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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작가야의 일상 에세이

[에세이] 내게 남겨진 것들

떠남

이번 여정은 내게 어떤 흔적을 남겼던가. 태풍과 코로나의 영향으로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고 고독했던 시간들. 외로울 줄 알고 준비한 여정이다. 고독을 벗삼을 준비까지 했었으니. 하지만 떠나는 순간부터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마음이 계속 따라다녔다. 혼자만의 시간이 길어지게 되더라도 그 시간들을 잘 보내기 위해 몇 가지 장치를 준비했건만, 사람이 주는 영향에 비할바는 못 되었다. 문득 코엘료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내가 완전히 혼자라는 사실을.

물론 그해의 다른 때에도 저는 자주 혼자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자친구는 비행기로 두 시간만 가면 되는 곳에 있었고요. 어쨌든 그날처럼 들뜬 오후를 보낸 다음, 누군가와 말을 해야 하는 의무감도 느끼지 않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움을 관조하며 오래된 도시의 거리와 골목들을 산책하는 것만큼 값진 일도 없겠지요.

그런데도 나는 외로움에 마음이 짓눌리는 듯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도시의 풍광을 함께 나눌 사람, 함께 산책하고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말입니다."

 

파울로 코엘료, <오자히르>, 문학동네, p.326


올레스테이
<유동카페> 가는 길

태풍이 묶은 두 발이 오히려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하게 만들었을까. 아니면 가리산지리산 방황할 기회를 줄어들게 만들었을까. 어쨌든 계획했던 것보다 동선은 짧아졌고, 어딜 가든 한 장소에서 머무는 시간은 늘어만 갔다. 여행은 "장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편견을 바꾸어주는 것이다."라고 말한 프랑스 소설가 '아나톨 프랑스'의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제주까지 떠나왔는데, 여전히 서울에서 하던 고민 그대로다. 제주의 남은 여정은 고여있던 생각과 상황에 대한 편견을 바꾸어줄 수 있을까? 


카페, <오버더윈도우>

우연한 만남은 태풍을 뚫고 기회를 마련하려는 자에게 그나마 조금이라도 손을 뻣어주는 듯했다. 오픈 시간에 맞춰간 카페 <오버더윈도우> 사장님과 나눈 필름 카메라 이야기, <여행가게 & 연필가게>에서 마신 달큰한 밀크티와 세계 각지에서 건너온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제주에서 다시 타국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그 공간을 함께 채운, 나같이 태풍을 뚫고 그곳을 채운 이방인들을 곁눈질하며, 그들도 그들만의 사연을 안고 이곳에 왔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곳을 채운 이들은 대부분 하나보단 둘에 가까웠다. 둘이면 둘이지 둘에 가깝다는 무슨 말인가. 그들을 시샘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책으로 둘러싸인 <여행가게>는 설렘과 안정을 주었다.


<여행가게 & 연필가게>
올레길

태풍은 지나갔다. 마지막 남은 하루다. 걷기위해 떠나왔고 걸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그래서 걷기 시작했고 잠시 경유하기로 계획한 카페에 도착했다. 그곳엔 이번 여정엔 전혀 없을 것만 같았던, 우연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카 다방>. 동화 속에 등장할 법한 이 카페에서 아주 잠깐 머물고 갈 계획이었으나, 우연한 만남이 좀 더 긴 시간을 할애하게 만들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후회는 없다. 선명한 기억이란 자발적 선택의 순간에 오롯이 담겨 온다. 세웠던 계획을 지키고자 떠날 수도 있었지만, 초대에 응답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나는 내 판촉을 위해 방문한 수많은 도시들의 거의 모든 기념물과 박물관 유적지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무엇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 독자들과의 만남, 바, 우연히 거닐게 되었거나 좀더 멀리 나갔다가 뜻밖의 광경을 목격했던 길에 관한 추억뿐이다.

언젠가 나는 지도와 호텔 주소들만 있고 나머지 부분은 백지로 남겨둔 여행 안내서를 쓸 것이다. 사람들은 그 안내서를 들고 자신만의 특별한 여행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도시들에 존재하지만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야기해준 '필수 코스' 목록에는 들어 있지 않은 식당, 기념물, 그 밖의 멋진 것들을 스스로 발견하게 될 것이다."

파울로 코엘료, <오자히르>, 문학동네, p.297


<모카다방>


높은 습도에 적당한 땀을 흘려가며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 도착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이곳에 다시 꼭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였을까. 잘 모르겠다. 조용히 그가 찍은 제주의 사진을 둘러보며 그의 걸었던 고독의 시간에 동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몇 년 만에 다시 간 <두모악>은 고요하고 정갈했다. 먹고 입는 것을 포기해서라도 제주의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으려는 그의 열정을 눈과 마음으로 읽고 왔다. 동생 '테오 반 고흐'의 지원으로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빈센트 반 고흐'. 그리고 빈센트와 동시에 살았던 그에 못지않는 열정 화가 '폴 고갱'. 그리고 한국의 화가 '김환기(호: 수화)'. 김영갑을 마주하니 자기 안에 있는 무언가를 쏟아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몇몇의 인물들이 떠올랐다. 난 삶에서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쏟아내고 있었던가. 헤세의 이야기는 흥분과 아픔을 동시에 던져준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 <데미안>, 민음사, p.129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돌아오는 길, <제주공항>

내게 필요한 마지막 말 한마디는 헤세의 이 한마디 말에 요약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좋아하고 그 안에서 찾고 배우려는 마음만 있다면, 몰두하려는 그 마음이 내게 어떤 식으로든 말을 건네리라 믿는다. 당장에 아무 음성이 들리지 않더라도 지난 시간을 후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어느 날 어떤 방식으로 어떤 깨달음이 주어질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잠잠히 기다려라. 어디든 충실히 존재했다면, 무의미한 시간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성껏 가꾸거나 희생의 제물이 되기도 하는 우정이나 사랑처럼, 신중하게 고르고 사서 읽는 처럼 모든 유람여행이나 연구여행은 스스로 좋아하고, 찾아서 배우려고 하면서, 몰두하는 데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여행은 어떤 나라와 민족, 어떤 도시나 풍경을 여행자의 정신적 소유물로 만들려는 목적을 지녀야 한다." 

헤르만 헤세, <헤세의 여행>, 연암서가,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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