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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작가야의 일상 에세이

[에세이] 조제를 통해 온, 사랑이라는 '결여'

일본 영화를 보다 보면 빠져들게 되는 배우들이 있다. 그것도 흠뻑. 기억을 더듬어 보니, 세 명의 배우가 떠오른다. <러브레터>의 나카야마 미호와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히로세 스즈 그리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이케와키 치즈루.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이케와키 치즈루는 <파이브 피트>의 헤일리 루 리차드슨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모도 외모지만 그녀들이 맡은 역할이, 그녀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서로 닮아 있었다.

 

세 명의 배우를 가만히 놓고 공통점을 생각하다 보니, 이내 연애의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끌리게 되고 감정이 살아나게 했던 그녀들. 그녀들에게 마음이 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금 한번 생각해보고 싶은 부분은 내 안의 어떤 '결핍'과 관련된 것이다. 사랑에 관한 결여 혹은 결핍에 관한 이야기는 평론가 신형철이 쓴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참고해 보려 한다. 대체, 난 왜 그녀들에게 끌렸을까? 

 

세상과 단절되어 있던 조제가 츠네오를 만나 세상으로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다. 

 

"타인의 사랑이 내가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결여를 인지하도록 이끄는 것,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타인의 사랑에 응답하게 만드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아래에서 <러스트 앤 본>을 통해 알게 되겠지만, 내가 내부의 결여를 인지하는 데에는 나를 둘러싼 외적 조건들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p.20) 

신형철은 사랑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어떤 식으로든 결여가 있음을 깨닫게 될 때,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에게 어떤 결여가 있는지 당장에 깨닫진 못한다. 모든 깨달음은 사후적이라 시간의 경과를 필요로 한다. 물론 결핍만으로 모든 사랑이 이루어지진 않는다. 신형철의 말대로, 당사자들을 둘러싼 외적 조건들도 영향을 미쳐야 한다. 그럼, 결국 '연결된 사랑'이란 많은 부분 우연과 연관됐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일까. 

 

 

'외로움'은 한 번이라도 뭔가 채워졌던 경험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결여의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전제가 되는 어떤 경험이 있은 후에야 느껴지는 것이 '외로움'이라는 말이다. 이 또한 사후적이다. 

처음부터 외롭기만 했던, 외로움으로만 채워졌던 인생이 다른 삶을 상상하는 게 가능할까. 조제는 영화 후반부에 츠네오와 나누는 대화 중에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은 빛도 소리도 없는 깊은 바닷속에서 헤엄쳐 나왔다고. 츠네오는 비몽사몽 간에 외로웠겠다고 답한다. 하지만 조제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곳에서는 외로움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고, 그저 천천히 천천히 시간만 흐를 뿐이라고 답한다. 누군가는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아무것도 없을 땐 자신이 외로운 줄도 모른다. 사랑을 하면서 자신이 그동안 외로웠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사랑이 끝나면 외롭지 않을 수도, 처음처럼 외로움을 모를 수도 없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경험 이전으로 돌아가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건가.

 

조제는 책을 통해 세상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유일한 취미는 할머니와 함께 하는 이른 아침의 산책이었다. 

 

내가 좋아했던(끌렸던) 여성들은 주로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나를 사로잡았다. 그게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다 보니, 다음의 문장과 단어들이 떠올랐다. 어딘가 모르게 지켜주고 싶은, 슬픔(슬퍼 보이는)을 보듬어주고 싶은, 내 외로움을 그녀도 깊이 공감해 줄 것 같은. 그리고 호기심, 연민, 동정, 애틋함, 책임감, 보호 본능, 가련함. 그때를 회상하며 두서없이 써본다.

신형철은 말한다. "몸이 불편하고 성격이 내성적인 조제에게 다가갈 때 그가 품은 감정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그것은 호기심과 동정과 사랑 사이에서 애매해 보이는데, 이 애매함을 견딜 수 없게 된 조제는 쓰네오에게 출입 금지를 선언하고 둘의 관계는 일단락된다(p.21)." 나를 사로잡았던 감정이 무엇인지 처음에는 불분명했다. 사랑의 시작이 어려운 것은 처음에는 누군가에게 생긴 감정이 확실하게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 지긋지긋한 모호함.

어쨌든, 나는 나를 사로잡았던 그녀들을 회상하며, 내 안에는 나 자신이 알아봐 주지 못한 어떤 결핍들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너무 흔한 이야기 일진 몰라도 내게 가장 큰 결핍은 '외로움'이었다. 그녀가 나의 외로움을 알아주고 내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을 것 같다는 환상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기보다, 부족하고 결핍이 많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이다. 결국 (표면적으로는) 상대방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내면적으로는) 그녀를 통해 나의 외로움이 달래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츠네오를 사이에 두고 두 여인은 혼란스러워한다.

 

결여의 관점에서 볼 때, 마치 이 장면은 건강한 다리를 갖고 있는 카나에(우에노 주리)와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가 조제(이케와키 치즈루)와 대조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 이후, 조제와 카나에는 충돌한다. 

 

조제의 세상. 그녀가 자주 머물던 다락방. 그리고 그녀가 세상과 교류하던 수많은 책

 

"요점은 이 영화에서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은 쓰네오가 아니라 조제라는 것이고, 쓰네오가 어떤 답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서사의 관건이라는 것이다. 쓰네오의 대답은 결국 '나도 나를 사랑해'가 되고 말았다. 쓰네오가 조제를 사랑하는 데 성공할 수 있으려면 조제의 결여(다리)만큼의 결여를 제 안에서 발견했어야 했다. 그러나 쓰네오는 실패했다. 예나 지금이나 쓰네오에게는 '없음'이 너무 없는 것이다. 조제의 집을 떠나며 쓰네오가 한발 늦게 오열하는 장면이 그토록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이것이 죄지은 자의 참회의 눈물이 아니라, 실패한 자의 통한의 눈물이기 때문이다. 죄가 아닌 실패를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조제가 쓰네오를 비난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를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조제가 쓰네오를 비난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를 비난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녀는 비난하지 않는다."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p.22-23) 

신형철은 이 영화를 실패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결국 조제와의 관계를 감당하기 힘들어 떠나버리는 츠네오를 보며, 그는 죄지은 자가 아니라 실패한 자이기에 조제가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를 비난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츠네오도 조제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자신 안에 조제를 사랑할 만한 '결여'를 발견하지 못했고, 사랑을 위한 '의지'만 가득했던 그는 결국 부담을 감당하지 못한 채 떠나버리고 만다.

그래서 신형철은 말한다. "우리가 이렇게 자신의 결여를 깨달을 때의 그 절박함으로 누군가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p.25) 끝내 둘 가운데, '결여'를 회복(!) 하지 못한 한 사람은 떠난다. 결여를 느끼지 못한 사람 츠네오는 관계의 지속을 위해 마음의 빈 공간을 발견해 내거나 아님 결국 의리(!)로만 관계를 유지해야 했던 것일까. 대상에 대한 비난은 무의미하다. 우린 두 사람을 그저 바라보고 느껴야 한다.

 

할머니 때문에 헤어졌던 두 사람은 할머니의 죽음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이케와키 치즈루는 영화 속에서 때묻지 않은 풋풋한 미소를 보여줬다.
이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는 조제와 츠네오. 이 장면에서 가슴이 무너졌다.

 

"나는 사랑과 그것과 유사한 것으로 간주될 여지가 있는 본능, 충동, 욕망과 다른 것이라면 사랑이라는 감정 혹은 행위의 고유한 구조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제 여기서는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를 이렇게 요약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p.26) 

이 대목이 참 좋았다. 우리는 사랑의 개념에 관해 자주 논한다. 사랑이란 대체 뭘까. 신형철 또한 욕망과 구별되는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욕망의 세계'에서의 사랑은 '나'가 먼저다. "그저 자신이 '타인의 기쁨의 원인'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됐다(p.21)."는 말과 비슷한 맥락이다. 상대를 필요로 하기보다는 상대를 채워줬다는 만족감을 통해, 도리어 자신이 채워지는 것이 욕망의 세계에서의 사랑이다. 

하지만 '사랑의 세계'에서의 사랑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내 안의 '결핍'을 채울 수가 없다. 당신이 (내 곁에) '있음'이 내 결핍을 자연스레 '채워줄 수' 있다면, 나는 그를 떠날 필요가 없고 그에게 있는 '결핍'도 나를 통해 채워진다면 그 또한 날 떠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늘 오해하는 동물이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꺼려하며, 기적과 같은 우연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 게 문제다. 그러니 환상을 갖고 누군가에게 끌려 만남이 성사되더라도 상대는 결핍이 아니라 채움의 세계로 다가왔을 수 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관계는 쉽게 어긋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내게 조용히 다가와 큰 울림을 준 영화다. 며칠, 이 영화가 준 감동이 가시질 않고 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극 중 '조제'의 모습을 보다가 내 안에 고여 있던 어떤 슬픔을 만난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글로 쏟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답답함이 몰려왔고, 두서없더라도 '그녀'에 관해 쓰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사실 신형철의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통해 이 영화를 먼저 접하게 됐고, 그래서 자연스레 신형철의 사유대로 이 영화를 해석하게 됐다. 사랑을 정의하는 그의 방식이 마음에 들었기에 그의 해석을 적극 수용하였다. 

쿠미코. 조제. 이케와키 치즈루. 그녀를 보며 느낀 감정이 오래갈 것만 같다. 

 

 

조제: 눈 감아 봐. 뭐가 보여?
츠네오: 그냥 깜깜하기만 해.
조제: 그곳이 옛날에 내가 살던 데야.
츠네오: 어딘데?
조제: 깊고 깊은 바닷속. 난 거기서 헤엄쳐 나왔어. 
츠네오: 왜?
조제: 너랑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하려고.
츠네오: 그랬구나. 조제는 바다 밑에서 살았구나.
조제: 그곳은 빛도 소리도 없고, 바람도 안 불고 비도 안 와. 정적만이 있을 뿐이지. 
츠네오: 외로웠겠다.
조제: 별로 외롭지도 않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천천히 천천히 시간이 흐를 뿐이지. 난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가지는 못할 거야.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혼자 깊은 바다 밑에서 데굴데굴 계속 굴러다니게 되겠지. 그런데 말이야. 그것도 나쁘진 않아.


  • 조제: 쿠미코는 자신의 진짜 이름 대신 조제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이 이름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왜였을까. 왜 쿠미코는 조제로 불려지고 싶었을까. 조제처럼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을까. 
  • 호랑이: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다는 조제. 그녀는 츠네오와의 만남을 통해 호랑이를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호랑이는 조제가 가장 무서워한 동물이자 그녀가 앞으로 맞이해야 할 세상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 물고기: 조제는 수족관 휴일 때문에 보지 못했던 물고기를 우연히 발견한 '물고기의 성' 모텔에서 마주한다. 이별이 찾아오고 있음을 직감한 조제. 조제가 그토록 물고기를 찾는 이유는 이별을 준비하고 있던 츠네오에게 자신을 떠나도 괜찮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 물고기는 원래부터 다리가 없는(있어도 사용할 수 없었던) 동물로써 조제 자신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은 또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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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salon)에서 성경에 담긴 생명과 평화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with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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