안에서 이해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모체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배경이며, 우리가 빼놓을 수 없는 컨텍스트이다.” (324) 

 

“그리스도교 성경에서 모체는 시간적으로 수메르인들로부터 로마인들에 이르기까지 천 년이 훨씬 넘는 기간이며, 지리적으로는 메소포타미아의 평원으로부터 지중해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다. 모든 경우에 내가 강조하는 것은 차용(adoption)과 각색(adaption)이다. 우리는 하나의 성경 문서나 전통이 그 주변의 문화적이며 제국적인 모체로부터 차용한 것과 더불어 그것을 자신의 관점에 따라 각색한 것 모두에 대해 똑같이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그 문서나 전통이 이런 각색을 서투르게, 부적절하게, 불완전하게 했는지, 아니면 탁월하게 했는지를 물어야만 한다.” (325)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교 성경의 규범과 기준은 성경의 그리스도이지만

성경의 그리스도의 규범과 기준은 역사적 예수이다.” (330)

 

“역사적 예수가 그리스도였는지, 하나님의 메시아적인 아들이었는지 아닌지 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이다.” (331)

 

결국 하나님의 처벌은 없고, 인간행동에 따른 귀결만 있다. 

 

“그러므로 만일에 당신이 이 책의 주장처럼 하나님의 처벌은 없으며 오직 인간의 행동에 따른 귀결만 있다는 것(물론 자연재해와 임의적으로 발생하는 사고들은 별도이다)에 동의한다면, 우리 인간이라는 종자에 대한 도전은 명백하다. 화학적 본능에 의해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양심에 의해 지배받는 우리 인간이 오늘날처럼 더욱 확대되는 폭력이 우리를 파멸시키기 이전에 그 폭력을 통제할 수 있는가? 우리가 폭력을 문명이 최고로 선택한 약품이라고 보고 폭력을 포기할 수 있는가? 우리는 정의를 통한 평화를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반면에 승리를 통해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노래를 이제는 완전히 파산한 선택으로 보고 포기할 수 있겠는가?” (336)

 

예수가 가르친 구원, 인간의 양심과 능동적 책임성 (김준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가르친 구원의 길이 세례자 요한과 달리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한 구원이 아니라 상식적이며 인간과 하나님이 협력하는 구원이라는 점이다.” (344)

 

 

“‘우리가 하나님의 처벌이 아니라 인간 행동의 귀결에 대해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생각해야 하며,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라 너무 늦기 전에 주어진 시간 안에서 인간이 변화될 가능성을 생각해야만 한다.’는 주장은 성경이 증언하는 인간의 양심과 능동적 책임성을 천명한 것으로서 ‘예수 르네상스’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344-345)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살롱(salon)에서 나누는 성경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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