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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작가야의 일상 에세이

[책] "잃어버린 밤을 찾아서"를 읽고

'환경정의'에서 주관하는 책모임에 다녀왔습니다. 망원동에 있는 <책만 만일>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망원동이라는 신구정취의 냄새가 혼재되어 있는 동네에서의 책읽기라 더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모임의 선정도서는 폴 보가드의 <잃어버린 밤을 찾아서>였습니다. 책 첫 페이지에 쓰여있는 대로 '지구상 가장 어두운 곳으로 떠나는 깊은 밤으로의 여행'이었습니다. 밑줄을 긋게했던 몇 가지 글귀를 남겨볼까 합니다.

폴 보가드는 '빛공해'로부터 벗어나 어디에나 있지만 그러나 누구나 쉽게 볼 수 없는 '깊은 밤하늘'을 찾고 싶었습니다. 쏱아질듯한 밤하늘의 별들을 마주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매일 보고 있는 대도시의 밤하늘이 우리가 잃어버린 밤하늘의 모습이라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도시의 밤은 밤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밝았습니다.

 

그는 '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황혼녘에 폭풍우를 몰고 올 구름이 모이듯 동쪽 지평선에 어스름이 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자전으로 생기는 지구의 그림자다. '밤'이라고 부르는 때는 우리가 이 그림자 속에 갇히는 시간이다." (15) 자전으로 생기는 지구의 그림자 속에 갇히는 시간, 이것이 밤이로구나.

사실 '어둠'이라는 것은 우리가 꼭 피해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환경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을 응시하는데도 말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또 다른 면에서는 이제야 알기 시작했지만, 밤의 자연스러운 어둠은 우리의 건강은 물론이고 자연계의 건강에도 늘 소중한 요소이기에, 어둠이 사라지면 모든 생명이 고통받는다." (19)

이 책에서는 아마추어 천문가 존 보틀의 밤하늘 척도 개념을 사용합니다. 보틀은 어두운 하늘의 다양한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를 고안해냈습니다. 가장 밝은 수준이 9이고, 가장 어두운 수준이 1입니다. 폴 보가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9에서 5정도 사이의 밤하늘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고 말합니다. "정말이지, 대다수 미국인과 유럽인, 특히 젊은 층은 등급 3('지평선에 빛공해의 기미가 약간 있을' 뿐인 '시골의 밤하늘')이나 등급 2('정말로 어두운 곳')정도의 어두운 밤을 경험한 적이 거의 없다. 보틀의 등급 1은 '은하수가 지구로 마구 쏟아져내릴 만큼' 어두운 밤하늘을 가리키는데, 많은 이들은 그런 어둠이 미국 본토 48개 주에 남아 있기나 한지 의심한다." (21) 대한민국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시골에서 자란 저 또한 쏟아질듯한 밤하늘의 별들을 본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밤하늘의 별에 대한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니 광활한 우주와 인간의 작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밤하늘의 별빛은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것보다도 훨씬 밝지만, 하나를 빼고는 모두 너무 멀리 있어서 설령 보인다 한들 아주 희미하게밖에 보이지 않는다." (33-34) 우리는 우리 눈 너머에 있는 것을 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저자는 가로등의 시작은 전깃불이 아니라 고래기름을 태우는 램프였다고 말합니다. "처음(1761년)에는 고래기름 램프였다가 1827년에 가스등으로 바뀌었고, 1880년에는 마침내 전깃불이 도입되었다." (41) 고래기름 램프와 가스등이라, 이름조차 생소한 불빛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미국은 자유의 땅이자 사유재산권의 본고장인데 '빛의 침입'만큼은 해결하기 어렵다고 보가드는 말합니다. "빛의 침입은 한 장소의 빛이 다른 장소로 흘러 들어가는 현상이다. 이웃의 보안등 불빛이 당신 집의 침실 창문으로 흘러드는 경우가 이것에 해당한다. 또한 최신 과학연구소 건물이 건너편의 여학생 클럽을 훤히 비추는 경우도 이것에 해당한다. 자유의 땅이자 사유재산권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어느 집이든 이 문제를 겪는다." (45)

별자리 이름에 관한 재미난 기독교 에피소드도 소개됐습니다. "1627년에 독일 천문학자 율리우스 쉴러는 별자리 이름을 성경 속 인물들의 이름으로 대체해 하늘을 기독교화하려고 시도했다. 그리하여 황도의 12개 별자리가 열두 사도가 되었고, 북반구의 별자리는 신약의 인물들로, 그리고 남반구의 별자리는 구약의 인물들로 대체되었다. 좋든 싫든 그의 발상은 전혀 인기를 끌지 못했다." (55)

빈센트 반 고흐에 관한 이야기도 소개됐습니다. 뉴욕 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대해 보가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그림 속 풍경은 밤이 숲과 바다로 밀려나기 이전의 세계이자, 졸리는 마을이 가로등 없이 잠자던 시절의 이야기다." (56) 그러나 고흐가 정신적 시련에 빠져있었다는 사실 떄문에 그의 작품이 평가절하되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흐는 상상 속 풍경을 그렸을까? 물론이다. 그는 생레미에 있는 정신병동에서 기억을 더듬어 저 풍경을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진짜 밤하늘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임은 분명하다." (57) 보가드는 그의 상상의 밤하늘이 그가 마주했던 밤하늘이었음을 확신했습니다.

 

가로등은 인간과 밤의 상호작용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밤에 밖으로 나가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범죄자의 손에 의해서든 발을 헛디뎌서든 말이다." (81) 불빛이 없는 어두운 밤은 두려움의 공간이긴 했습니다. "도시의 안전이 계속 강화되면서 사교와 상업의 기회가 이처럼 많아지자, 어둠 속에서도 더 많은 사람들이 활동하게 되었다. 먹고 마시고 일하면서 여는 이와 같은 밤 시간은 북유럽 도시 거주자들의 삶을 급진적으로 바꾸어놓았다." (81) 가로등의 설치와 불빛이 늘어남에 따라 사람들의 삶이 풍요롭게 되긴 했습니다만, 사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꼭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만 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재고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가로등이 민중을 향한 국가의 억압과 감시의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프랑스 혁명 이전 시대에 가로등은 민중에게는 가시 같은 것이었다. 공공 가로등을 설치한 가장 주요한 동기는 밤거리를 통제하에 두려는 국가의 욕망이었고, 따라서 많은 파리 시민들에게 기름등은 그저 독재의 상징에 지나지 않았다." (83) 모든 것에는 이면이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됩니다.

우리는 밤의 빛으로 안전을 누리게 됐지만 그러나 현재 빛의 양은 안전에 필요한 정도를 훨씬 넘어선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밤에 빛이 있으면 더 안전해질 수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위투성이 해안에서 배를 안전하게 인도하는 등대 불빛이나 갈라진 시멘트 틈새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해주는 인도의 가로등 불빛이 좋은 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조명 기술자와 조명 설계자, 천문학자, 어두운 밤하늘 활동가, 의사와 변호사 그리고 경찰이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빛의 양 - 그리고 빛을 사용하는 방식 - 은 안전에 진짜 필요한 정도를 훨씬 넘어선다고 말한다." (100-101) 무엇부터 또 어디서부터 줄여나가면 좋을까요?

이미 밝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들의 관계는 경쟁적일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안전이 주된 목적이라면 루이스를 비롯한 여러사람들의 말처럼 조명이 훨씬 더 희미했을 것이다. 그래야 눈의 순응과 눈부심 문제가 줄어들 테니까. 문제는 한 업체가 조명의 밝기를 올리면 다른 업체들도 덩달아 따라해야겠다는 압박을 느낀다는 것이다. 비교가 되기에, 자기네 시설이 더 어두침침하면 덜 매력적이고 심지어 폐업이라도 한 듯한 인상을 줄까 염려해서다." (105-106)

조명으로 더 밝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또 다시 인간 개인의 욕망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악의 되물림입니다. "주변이 더 밝아지면 우리는 밝음의 수준이 차츰 익숙해지는 터라 그보다 더 어둑한 것은 무엇이든 아주 어둑하게, 심지어 어두컴컴하게 느낀다. 인공 불빛의 역사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한때 영광스러웠던 기름등이 경이로운 가스등의 출현으로 인해 어둑하고 혐오스러운 것이 되었고, 가스등 또한 전등이 출현하자마자 냄새나고 끔찍하고 도저히 견딜 수 없이 어두침침한 것이 되고 말았다. 달리 말해, 우리 눈은 한번 더 밝은 빛에 익숙해지고 나면 기어코 더 밝은 빛만을 찾게 된다." (106) 인간의 질주는, 다시 말해 나의 질주는 언제야 멈출 수 있을까요?

 

잘들 지내시려나?

사실 가로등으로 거리 밝히기는 안전 즉 범죄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거리의 조명을 많이 만들 수록 안전은 더욱 강화된다는 이론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꼭 맞는 말도 아닙니다. "가로등 줄이기 프로그램이라는 웹사이트의 맨아래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가로등과 범죄의 상관관계를 조사한 여러 건의 학술연구 결과가 발표되었지만, 그중 어떤 연구에서도 가로등 증가와 범죄 감소 사이의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드러나지 않았다. 사실 연구들 가운데 몇몇은 그 반대 결과를 보여준다.'" (109) 저자는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고 합니다. "런던에서고들은 농담에 따르면, 범죄자들은 실제로 조명이 잘된 곳에서 일하기를 선호한다. 그들도 그런 곳이 더 안전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란다." (113) 밝은 곳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범죄자들이라니. 재고해 볼만하겠습니다.

위 이유에는 대중의 무지도 한 몫을 하는 듯 합니다. "조명이 야간 범죄를 줄이고 더 밝은 불빛이 더 많은 범죄를 더욱 줄인다는 인식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우리는 대부분 이런 연구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기에, 계속 어둠과 범죄, 곧 조명과 치안이 관련되어 있다고 가정한다. 반대증거들이 쌓여가고 있는데도, 조명산업이나 전력회사에서 직간접적으로 후원하는 몇몇 연구는 여전히 조명이 범죄를 막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 많은 조명 관련 제품과 에너지를 팔아야 하는 이런 기업들은 조명이 가장 밝을 때 이익이 극대화된다. 미심쩍은 연구 탓에 더욱 강화되는 대중의 무지가 이런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17)

보가드는 어둠과 범죄, 밝음과 조명의 관계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고 말합니다. "분별 있는 행동과 주변 상황에 대한 인지가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 (121) 이라고 말입니다. 오히려 로슨이 말하는 듯이 "오늘날의 언론이 선정적으로 두려움을 증폭" (119) 시키는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밤의 어두움과 범죄를 무서워하기보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는 서로를 두려워" (118) 하게 되는 건 아닐까 염려가 됩니다.

보가드는 어둠의 개념을 신화의 영웅들의 삶에서도 이끌어냅니다. 물론 여기서 어둠은 인문학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수많은 지역의 신화에서 영웅은 어두운 시기나 어두운 곳을 반드시 거치게 되는 여행을 떠난다. (생략) 장담컨대, 페르세우스도 무서워했을 것이고, 다른 문화의 진짜 영웅들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생략) 빛을 환히 켜놓으면 우리의 두려움은 밀려나고, 두려움이 밀려나면 우리의 삶은 덜 생생해진다." (132)

마침내 보가드는 가장 어두운 곳인 등급 1의 지역에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와 동행한 듀리스코는 어디가 최고의 밤하늘인지 묻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대답한다고 말합니다. "최고의 밤하늘은 마침 그때에 최고라고 느껴지는 곳입니다. 1년 중 어떤 특정한 때에 특정한 곳이라고 말할 때는 없습니다. 다만 어떤 곳에 가면 밤하늘이 펼쳐질 가능성이 얼마쯤이라고 알려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꼭 그렇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생이란 게 그런거지요." (351-352)

하늘이 오염 됐다는 사실은 '별 관찰자'의 떠남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별 관찰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건강한 생태계의 신호라는, 피에르 브루네가 파리에서 했던 말이 기억난다. 하늘이 너무 밝아서 별 관찰자가 떠난다면 그곳의 하늘은 오염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하늘을 오염시킨 것은 시간이 흐르면 결국에는 다른 자원들도 오염시킬 것이다." (360)

지금의 우리와 다음을 살아갈 후손들에게 중요한 과제는 무엇을 잃어버린지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아직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압니다. 하지만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면, 모두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아무도 무엇을 잃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겁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보존하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안들겠지요. 만약 이런 식으로 한두 세대가 지나가면, '은하수를 가끔은 보곤 했는데'라고 말하는 세대는 거의 사라지고 없을 테고요. 일단 잃어버리고 나면 보존해야 한다는 의욕까지 잃고 맙니다.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이 주위에 아무도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지금이 그런 시기입니다." (366)

 

보가드는 아직 네브래스카 서부와 몬태나 동부, 뉴멕시코 북동부와 오리건 중동부에서 어둠의 지형들이 남아 있다(366-367)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이곳을 의도적으로 지키고자 하지 않는다면 얼마 못가 어둠은 몰락당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지역들은 우연히 어두울 뿐이다. 아직 문명의 빛들이 도착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말이다. 아직은 외진 곳이어서 찾는 이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런 곳들의 어둠은 언젠가는 몰락하고 말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적들이 도착할 때 그 어둠을 지켜줄 이들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아직 남아 있는 어둠을 돌보는 사람이 없다면, 결국 그 어둠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367)

밤하늘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 아래 서 있는 사람은 광활한 우주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밤하늘 아래에서는 그런 영감이 쉽사리 떠오르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이 세상은 우주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사색하게 된다." (377)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하고,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긴장의 관계에서 살아갈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한 때는 가장 흔한 경험이었던 것이 이제는 가장 드문 게 되다니, 세상이 얼마나 거꾸로 뒤집혔는가. 아이들이 은하수를 보지 못하고, 별들이 밤하늘에 떠오른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도 모르는 채 자라는 세상이다." (380)

마지막은 보가드의 말로 맺어볼까 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수많은 '빛'을 들고 다니느라 어둠 또한 꽃피고 노래함을 결코 알지 못한다. (생략) 다시 한번 어둠 속의 우리의 고향인 우주를 본다" (380)

어둠 또한 꽃피고 노래한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살롱(salon)에서 성경에 담긴 생명과 평화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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