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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말씀을 길로 삼아

20180923 쓰임교회 주일나눔

​​말씀을 길로 삼아

<시편 1편>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2.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
4.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다. 그러므로 악인은 심판받을 때에 몸을 가누지 못하며, 죄인은 의인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한다.
5.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대나무는 마디 있음을 귀히 여긴다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길 빕니다. 오늘 말씀 본문 시편 1편은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의 책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의 안내를 받아볼까 합니다. 함께 걷겠습니다.


원칙을 세우는 것이 아름다운 삶의 비결이다. ‘대나무는 마디 있음을 귀히 여긴다’는 말이 있다. 대나무가 매운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것은 마디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살이에도 마디가 필요하다. 성경은 그 마디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책이다. ‘성경’의 ‘經’은 베나 천의 날줄 그러니까 세로줄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 어머니들이 베나 가마니를 짜던 모습을 떠올려본다. 날줄을 먼저 틀에 걸어놓은 후에 북으로 씨줄을 넣고 바다로 내리친다. 중심이 되는 것은 날줄이다. 우리 삶도 그렇다. 세로의 중심, 수직의 중심이 바로 서야 삶도 가지런해지는 법이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날줄이다. 시편 1편 시인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이런저런 잡다한 설명을 다 생략하고 단 한 마디의 말로 핵심에 이르고 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 그는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길로 삼은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어떠한가? 우리는 복된 인생을 살고 있나? 한 해가 다 지나가는 데도 성경 구절 하나가 내 속에 들어와 나의 길이 되지 않았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의 별명은 ‘한 책의 사람’이다. 물론 여기서 ‘한 책’이란 성경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해서 웨슬리가 다른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정말 많은 책을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의 척도가 되어준 것은 언제나 성경이었다. 시인은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단적으로 말한다. 여기서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다. ‘묵상하다’는 말은 ‘하가(hagah)’의 번역어인데 그다지 적절한 번역은 아니다. ‘묵상하다’하면 바닥이나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고요히 앉아 있는 광경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 단어는 마치 사자가 자기 먹이를 움키고는 기쁨에 겨워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말씀의 향기를 맡고, 씹고, 맛을 음미하는 과정 전체를 의미한다. 혹시 깨끗이 핥아놓은 개밥 그릇을 본적이 있는가? 시인 정호승은 밥을 다 먹은 개가 빈 밥그릇 밑바닥을 핥고 또 핥는 광경을 보다가 문득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밥그릇 밑바닥까지 먹어보았나” 생각해본다. 어떤 일이든 대충 해치우고 얼른 다른 일로 옮겨 다니지 않았는가 돌아보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깨달음을 얻은 듯 말한다.

​그릇에도 맛이 있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밥그릇> 중에서

불경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 밑바닥까지 핥고 또 핥는 것이다. 여러 번 읽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철저히 읽는 것이 중요하다. 요한계시록에는 사도 요한이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에게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천사에게 손을 내밀자 천사가 말한다.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것은 너의 배에는 쓰겠지만, 너의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요한계시록 1:9).

이게 무슨 말인가? 두루마리를 받아먹으라니? 하나님을 말씀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다. 온 존재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먹는 것이 살과 피로 변하듯이 말씀은 우리의 인격과 삶으로 화육해야 한다. 귀로만 듣는 이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꿀같이 달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감동되는 구절에 밑줄을 긋는다. 하지만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거나, 설사 읽는다 해도 밑줄만 긋는다. 말씀을 인용할 줄은 알지만 그 말씀을 삶의 척도로 삼아 나를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는 일마다 잘 된다니?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니다. 존재 전체로 읽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말씀 한 마디라도 붙잡고 궁구하다보면 삶의 중추가 보이기 마련이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삶의 입장이 생긴다. 그걸 붙잡아야 삶이 요동치지 않는다. 시인은 그걸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시냇가의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3절).

이 구절을 읽으면서 늘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라는 대목이다. 이건 우리 현실 경험에 들어맞지 않는 것 같다. 공평함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악인이 잘 되고, 선인들이 어려움을 겪는 현실을 목도한다. 그러면 시인의 이런 고백은 ‘원망사고(wishful thinking)’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여기에 우리의 딜레마가 있다. 단적으로 말하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는 일마다 잘 된다’는 말이 옳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그들에게 복을 내리신다. 그들의 마음이 시들지 않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신다.

하지만 여기서 ‘잘 된다’는 말을 내 욕망이 이루어진다는 뜻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어려움도 겪는다. 예언자들의 운명이 그랬고, 사도들의 운명이 그랬다. 그럼 그들은 불행한 이들인가? 인간적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승리자들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나의 나됨을 지킨다는 것보다 소중한 일은 없을 것이다. 줏대가 바로 서면 조금 덜 먹어도, 조금 덜 편안해도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우리의 걸음걸이를 주님의 말씀에 굳게 세우려는 마음이 속에서 솟아나오는 순간 우리는 이미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의 마음이 스산한 까닭은 창고에 많은 것을 거두어들이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루어야 할 존재의 목표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날줄로 삼고, 우리의 시간과 삶의 조건들을 씨줄로 삼아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김기석,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 꽃자리, p.308-311

 



존재의 목표가 무엇일지 함께 고민해보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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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책과 여행을 사랑하는 이작가야입니다. 책과 여행에 관한 소식을 전합니다. 본업과 무관한 일을 꿈꾸다가 채널을 '이중생활'로 짓게 되었어요. 언제나, 누구든 이곳에 편하게 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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