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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어린 아이가 된다는 그 어려움

20180916 쓰임교회 주일설교

 

어린 아이가 된다는 그 어려움

 

<마태복음 18장 1-5절>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물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2. 예수께서 어린이 하나를 곁으로 불러서,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사랑스런 어린 아이

 

주님 주시는 평화가 이곳에 가득 하길 빕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어린 아이와 하늘나라의 관계에 관해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 방금 말씀드린 대표적인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린 아이’하면 가장 먼저 뭐가 떠오르십니까? 

 

아마 손자손녀를 둔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아이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존재로 느껴지실 테고, 지금 막 아빠와 엄마가 된 분들은 아기는 생명의 신비를 간직한 존재로 느껴질 것입니다. 또한 아이를 예뻐하는 교회학교 선생님들이나 성도님들에게 있어 아이들은 사랑스러움 그 자체일 것입니다. ‘어린 아이’란 이렇게 해맑고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존재입니다. 

 

통제 밖의 어린 아이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에 관해 방금 말씀드린 부분은 아이들 성향의 긍정적인 단면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그 반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로 인해 힘든 적은 없으셨는지요?

 

한 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떼를 쓰거나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를 보면 도저히 통제 불능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대화도 되지 않고 때리거나 울거나 소리치면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어린 아이가 사랑스러운 존재로 느껴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저는 요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또 책을 읽으며 ‘어린 아이’의 타고난 습성이 무엇일지 생각해봤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이는 순수하지 않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생각이 너무 불순해 보이나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는 주로 이기적이고 파괴적이며 본능적입니다. 사실 아이가 예쁜 짓을 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순간은 그 아이 자신의 욕구가 채워졌을 때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아이가 자발적으로 인내하고 자신을 통제하여 부모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예쁨을 받는 경우는 없습니다. 간혹 있을 순 있어도 아주 특별하거나 드문 순간일 것입니다. 아이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장난감을 부수거나 먹던 음식을 파헤쳐놓기도 하고 또 형제가 있는 경우에는 특정한 물건을 갖기 위해 끊임없이 다투는, 양보 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제가 일부러 ‘어린 아이’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본능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이 아이의 기본 습성에 가까운 것입니다. 

 

어린 아이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

 

그럼 어째서 예수께서는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하셨을까요? ‘어린 아이’ 하나를 자기 곁에 불러 세우시고는 이 아이와 같아지지 않고서는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거라고 하셨을까요? 저는 4절 말씀에 ‘어린 아이’ 그 상징성의 무게감을 느끼게 하는 힌트가 담겼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는 조금 전의 비유를 드시며 이렇게 덧붙이시죠.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4).” 

 

‘어린 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 사실 이 말은 해석이 필요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는 어린 아이가 자신을 자발적으로 낮추는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는 자신을 낮추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렇게 보이는 순간이 있긴 하지만 말씀 드렸듯이 그건 그렇게 봤던 어른의 개인적인 시선일 뿐입니다. 어린 아이는 자신을 낮춰 겸손해 질 수 있는 그런 능동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럼 왜 예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저는 이 말씀을 듣는 주체는 어른에게 있다고 봅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가요? 저는 예수의 이 말씀이 이미 어른이 된 혹은 어른이 되어가는 이들을 향해 능동적인 태도를 갖추라는 요청으로 보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된다는 건?

 

지난 주 설교 중에 인용한 책이 있습니다. 니체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입니다. 물론 그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 때문에 기독교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 유명합니다. 그렇기에 교회 공동체 유지에 있어 그의 말은 위험한 부분이 상당히 많지만 그럼에도 새겨듣고 귀 기울일 부분 또한 여럿 있습니다. 그는 ‘정신’은 세 단계 성숙을 거쳐야 한다고 말하며 사람은 처음에 ‘낙타’로 시작해 ‘사자’를 지나 ‘어린 아이’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말은 상징이 대부분이라 해석이 분분하지만 ‘어린 아이’는 이렇게 해석되곤 합니다.

 

먼저 ‘낙타’는 많은 질문과 고민으로 무거움을 짊어지고 가는 동물입니다. 그리고 ‘사자’는 특별히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은 ‘나는 하고자 한다.’입니다. 그런데 이 ‘사자’는 또한 이름이 있는 ‘용’과 싸움을 벌이는데, 이 ‘용’의 이름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듯이 무슨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인데요. 여기서 ‘사자’와 ‘용’의 싸움은 곧 하고자 생각만 하는 이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이의 싸움입니다. 즉 이것은 인간 내면의 싸움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생각은 많고 실행에 옮기는 데는 늘 더딥니다. 그래서 많은 고민과 스트레스를 안고 삽니다. 이런 내적인 싸움을 니체는 ‘사자’와 ‘용’의 싸움을 통해 우리에게 그려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자’도 다시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하는데, 이 책에서 ‘어린 아이’를 일러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민음사, p.38

 

이것도 어려운 말이긴 합니다만, 이 말을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린 아이’는 순진무구합니다. 본능적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아이들은 삶의 모든 것이 새롭고 처음 시작하는 느낌이기에 모든 시간이 출발점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어떤 목적과 목표가 없이 놀이 그 자체에 집중합니다. 그 시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시간을 즐깁니다. 그리고 아이는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입니다. 외부의 어떤 자극이나 동력에 의해 움직이는 수레바퀴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원하는 바를 실행에 옮기는 이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곧 자기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관련되기에 이는 삶에 관한 성스러운 긍정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른이 어린 아이가 된다는 건?

 

그런데 어떻게 어른이 이런 ‘어린 아이’가 될 수 있을까요? 어째서 예수께서는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걸까요? 어른은 ‘아는 자’ 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어른은 살아오며 자기만의 기준과 삶의 척도들을 갖게 됩니다. 또한 여러 경험과 배움, 학습 등을 통해 옳고 그름을 어느 정도 간직하며 삽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어른은 자기 자신과 삶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른이 어떻게 어린 아이가 될 수 있고 또 이 어른이 어린 아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 하나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어린 아이는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아이는 본능적이고 지난 일을 금방 잊어버리며 다시 시작하고 특별한 의도 없이 자신의 일들을 해나갑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늘 유희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른은 많은 절제와 제약, 예의, 교양, 품위 등을 유지해야 한다는 어떤 강박관념들로 늘 고통을 받습니다. 사회를 유지하고 어울려 살기 위해 이러한 것들은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우리 어른들은 정도 이상의 요구를 받으며 또 스스로에게 요구하며 자신이 만든 감옥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존재인 ‘어른’이 방금 나열하여 말씀드린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사실 더 크고 넓고 매력적인 것을 경험한 사람은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일까요? ‘아는 상태(어른)’에서 다시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려운 말이지요? 그러니까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 혹은 자신이 어른이 되어가며 쌓았던 젖과 꿀을 간직한 채 다시 처음의 모습으로, 처음의 것들을 회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모든 것이 새로운 출발이자 최초의 움직임이었던 것처럼 ‘어른’은 자신의 것을 갖고 다시 내려가야 합니다. 니체는 이러한 상태를 ‘몰락’ 혹은 ‘하강’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는 어른

 

사랑하는 쓰임교회 성도 여러분. 제가 오늘 본문을 너무 어렵게 푼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현재 제게 주신 하늘 아버지의 마음으로 느껴졌습니다. 앞으로의 시간들 속에서 더 쉽고 더 간단하게 하늘의 뜻을 풀어내도록 애쓰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것은 곧 ‘아는 상태’에서 ‘모르는 상태’로 진입하는 것입니다.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라는 의미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삶의 많은 부분을 모른 채 새롭게 시작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라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기존의 가치와 체계를 다시 쌓는 이들이 늘어날 때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늘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아는 어른이 모르는 어린이가 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 도전과 용기 속에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시어 갈 길을 알려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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