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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작가야의 일상 에세이

[책] 예수는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는가?

 

불안하고 초조해 할 것만 아니라 정리와 몰입이 필요하겠다. 목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전통적인 신앙관에 불편함을 느끼다 못해 이젠 저항감마저 든다. 믿음이라는 것이 지도와 교육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나는 내가 믿게 될 믿음을 다시 찾아보기로 했다. 외로운 여정이 되겠지만 나와 생각을 같이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모아 볼까한다. 

 

1. 존 도미닉 크로산, 한인철 역 <예수는 누구인가>, 한국기독교연구소

 

처음 집어든 책은 크로산이 쓴 <예수는 누구인가>이다. 이 책은 대학원 논문 때도 인용했던 것인데 몇 년 만에 다시 집어 들었다. 몇 군데를 살펴볼까한다. 

 

“우리는 최초의 기독교인들이 예수가 죽은 후에도 계속 자신들과 함께 한 것으로 경험했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의 계속적인 현존에 대한 경험이 예수 전승의 전달자들에게 창작하는 자유를 허락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과거에 누구였는가에 관해 기록하기보다는, 현재에 누구인가에 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p33)

 

실제로 예수가 죽은 후에 살아났다는 것을 알기란 미지수다. 하지만 크로산도 그렇게 생각하겠거니와 나도 실제 예수가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부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부활은 상징적 부활로 생각된다. 예수의 계속적인 현존에 대한 경험은 반드시 육체와 육체의 만남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독하게 사랑했던 사랑은 상대의 부재(不在)에도 불구하고 아주 가깝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복음서들이란 역사도 전기도 아니라는 것, 단지 특수한 시대, 특수한 장소, 그리고 특수한 공동체를 위한 해석들이라는 것뿐입니다. 역사적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러한 해석들의 배후로 들어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p33)

 

그럼 예수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는 복음서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들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크로산이 말하듯 복음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 역사책이 아니다. 성서 즉, 복음서는 특수한 상황과 장소에서 특수한 공동체를 위해 쓰여 진 책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복음서들이 쓰여 졌던 배경, 배후를 알아야 한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들은 종교적인 창작, 혹은 여러분들이 이 표현이 더 낫다고 본다면, 비유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출생 이야기들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적 의미에서 역사적인 사실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p39)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거칠게 바로 표현하면 ‘비유’이다. 종교적인 창작물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기존의 신앙관을 뒤엎는다 해도 고백의 방식은 여전할 것이다. 다만 화자의 발설이 담고 있는 신앙고백의 의미가 전통의 방식과는 다를 것이다. 

 

“저는 ‘사실의 진술’과 ‘신앙의 진술’ 사이를 강조해서 구분하고자 합니다. 예수가 인간이라든지 혹은 나사렛 출신이었다는 것은 사실의 진술로서, 누구나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신적인(divine) 존재라든지 혹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신앙의 진술로서 기독교인만이 말할 수 있습니다.” (p57)

 

크로산의 표현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예수를 신적인 존재 다시 말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동기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 진술이라기보다는 신앙적인 진술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도 표현이 가능할까? 하느님의 아들보다는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되어지는 분? 

 

“사랑과 마찬가지로, 신앙도 유일무이하고 절대적이고 대체할 수 없는 것으로 경험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한 알아야만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신앙을 우리와 똑같이 유일무이하고 절대적이고 대체할 수 없는 것으로 경험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모든 종교는 그 신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유일무이한 것으로 경험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다른 종교인들이 이와 같은 유일무이성을 경험한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종교들은 공개적인 대화 속에서 자신을 다른 종교와 비교할 수도 있고 비교해야만 하겠지만, 어느 종교도 거룩한 것, 신성한 것, 혹은 신적인 것에 대한 독점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중략) 다음 천년시대를 위한 도전은 자기 자신의 신앙을 온전한 정체성을 가지고 지키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신앙의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파괴하지 않는 것입니다.” (p59)

 

크로산은 논리적으로 기독교의 절대성을 강조하지만 한편으론 교묘하게 다원주의의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이 말이 다음 천년을 살아가는 종교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정신(mind)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도 예외 없다.

 

 

이작가야의 이중생활

문학과 여행 그리고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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