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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아가서

[Lumix gx9 / 14mm]

 

아가서에 관하여!


오늘은 구약성서에 포함되어 있는 <아가서>에 관해 알아볼까 합니다. 사실 구약성서에 포함은 되어 있지만 잘 읽지 않게 되는 것이 이 <아가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야로슬라프 펠리칸의 책 <성서, 역사와 만나다>에 나온 <아가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함께 귀기울여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중세 그리스도교 성서해석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사례이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해석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솔로몬의 노래, 곧 “중세 수도원에서 가장 많이 읽고, 가장 많이 인용한 구약성서의 책, 아가서”다. 아가서는 그 자체로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전율을 일으키고 때로는 노골적이기까지 한 사랑의 노래다. 그렇다면 이 문헌은 왜 성서에 수록되었을까? 

아가서가 유대교 정경에 포함될 때부터 유대인들은 이 문헌에 나오는 관능적인 성적 묘사를 은유로 해석했다(호세아와 같은 예언자가 신의를 저버린 이스라엘을 배신과 유혹, 매춘이라는 성적 심상을 활용해 비난한 것처럼), 이븐 에즈라의 주석에서 엿볼 수 있듯이, 중세 유대교 랍비들 또한 아가서를 은유적으로 해석했다. 부드러운 사랑을 주고받는 연인 관계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계약의 예형인 “비둘기”(아가 2:12)와 어떤 관계에 있을까? 

신약성서에서 교회를 신부로 비유한 “남편이 된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심 같이 하십시오”(에페 5:25)라는 구절은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인 사랑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찰스 웨슬리의 유명한 성가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 사랑하는 우리 주 나를 품어 주소서>에서 나온 것처럼 하느님, 또는 그리스도와 신자들이 맺는 친밀한 교제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수없이 많은 중세 아가서 해설 가운데 가장 유명한 해설은 12세기 수사이자 신비주의자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의 설교일 것이다. 그는 아가서 한 절 한 절을 하늘의 신부가 그리스도를 기리는 은유로 해석했다. 모든 사람이 아가서를 경전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했으나 이해한 의미는 판이했다. 어떤 것이 올바른 해석일까? 모두가 옳다고 할 수 있을까? 혹은 모두가 잘못 해석한 것일까? 중세 불가타 성서의 (상이한) 아가서 필사본들은 이 모두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성서 해석 외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또 다른 점은 시각예술이다. 유대교와 달리 동, 서방 그리스도교에서는 공통으로 시각예술이 발전했다. 언제 시각예술이 시작되었는지 그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가장 오래된 작품은 시나이 산에 있는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 보존되어 있다. 언제 시각예술 활동을 시작했든 간에 십자가나 별과 같은 상징에 더해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 기타 성인의 모습을 그리는 활동은 개인의 신앙생활과 공동 예배, 나아가 교회 건축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교회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성상을 그리고 만드는 전통은 성서 시대와 사도에게서 그 기원을 찾았다. 사람들은 사도이자 복음사가인 루가를 자신이 쓴 복음서 첫 두 장에서 누구보다 정교한 언어로 동정녀 마리아상을 그린, 성모의 첫 성상 작가로 간주했다. 

물론 히브리어로 된 유대교 타낙이든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된 그리스도교 구약성서든 모든 이의 ‘경전’은 그리스도인과 유대교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율법, 즉 십계명에서 말한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출애 20:4-5)

이러한 성서의 금지 규정에 교회는 성상이 ‘문맹인의 성서’라고 해명했다. 그리스도나 마리아의 이콘(특히 동방) 혹은 성상(특히 서방)은 성서를 요약한 것으로 그리스어나 라틴어, 혹은 어떤 언어로도 성서를 읽지 못하는 많은 이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 이를테면 안드레이 루블레프가 비잔티움 전통을 따라 그린 러시아 삼위일체 이콘은 신성 안에서 나누어지지 않는 성부, 성자, 성령의 내적 관계라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초월적 신비를 시각화한 것일 따름이다. 다른 이콘과 마찬가지로 이 이콘 역시 성서가 말하는 구원의 역사 가운데 한 장면을 묘사한다. ‘한 분이신, 그러나 세 분이신 주님’이 마므레에서 아브라함을 만난다. 이로써 유한한 인간은 신비를 깨닫는다. 성서 필사본에 있는 삽화부터 중세 대성당에 있는 스테인글라스에 이르기까지 시각예술 작품들은 거룩한 역사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어떤 사람들은 보다 복잡한 근거를 들어 성상의 교육적인 역할을 옹호했다. 그리스도 자신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진정한 상이므로 그리스도의 이콘은 성상을 그린 성상이라는 것이다. 어떻든 간에 성상은 같은 성서를 두고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를 시각적으로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중세 그리스도교 성서 해석을 시의 형태로 집대성한 작품은 단테의 <신곡>이다. 이 시를 통해 단테는 아브라함을 “모든 신부가 딸이자 며느리가 되는 오래된 아버지”(천국편 26:92-93)로, 다윗을 “성령을 노래한 사람”(천국편 20:38)으로 기렸다. 또한 고대 이스라엘의 전 역사와 복음서의 이야기, 교회의 역사는 “옛 양피자와 새 양피지 위에 널따랗게 퍼져 나간 성령의 풍족한 비”(천국편 21:91–93)로 표현했으며 유혹과 배교 이야기로 14세기 교황청의 위기를 담아냈다. 그리고 성인들은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서 신자에게 다가오는 도전과 염감을 뜻했다. 이렇게 “모세와 예언서, 시편과 복음서를 내리는 진리”는 지옥과 연옥, 다가올 천국에서의 경험을 묘사할 때 그 언어와 심상을 경험했다. 

 

야로슬라프 펠리칸, <성서, 역사와 만나다>, 비아, p.221-224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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