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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믿음과 삶 사이에서

20180909 쓰임교회 주일설교

 

믿음과 삶 사이에서

 

<야고보서 2장 14-17절>

 

14.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16.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Lumix gx9 / 20mm]

평화의 인사

 

주님 주시는 평화가 이곳에 가득하길 빕니다. 지금 모든 교회는 성령강림의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열여섯 번째 주이기도 합니다. 감리교의 절기로는 교회연합주일이기도 한 오늘, 우리는 우리를 안내할 주님의 말씀이 무엇일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따라가 보면 좋겠습니다. 

 

<야고보서>는 구원받은 자들이 구원받은 자답게 어떻게 살아가면 되는지를 알려주는 신약판 잠언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렇기에 야고보서에는 행동하는 믿음, 살아 있는 믿음에 관해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살펴보겠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당시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은 동족들로부터의 박해와 로마황제숭배로 인한 배교의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로인해 신앙의 사람들은 믿음이 흔들렸고 많이 위축돼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막6:3)는 그들의 움츠린 어깨를 펴고자 또 소극적인 믿음에 불을 붙이고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14)?” 

 

이스라엘과 로마 제국 전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 성도들을 향해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에 관해 꾸짖었습니다. 그런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냐며, 그런 믿음이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겠냐며 말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는데, 그저 그에게 가서 몸 좀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드세요, 하면 그게 그에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때에 맞는 말 한마디가 천 냥의 빚도 갚긴 하겠습니다만, 이런 상황에서는 말은 어떠한 효력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헐벗고 굶주린 사람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몸을 보호하기위한 입을 것과 속을 든든하게 채울 먹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말은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17)”이라고 말입니다. 

 

행위를 실제로 했을 때, 행위의 가치는 탄생한다

 

여러분, 기독교 교리의 오랜 논쟁 가운데 믿음과 행위에 관한 논쟁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 혹은 ‘이신득의(以信得義)’와 오늘 야고보서가 강조하는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행칭의(以行稱義)’ 혹은 ‘이행득의(以行得義)’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최근 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할까를 깊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고민을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우연히 이 질문이 생각났습니다. 안다는 것과 그것이 내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다 몇 개의 책에서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글귀와 만났습니다. 저는 이 책의 저자들도 아는 것과 사는 것, 믿는 것과 행하는 것에 관해 고민이 많았을 거라 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는 그의 책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연인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연인을 위해 실질적인 행동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책의 한 부분을 들어보죠. 

 

“정확하게 말해서 내가 애정을 확인하고 정의하는 행위를 실제로 했을 경우, 오로지 이 경우에만 나는 그 애정의 가치를 결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략) 달리 말하자면 감정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곧 사람이 하는 행위에 의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감정에 기대어서 나의 행위를 인도해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다음을 의미합니다. 즉 나는 나를 행동하도록 밀어붙이는 진정한 상태를 내 속에서 찾을 수도 없고, 또 내가 행동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개념을 어떤 도덕에 요구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장 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이학사, p.50

 

애매하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어떤 대상을 보고 싶다고 말하면서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보고 싶다고 말한 사람은 정말 상대방을 보고 싶어 하는 게 맞는지 의심하게 됩니다. 물론 그 사람의 상황과 시간 등을 고려하지 말자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말과 행위 사이에 있는 어떤 간격 혹은 공백입니다. 저는 여기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 믿음대로 사는 것의 핵심이 들어있다고 봅니다. 

 

생각은 실천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 존재

 

또 하나의 책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 파울로 코엘료는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알아야 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 혹은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 각자가 모든 문제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진실만이 옳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수다로 세월을 보냈다. 생각이 감당해야 하는 현실의 문제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은 채. 좋건 나쁘건, 생각은 그것을 실천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에만 존재하는 것인데도.”

 

파울로 코엘료,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문학동네, p.213

 

우리는 평소 많은 생각을 하며 지냅니다. 저도 주위로부터 생각 좀 그만하라는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물론 생각은 삶을 이롭게 하기 위한 시도이기에 소중한 것이지만, 우리가 했던 생각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이루지지 않는 것을 떠올리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방금 읽어드린 소설은 우리에게 ‘생각’은 현실과 무관하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생각’이란 그것을 살아내려는 ‘시도’가 뒷받침 될 때라야 실존 혹은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생각은 생각 자체로는 우리 삶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그 생각을 실천하려는 시도가 있었을 때,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든 상관없이, 그럴 때에 우리는 그 생각이 자신의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각의 실천은 시간이 지나도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의지(하나님의 도움)로  행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야고보가 말한 믿음과 행위 사이에는 훨씬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합니다. 

 

많이 믿으려 하지 말라

 

사랑하는 쓰임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만큼 잘 살아내고 계신지요? 믿음의 분량만큼은 그래도 살아내려 고군분투하고 계신지요? 저는 ‘과정’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먼저 구원의 감격으로 기쁨을 얻고 나면 그 기쁨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형태를 띠게 됩니다. 신앙인은 이 믿음을 간직하며 살아가게 되는데, 이후에는 이 믿음이 행함 혹은 행동, 실천으로 반드시 넘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신앙의 성숙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고 믿음은 구원의 감격이 자신을 사로잡는 것이며 행함은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그 믿음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스라엘과 로마제국 전역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기 속에서, 또 안일함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방법은 ‘행함’임을 알았습니다. 믿는다면서 그 믿는 것이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면, 내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되지 않는다면 믿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믿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해야 한다’는 어떤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때가 많은데, 솔직하게 자신이 믿는 것만 그리고 믿는 것부터 살아내면 되는 것입니다. 

 

‘사자’와 ‘용’의 싸움

 

프리드리히 니체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보면 정신의 성숙 과정이 3단계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많은 생각과 고민을 짊어지는 ‘낙타’에서 시작해 투쟁으로 나아가는 ‘사자’, 마지막으로 살아내는 것에만 의미를 두는 ‘어린 아이’에 이르기까지 이 세 단계를 정신의 성숙 단계로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자’의 단계에서 ‘사자’는 ‘용’과 마주칩니다. 이 ‘용’의 이름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입니다. 그리고 이 ‘사자’의 이름도 있는데, ‘사자’의 이름은 ‘나는 하고자 한다.’입니다. 무슨 수수께끼 같기도 한 이야기인데요. ‘사자’는 ‘용’과 싸웁니다. ‘사자’는 방금 소설에 비유하자면 생각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용’은 생각을 멈추고 그렇게 하라고 부추기는 존재입니다. ‘용’은 하고자 하지만 말고 마땅히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생각하기를 멈추고 그렇게 살아보라고 말합니다. ‘사자’는 그 사이에 계속된 투쟁을 합니다. 

 

우리도 많은 시간에 ‘용’과의 싸움에 마주쳤었습니다. 그런데 용기가 없어, 두려움 때문에 싸우기를 포기했습니다. 살아보고자 하는 삶, 원하는 삶을 못 본 채 하며 살았습니다. 가슴 깊숙이 묻어만 두고 말입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우리가 돈 중심의 사회, 물질 중심의 사회에서 사람 중심의 사회, 생명 중심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거창한 담론만을 입에 달고 다니지 말고 자신의 일상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아내려는 그 시도 속에서 실천하는 것에 그 무게를 두면 됩니다.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차지하여라(눅19:17).”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말씀과 우리네 삶 사이를 건너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야

 

오늘 설교는 한 책의 이야기를 읽어드리는 것으로 마칠까 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묻거나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하셨고 우리도 그 분의 사랑을 기억하며 각자의 삶에 이러한 방식으로 보답하면 되는 것입니다.  

 

“묻지 않아도 돼. 사랑에는 많은 질문이 필요하지 않아. 생각하기 시작하면, 겁을 먹게 될 테니까. 그건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기 때문에 말로 설명해봤자 소용이 없어. 모욕을 당하면 어쩌나, 거절하면 어쩌나, 사랑의 마법이 풀려버리면 어쩌지 하는 것들 말야. 아주 우스꽝스러워 보이겠지만, 사랑이란 그런 거야. 그러니까 사랑은 묻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야. 말을 하면 할수록 더 자주 위험과 맞닥뜨리게 돼.” 

 

파울로 코엘료,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문학동네, p.173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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