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청파 Note

[쓰임 Note] 하늘에 닿은 사랑

20190120 쓰임교회 주일설교

 

하늘에 닿은 사랑

 

<시편 36편 5-10절>

 

5. 주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 차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습니다.

6. 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님의 공평하심은 깊고 깊은 심연과도 같습니다. 주님, 주님은 사람과 짐승을 똑같이 돌보십니다.

7. 하나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어찌 그리 값집니까? 사람들이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습니다.

8. 주님의 집에 있는 기름진 것으로 그들이 배불리 먹고, 주님이 그들에게 주님의 시내에서 단물을 마시게 합니다.

9. 생명의 샘이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

10.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친히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의를 변함없이 베풀어 주십시오.

 

 

축복의 인사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길 빕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의 책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에 빗대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늘의 가린 콘크리트, 검은 아스팔트, 질주하는 차량의 물결, 희뿌연 하늘과 탁한 공기,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굳은 표정, 매스컴을 통해 듣는 우울한 세상일들, 변덕스러운 날씨보다 더 변덕스러운 인심. 우울하다. ‘굿 모닝’이라는 아침 인사말도 ‘씨티’라는 말과 함께 사용되면서 악취가 배어들었다. 시편 36편의 시인도 악인이 활개를 치는 세상을 보면서 속상해 한다. 그는 탄식하듯 말한다. 

 

악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반역의 충동만 있어,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습니다(1절). 

 

게다가 그들의 눈빛은 또 어떤가?

 

그의 눈빛은 지나치게 의기양양하고, 제 잘못을 찾아내 버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2절).

 

번들거리는 그의 눈은 항상 타인을 향할 뿐 자기를 돌아보지는 않는다. 그의 말은 또 어떠한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란 사기와 속임수뿐이니, 슬기를 짜내어서 좋은 일을 하기는 이미 틀렸습니다(3절). 

 

입에서 기름이라도 흐르듯이 매끄러운 말을 쏟아내지만 실은 그 속에 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정말 우울해진다. 

 

오늘은 바다로 가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인 가운데 정진규라는 분이 있다. 이미 70이 넘으신 분인데,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자못 그윽하다. 젊은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는데,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찾아와 세상 참 더러워서 못 살겠다고 푸념을 했나보다. 나이 드신 분으로서 한두 마디 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한 마디도 못했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집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인생은 살 만한가? 그렇다면 어디에 희망을 두고 살아야 하나? 그러다가 문답식으로 된 산문시 하나를 얻었다. 

 

그러면 무엇해, 무엇해, 너는 말한다 나쁜 사람이 더 잘사는 세상이야 너는 말한다 사랑으로 사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해 착하게 사는 사람들은 끼니가 고작이야 지워지고 지워진 게 도대체 몇 천 년이야 너는 말한다 지워지는 일은 아무나 못하는 일 그토록 어렵기에 하느님께서 네게만 맡기신 일 소용없어, 소용없어, 너는 말한다 모두 잊고 오늘은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면 된다 알 수 있다 바다도 몇 천 년을 그렇게 지워지고 있을 것이다 앞 물결을 뒷 물결이 싸악 지워내고 또다시 뒷 물결이 앞 물결을 싸악 지워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바다는 언제나 싱싱하게 싱싱하게 다시 채워지고 있을 것이다 지워지는 것은 이토록 아름답다 분명하게 지울 줄 아는 사람만이 가장 분명하게 다시 태어난다 사람아, 사람아, 더욱 온전히 사랑하거라 더욱 온전히 착해지거라 누리려 하지 말라 너는 분명히 어디에고 다시 태어나고 있다 사람아, 사람아, 누리려 하지 말라 몇 천 년을 또 다시 지워지는 사람되자, 지워지는 사람되자 싱상한 바다를 만들자 세상의 밥이 되자 

 

_ <밥時·4>에서

 

 

시인은 세상살이에 지친 영혼을 바다로 이끌고 있다. 그리고 말없이 출렁이는 바다로부터 한 말씀을 듣는다. 바다가 언제 보아도 당당하고, 싱싱하게 유지되는 것은 앞 물결이 뒷 물결에게 자리를 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를 지울 줄 아는 사람이라야 바다를 만드는 사람이고, 세상을 먹여 살리는 밥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이 ‘자기 부정’이다. 나의 ‘에고’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한 예수라는 큰 생명과 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편 36편의 시인도 그 답답한 현실에 주눅들어 있다가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나 보다. 한없이 푸른 하늘 앞에 서면 우리는 말을 잊고 생각을 놓게 된다. 다만 가슴 한 켠이 시원해지고, 답답하게 막혔던 울현 같은 것이 스러지는 것을 느낀다. 어느 선배 목사님은 산을 오르다가 문득 눈을 들었을 때 산마루 저편에 아득히 펼쳐진 푸른 하늘을 보면 누구라도 ‘아!’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깊은 깨끗함을 보고 하나님을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싶다. 세상일에 지치고 낙심했던 시인이지만, 눈을 들어 하늘과 산과 바다를 바라보다가 문득 이 세상이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 안에 있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노래한다. 

 

하나님의 다양한 얼굴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 차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습니다. 

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님의 공평하심은 깊고 깊은 심연과도 같습니다(5-6절).

 

그는 이제 더 이상 세상일에 대해 투덜거리는 사람이 아니다. 물론 세상은 아직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악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의 눈은 다른 이의 허물과 자기 이익을 찾기에 혈안이다. 그래도 시인의 마음은 화창하다. 주의 한결같은 사랑이 하늘에 가득 차 있음을 머리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네 편 내 편을 가르고, 부자와 빈자를 가르고, 배운 자와 못난 자를 가르지만, 하나님은 모든 차이를 사랑으로 감싸 안고 계신다. 시인은 우주의 뿌리가 ‘하나님의 사랑’임을 확연히 알았다. 투쟁이 아니다. 욕망이 아니다. 사랑이다. 헨리 나우엔 신부는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뿌리박을 때, 우리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서도 가볍게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사랑을 위해 사는 사람, 사랑의 기초 위에서 사는 사람은 어떤 짐도 가볍게 질 수 있다. 

 

시인은 주의 미쁘심이 궁창에 사무쳐 있다고 고백한다. 세상 속속들이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이 간과하는 보잘것없는 것 하나하나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다. 하나님은 변덕스럽지 않으시다. 한결같으시다. 낳고 기르고 품어주신다. 때때로 생의 어려움이 짙은 구름이 되어 하나님을 가리기도 하지만, 우리의 눈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향하신다. 

 

시인은 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도 같다고 말한다. 사람은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떠나지만 산들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세상에 의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세상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의로 귀착되기 마련이다. 세상이 암울해 보여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작은 성공에 기뻐할 것도 없고, 작은 실패에 낙심할 것도 없다.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승리한다. ‘사필귀정’이다. 모든 일은 결국 ‘바름’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이 믿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한다. 악인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상해하지 말자. 그들은 반드시 값을 치러야 한다. 

 

악인들이 풀처럼 돋아나고, 사악한 자들이 꽃처럼 피어나더라도,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시편 92:7).

 

시인은 주님의 공평하심이 깊고 깊은 바다와 같다고 말한다. 바람에 따라 출렁임이 더할 때도 있고 덜할 때도 있지만 언제나 수평을 유지하는 바다처럼, 하나님은 높은 것은 낮추시고 낮은 것은 높여주신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노래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누가복음 1:51-53). 

 

 

인생은 축제

 

이런 확신이 있다면 인생은 축제가 된다. 도무지 두려울 게 없다. 시인은 이제 행복하다. 그는 자기 삶을 주님의 집에 있는 것으로 배불리 먹고, 주님의 시내에서 단물을 마시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둡게만 보이던 세상도 돌연 주님의 빛으로 환해진다. 너무 낙관적인 것처럼 보이는가?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사무치게 경험한 사람은 낙관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힘겨운 일이 닥쳐온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싸 안고 있고, 세상일은 결국 하나님의 의로 돌아가게 되어 있음을 안다면 낙심할 수 없다. 성도는 작은 물결에도 이리저리 떠밀리며 요동치는 사람들이 아니다. 

 

코미디 프로에 나오는 장면이 떠오른다. 한 사람이 고무줄에 매인 채 끌려간다.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면서 긴장한다. 고무줄을 놓아버리면 끌려가던 사람 얼굴에 맞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끌려가던 사람이 가위를 꺼내서 그 줄을 잘라버리는 것이다. 고무줄을 잡고 있던 사람은 갑자기 얼굴에 고무줄을 맞고는 머쓱한 표정이 된다. 우리 삶에도 이러한 반전이 일어날 수 있다. 시련이, 실패가, 고통이 ‘너 딱 걸렸어‘하면서 우리를 끌고 갈 때, 한두 걸음쯤은 끌려갈 수도 있겠지만 다음 순간 그 줄을 딱 끊어버린다면 인생은 가벼워질 것이다. 어떤 상황에 처해도 그 상황에 시들시들 따라다니지 말아야 한다. 코브린의 랍비는 이렇게 가르쳤다.   

 

그대가 어떤 일로 해서 고통 받을 때 그것을 나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신이 인간에게 주는 것에 나쁜 것이란 없다. 그 대신 ‘이것은 약간 쓰군’이라고 말하라. 왜냐하면 약 중에는 쓴 약초로 만든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이든 하나님의 사랑과 미쁘심, 의로우심과 공평함 밖에 머물 수는 없다. 이 확신을 가슴에 새기고 산다면 우리는 세상에 활력을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피로에 지친 몸과 마음을 쉬기 위해 휴가지를 찾는다. 날이 더워지면 하늘과 바다와 산의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가슴에 모시고 ‘쿨’한 시간 보내면 어떨까.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www.youtube.com

 

728x90
728x90

'@ 청파 Not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쓰임 Note] 슬퍼말고 기뻐하십시오  (0) 2019.01.27
20190127 쓰임 Letter  (0) 2019.01.27
20190120 쓰임 Letter  (0) 2019.01.20
[쓰임 Note] 걷는 길을 돌아봐야 할 때  (0) 2019.01.13
20190113 쓰임 Letter  (0) 2019.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